250화 연모한다
황제가 저녁 무렵에 갑자기 기절한 것이다.
손평이 급히 태의를 불렀지만 태의들은 황제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선왕은 궁에 들어올 때, 황제가 아프다는 말만 듣고 용안을 뵙지 못하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다 저녁 무렵에 황제가 기절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그제야 황제가 정말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태후는 자객에게 습격당한 일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기에, 태의와 궁인들은 그녀의 정신 안정을 위해 황제의 상황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후궁의 다른 비빈들과 황자들은 건양궁으로 뛰어가 뭐라도 하려고 했다.
태의들은 수심에 잠긴 채,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기 전에 손평은 대전에서 황제의 구유를 전했다.
“폐하께서 옥체가 편찮으시어 요양을 하시고 계십니다. 어젯밤에 승상과 호국 공주에게 섭정권을 준다고 했으니 그리 아시오!”
대신들은 웅성거렸다.
‘승상과 호국 공주가 섭정한다고?’
“그럴 리 없네!”
야모침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부황께서 옥체가 편찮으신 건 맞으나 그렇다고 공주에게 섭정권을 줄 리 없네. 손 총관, 감히 부황의 구유를 거짓으로 꾸미느냐?”
다른 대신들도 의심스러운 얼굴로 손평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황제의 구유에 의심을 드러내는 것은 둘째치고 야모침의 행위는 호국 공주가 섭정권을 가진 것에 반대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대신들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지금 야홍릉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생각해 보면 황제가 그녀에게 섭정 대권을 맡기는 것 또한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설마 손 총관이 거짓말을 했겠어?’
손평은 황제의 옆을 수십 년간 지킨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상황을 침착하게 대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선왕 전하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건양궁의 궁인과 한 통령을 불러서 물어보시지요.”
선왕은 말문이 막혀 눈만 부릅떴다.
야홍릉은 조례에 잘 참석하지 않았다.
손평이 구유를 전할 시각, 그녀는 이제 막 깨어난 상황이었다. 눈을 뜬 그녀는 가장 먼저 궁의 일이거나 바깥의 소식을 묻지 않고 침대 옆에 꿇어앉은 청년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뭐 하는 짓이냐?”
그녀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능묵이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능묵은 그녀의 질문을 듣자 공손하게 대답했다.
“어젯밤 제가…….”
“됐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능묵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내가 네 신분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겁먹은 척 여기서 뭐 하는 짓이냐?”
‘황제 중에 얘처럼 이렇게 비굴한 사람이 또 있을까?’
능묵은 시선을 들고 말을 바꾸었다.
“어젯밤에 제가 남편으로서 애비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강제로 잠들게 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야홍릉은 그와 이런 말장난을 할 기분이 아니었다.
헌원용수가 남성국 황제가 아니라 어영위일 뿐이라고 해도 그와 두터운 믿음을 쌓은 이상, 그녀는 그가 선 넘는 행동을 한 번 한 것으로 잘못했다고 죄를 다스리고 싶지 않았다.
야홍릉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능묵은 그녀의 신발을 신겨주었다.
야홍릉은 침대에 앉아서 물었다.
“다 준비한 것이냐?”
어젯밤 능묵이 영영을 시켜 공주부의 고수를 모두 불러와 야홍릉을 지키게 했다. 그래서 야홍릉은 밤새 편히 잘 수 있었다.
아침에 깨어난 야홍릉은 이틀간의 피로가 싹 가신 것을 느꼈다.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홍릉은 그의 무릎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릎을 꿇는 데 재미라도 들인 것이냐?”
능묵은 시선을 들고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애비, 화나지 않으셨습니까?”
그녀가 조금이라도 화를 낼 것 같으면 그는 먼저 잘못을 시인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는 자신이 이렇게 순순히 나오면 야홍릉이 마음 아파서라도 자신에게 벌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화낼 게 뭐가 있느냐? 너야말로 날 온실 속의 화초로 여긴 게 아니냐?”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게 아닙니다. 전 애비가 힘든 게 싫어서 푹 쉬시도록 한 것일 뿐, 다른 생각은 없었습니다.”
능묵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을 마친 그는 순순히 시인했다.
“다음에는 절대 이러지 않겠습니다.”
능묵은 이번 일이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는 전생에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또 그녀의 신임을 얻는 게 얼마나 힘든지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야홍릉은 경계심이 깊기에 그는 특별한 방식으로 서서히 다가가서 신임을 얻은 것이다.
그는 야홍릉의 마음을 가지고 모험할 생각이 없었다.
어렵사리 얻은 믿음이지만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게 정인이든, 다른 신분이든, 허락을 받지 않고 혈자리를 눌러 그녀를 잠들게 한 것은 그녀에게 작은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능묵은 자신이 야홍릉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행동이 모두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야홍릉은 잠자코 앉아 있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헌원용수.”
남자는 깜짝 놀랐다.
“난 널 연모한다. 네가 능묵이든, 헌원용수이든 상관없어. 그러니 이렇게 조심스럽게 굴지 말아라. 나는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 아니야.”
