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빠르게 움직이다
그 말과 함께 야정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야정연의 손가락 틈 사이로 또 피가 흘러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전하! 손이……!”
야정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절망적인 기분과 무력감이 들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눈을 떴다.
“문을 열어라.”
“네, 알겠습니다.”
방문이 열렸다가 또 닫혔다.
야정연은 방으로 들어가 말없이 한참이나 서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창가 앞에 앉아 책을 읽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창문 밖의 금빛 노을이 남자의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비춰 주었다. 남자는 고귀하게 생겼으면서도 때가 묻지 않은 것처럼 순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사락거리는 소리와 손을 묶은 족쇄의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야정연의 귀에 들어왔다.
“전하께서 기분이 많이 좋지 않으신 듯하군요……. 무슨 일이 생긴 것입니까?”
야정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다가갔다.
감진은 탑에 기대앉아서 여유로운 모습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손목과 발목의 족쇄를 무시한다면 지금 그의 모습은 느긋한 나날을 즐기는 부잣집 귀공자 같았다.
“감진.”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야정연이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기분이 좋지 않소. 그래서 이따 자네에게 무례한 행동을 할 수 있소.”
감진이 빙그레 웃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은 웃지 않을 때도 눈을 뗄 수 없었으나 웃기까지 하자 사람들은 넋을 잃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선의로 웃는 게 아니라 비웃고 있었다.
“지금 저를 일깨워주시는 것입니까?”
감진은 시선을 들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께서 기분이 좋지 않아 화풀이를 하시고 싶으시다면 저는 지금 도마 위의 물고기처럼 반항할 수 없는 상황이지요. 그러나 저에게서 뭔가를 알아내고 싶으시다면, 죄송하지만 실망하실 것입니다.”
“내가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 화풀이를 하고 싶은 건 맞소. 그러니 감 공자는 내가 화풀이를 한다고 생각해도 좋고 고문을 한다고 생각해도 좋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고 하기 싫다면 나도 강요하지는 않겠소. 그러나 내 기분이 더 나빠질 수는 있겠군.”
감진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책을 내려놓았다.
“전하께서 하시고 싶은 게 있으시면 하시면 됩니다.”
그는 지금 손발이 묶인 상태라 반항할 수도 없었다.
야정연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뒷짐을 진 오른손에는 피가 흥건했다.
그가 재차 주먹을 움켜쥐자 손 틈 사이로 피가 다시 흘러나오며 값비싼 장포를 적셔 내렸다.
* * *
달이 뜨자 나무는 음산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회색 구름으로 뒤덮인 시커먼 밤하늘에 뜬 달은 눈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빛을 뿜었다.
곧 폭풍우가 쏟아질 것 같았다.
그 짧은 하루 사이에 궁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들이 성 밖 군영에서 다시 공주부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해시였다.
야홍릉은 말에서 내린 뒤, 능묵과 함께 공주부의 대문으로 걸어갔다.
둘은 함께 밥을 먹고 목욕을 한 뒤, 뜨거운 정사를 벌였다.
“전하!”
이때, 대전 밖에서 바람 소리와 함께 영영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왕이 감 공자를 고문하였습니다.”
야홍릉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애비, 화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이 일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능묵은 그녀의 미간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은 지쳤을 테니 애비 먼저 푹 쉬십시오. 내일에는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야홍릉이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혈자리를 눌렀다.
잠이 드는 혈자리였다.
야홍릉은 눈에 힘이 풀리더니 화를 내기도 전에 그의 품에 안겨 잠들고 말았다.
능묵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겉옷을 걸친 뒤, 밖으로 걸어갔다.
“공주부의 모든 영위를 불러와 공주 전하를 보호하여라. 홍릉원에 구궁진을 칠 테니 쳐들어오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라!”
능묵은 담담한 목소리로 엄령을 내렸다.
영영은 그가 작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이 사내는 남성국 황제 헌원용수이며, 목국 호국 공주의 남첩이자 어영위였다.
어떤 신분으로든 야홍릉은 그를 진심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능묵이 야홍릉에게 불리한 행동을 하지 않는 이상, 영영은 그의 지시를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홍릉원을 나선 능묵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오늘은 평온하지 못한 날이었다.
자시, 하얀색 매가 밤하늘을 맴돌더니 귀청을 찌르는 소리와 함께 서신을 물고 남쪽으로 날아갔다.
얼마 뒤, 능묵은 조용히 정왕부에 잠입하였다. 그는 그림자처럼 정왕부의 모든 호원을 피해 영영이 말한 대로 감진을 감금하고 있는 곳에 도착했다.
정왕부의 수비는 아주 엄격했다.
능묵은 사람을 죽이기보다는 조용히 한 방으로 들어갔다.
정왕부의 호원은 그의 옷자락도 보지 못했다.
공기 중에는 이상한 향이 감돌았다.
능묵은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창문을 뛰어넘었다.
방안은 잠입하는 사람을 막으려 했는지 불을 환하게 밝혀 둔 상태였다.
밝은 곳에는 숨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대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수월하게 들어왔다.
그것도 창문을 뛰어넘어서 말이다.