야홍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널 연모한다. 네가 능묵이든, 헌원용수이든 상관없어.’
이 말이 그의 마음에 깊이 박혔다.
능묵은 일어나서 야홍릉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욕정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애비.”
“난 아직 씻지도 못했다.”
야홍릉은 그의 얼굴을 밀어내며 말했다.
방금 사랑 고백을 한 사람 같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 한 잠 자자꾸나.”
능묵은 눈을 깜박였다.
‘잔다고? 애비는 궁이 발칵 뒤집혔다는 것을 모르나?’
“궁이 시끄러우면 시끄러운 대로 내버려 두자.”
야홍릉은 일어나서 옷을 입으며 말했다.
“그들이 진정하고 나면 내가 가서 뒤처리 하마.”
능묵이 따뜻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애비, 현명하십니다.”
그리고 이날 야홍릉은 정말 저택을 나가지 않았다. 그녀는 능묵과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목욕을 하고 욕지의 끝에 걸터앉아 능묵의 준수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시선을 움직일 수 없었다.
“정사의 맛을 본 황제가 그때부터 조례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지.”
야홍릉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능묵은 순순히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이 말은 틀리지 않았어.”
‘참 탐스럽게 생겼단 말이야.’
그녀는 능묵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능묵은 숨을 들이쉰 뒤, 그녀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사내의 기를 쫙 펴고 싶으나 애비의 이런 모습을 보면 납작 엎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제 얼굴은 애비에게 먹히지 않습니까?”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사내의 기를 펴고 싶어?”
능묵이 물었다.
“안됩니까?”
“그럴 수나 있고?”
이 말은 남자에게 큰 도발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옷을 벗고 있을 때에는 더욱 그랬다.
능묵이 낮게 웃었다.
“애비는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이 말은 부드럽기 그지 없었지만 위험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능묵은 야홍릉에게 강압적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아주 강렬한 일격이었다.
야홍릉은 처음으로 자신의 무공 실력과 민첩한 몸놀림이 전혀 소용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능묵의 손에 기대어야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능묵은 약을 잘못 먹은 것처럼…… 아니, 발정제라도 먹은 것처럼 강렬했다.
야홍릉은 그를 받아들이기 버거웠다.
둘은 전처럼 욕지에서 침전으로 장소를 바꾸었다.
침전 안에는 사람 없이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향만 감돌고 있었다.
바닥에는 푹신한 융단이 펼쳐져 있어 겨울에도 추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격렬한 정사를 벌이고 있는 둘의 몸에서는 땀방울이 스며 나오고 있었고 방 안의 온도도 높아지고 있었다.
“애비.”
능묵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두 손으로 허리를 잡았다.
“애비가 주도권을 잡고 싶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야홍릉은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능묵은 손쉽게 자세를 바꾸었다. 야홍릉의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능묵은 융단 위에 눕고 야홍릉은 그의 위에 앉은 자세가 되고 말았다.
“애비, 만족하십니까?”
평소에 강하기만 하던 야홍릉은 녹초가 되어 버렸다.
능묵은 소원대로 사내의 기를 마음껏 펼친 것이다.
다시 욕지로 돌아갔을 때, 야홍릉은 지쳐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쑤시고 시큰거리는 데다가 목소리까지 갈라져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원망하는 어조로 말했다.
“오늘 밤부터 내 침대에 올라올 생각은 하지 말아라.”
능묵은 표정이 굳었다.
“애비…….”
“그런 줄 알아라.”
야홍릉은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어긴다면 가법의 매운맛을 볼 준비를 하여라.”
능묵은 말없이 싱긋 웃었다.
둘은 목욕을 마친 뒤, 편한 침의로 갈아입었다.
능묵은 야홍릉을 안고 침전으로 돌아와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침대 앞에 무릎을 꿇고서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을 조심스럽게 주물러 주었다.
그는 굽혀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자 관리들이 공주부를 찾아왔다.
승상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폐하께서 옥체가 편찮으셔서 조정 대권을 저와 공주 전하에게 맡기겠다고 하시는데,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생각?’
야홍릉은 말없이 승상과 함께 온 관리들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부황의 뜻이니 최선을 다해 보겠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다만 폐하의 병세가 좀 이상합니다. 대신들은 모두 걱정하고 황자와 후궁의 비빈 마마들도 불안해하십니다. 제 생각에는 사정이 급하니 남성국으로 사람을 보내 대황자를 모셔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전하의 뜻은 어떻습니까?”
‘야천란을 데려온다고?’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
“그럼 승상은 누구를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나?”
그러자 승상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대황자는 황제 대신 남성국에 사신으로 갔지만 석 달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 목국에는 골치 아픈 일이 많이 생기고 변방에서는 금국과 전쟁 중이라 남성국에 보낼 마땅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야홍릉이 직접 가는 게 가장 좋긴 했다.
야홍릉은 무공이 강하고 병권도 가지고 있어 병사 수천 명을 데리고 대황자를 모시러 간다면 다른 사람들도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국 공주가 섭정 대권을 위임받자마자 승상이 이런 말을 한다면 그가 홀로 대권을 차지하려고 든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