방에는 옅은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능묵은 미간을 찌푸린 채, 창문으로 들어오자마자 병풍 뒤에 숨었다.
서쪽 창가의 탑 위에 아름다운 공자가 눈을 감고 있었다. 몸의 상처는 빨간 옷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창백한 안색이 그의 불편한 몸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창 바깥으로 미풍이 불어왔다.
감진은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는 까만 밤하늘의 별처럼 밝고 맑았지만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어딜 다친 것이냐?”
익숙한 목소리가 병풍 뒤에서 들려오자 감진은 자신의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주인님,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널 구하러 왔다.”
감진은 침묵을 지키다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전 괜찮습니다. 야정연도 별것 없던데요.”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를 구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나간다면 제가 호국 공주의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떠난다면 저는 괜히 고생한 게 되는 거잖습니까?”
“정말 이렇게까지 할 것이냐?”
능묵은 말하며 병풍 뒤에서 걸어 나왔다.
“야정연은 지금 약이 바짝 올라 있다. 누구도 그 인간이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하지 못한다고.”
감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능묵은 감진의 족쇄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이 족쇄는 현철로 만든 것이라 무력으로 풀 수 없습니다. 열쇠는 야정연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두었습니다.”
감진이 말했다.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진이 외상만 살짝 입었을 뿐, 뼈나 내장이 다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감진과 얘기를 나눌 여유가 생겼다.
“왜 잡혀 온 것이냐?”
감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주인님이 그 이유를 아실 줄 알았습니다.”
“너는 해독에 일가견이 있지 않더냐? ‘천진’ 같은 독 때문에 협박당해 올 정도는 아닐 텐데? 진짜 이유는 무엇이냐?”
능묵이 싸늘한 눈빛으로 물었다.
감진은 눈을 내리깔고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능묵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난 해야 할 일이 있다. 네 옆에 사람을 붙여 두겠으니 힘들면 언제든지 외치거라. 그러면 널 구해줄 사람이 올 것이다.”
감진이 웃으며 말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능묵은 그를 힐끗 보고 말했다.
“해결 방법이 많은데 이러다니, 굳이 고생을 사서 하는 게 아니냐?”
“그 말은 좀 이상합니다. 저는 지금 주인님께 충성을 다하여 공주 전하의 적을 제거하는 중인데 저를 칭찬하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왜 말리려고 하시는 겁니까?”
능묵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렇게 부하를 아끼시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역시 사랑은 사람을 부드럽게 만드는군요. 이게 다 호국 공주의 덕이 아닙니까?”
감진은 농담을 건넸다.
“이번 일이 끝나면 네게 자유를 주겠다.”
감진은 깜짝 놀랐다.
‘자유? 나 같은 사람에게도 자유가 있었던가?’
감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주인님께서 정말 저를 아끼신다면 호국 공주의 옆에 남게 해주십시오. 전하께서 정말 등극하신다면 측부라는 신분으로 귀비 정도는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궁에서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고요.”
능묵은 어두운 얼굴로 그를 흘겨보고는 창문을 뛰어넘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빙란각은 사장이 사라져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사죽 소리가 은은하게 펴지고 별실마다 즐거운 웃음소리거나 시를 읊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능묵은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계단을 올라 가장 높은 층의 누각으로 갔다.
누각에 서 있으니 밤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왔다.
마른 몸매는 어둠과 한 몸이 된 것 같았지만 준수한 얼굴은 약간의 불빛에서도 눈부신 후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제왕의 위엄을 풍기며 단호하게 말했다.
“경왕(景王)의 적손자와 장왕(莊王)의 작은 손자, 영왕(寧王)의 막내아들과 적손자를 모두 잡아 와 감금하여라.”
그의 말에 네 개의 그림자가 번개와 같은 속도로 날아갔다.
“봉리(鳳魑), 오늘부터 영위를 모두 데리고 제경 안팎의 각 저택과 성에 잠입해 있어라. 호국 공주의 현갑군을 제외하고 다른 병사들이 움직임을 보인다면 바로 보고하여라.”
“네, 알겠습니다!”
“사청의는 언제 온다고 하더냐?”
“주인님께 아룁니다. 사 공자는 나흘쯤 걸릴 것 같습니다.”
뒷짐을 선 능묵은 귀공자같이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거역할 수 없는 압박감을 풍기고 있었다.
“봉서오에게 서신을 보내 짐의 지시대로 움직이라 하여라.”
“네, 알겠습니다.”
능묵의 지시와 함께 수없이 많은 사람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래전부터 이곳에 두었던 정탐꾼들이 오늘에야 드디어 정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능묵은 홀로 목국에 들어와서 호국 공주의 남첩이 된 것 같지만 그는 진작부터 많은 준비를 해두었다.
모두 결정적인 순간에 야홍릉에게 힘이 되어 줄 사람들이었다.
차가운 밤바람에 얼굴은 빠른 속도로 얼어들었다.
능묵이 말했다.
“감진은 무사하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러자 오랫동안 감진을 따라다닌 부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능묵이 바쁘게 움직이던 그 시각, 궁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