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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48)화 (24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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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화 하늘이 뒤집히다

“짐이 요양하는 동안은 호국 공주와 승상이 섭정한다.”

여인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유난히 단호했다.

“내일 아침 손평더러 이러한 부황의 구유를 전하게 하여라.”

말을 마친 야홍릉은 궁 밖으로 걸어갔다.

한묵은 눈을 내리깐 채, 둘이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야홍릉의 옆에 선 깡마른 몸집의 청년에게 고정되었다.

긴장되었던 신경이 드디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방금, 건양궁에서 한묵은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

이것은 무공을 연마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황제가 호국 공주를 잡아들이라는 지시가 들리는 순간, 공기 중에 갑자기 무시무시한 살기가 뒤덮이는 것을 느꼈다.

그 살기는 촘촘한 그물처럼 대전 안을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야홍릉의 옆에 선 준수한 남자는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한묵은 큰 살기를 느꼈다. 심지어 그는 한묵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묵은 자신이 야홍릉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행동을 했다면 지금쯤 죽었을 거라고 단정했다.

‘호국 공주의 옆에 언제 이렇게 무시무시한 사람이 나타난 거지?’

“한묵은 눈치가 빠른 사람입니다.”

능묵은 야홍릉의 뒤를 따르며 멀지 않은 궁 문을 바라보았다.

“한묵의 태도는 한 상서의 태도겠지요?”

야홍릉이 궁문 밖까지 걸어가자 한 마차가 서서히 다가왔다.

선왕부의 표지가 걸려 있는 마차였다.

“한 상서는 똑똑한 사람이지. 나에게 병권이 있고 조정 육부 중 두 개의 대권도 있는데 한낱 상서가 뭘 어찌하겠느냐?”

게다가 그녀의 무서운 점은 지금 가지고 있는 권력이 아니라 소리 없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었다.

3황자가 죽고 한씨 가문이 멸문된 지 얼마나 되었는가?

정왕의 장인이 무기를 밀매입한 사건도 야홍릉이 밝혀낸 것이었다.

그리고 남성국의 황제가 통혼하려고 하는 사람도 그녀였다.

남성국 황제는 목국을 도와 금국을 물리치는 것을 야홍릉에게 주는 예물이라고 했다.

게다가 지금 제경 전체에서 호국 공주의 야심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문무백관도 멍청이가 아닌데 그들이 어찌 의심을 품어 본 적이 없겠는가?

의심이 생긴다면 그들은 판단할 것이고 선택을 할 것이다.

호국 공주는 성미가 무정하고 결단력이 강하며 각 방면으로 다른 황자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녀는 여인인 것만 제외하면 다른 황자들보다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야심을 드러내고 황위를 빼앗으려고 한다면 대신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한 상서를 제외하고 관직에서 수십 년간 지내 온 나이 든 관리들은 모두 이 생각을 했을 것이다.

충신이라는 이름은 듣기 좋으나 진정한 충신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가문의 이익과 흥성만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호국 공주가 그들에게 부귀영화를 가져다줄지 알 수 없었지만 호국 공주를 반대한다면 가문이 멸문될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흔들림 없이 초심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야홍릉은 지금부터 자신의 매정하고 잔인한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줄 생각이었다.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절대 말로 하지 않을 계획이었다.

마차가 궁 문 밖에서 멈췄다.

마차에서 내린 선왕은 야홍릉의 어두워진 안색을 보더니 비꼬며 말했다.

“궁에서 나오는 길이냐?”

황족 사이는 매정했다.

친 형제자매 사이라 해도 얼마든지 원수로 전락할 수 있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둘째 오라버니, 어디로 가시나요?”

선왕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너 오늘 뭐 잘못 먹었냐?”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나에게 먼저 말도 다 걸고?”

“건양궁에서 나오는 길이에요. 태후마마는 자객에 당하고 황후마마는 자결하여 부황께서 많이 놀라셨나 봐요. 앓아누우셨으니 당분간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도 만나지 않는다고?”

야모침은 안색이 변했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야홍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태후마마께서 자객에 당하셨고 황후마마가 자결했으면 부황께서 자객을 잡으라고 지시하시고 황자와 종친을 불러 황후마마의 장례식에 대해 의논하시는 게 당연한 일인데 왜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이냐?”

궁의 소식이 이렇게 빨리 밖으로 퍼질 리가 없었다.

그러나 야모침은 황제가 아침 일찍 종친과 내각 대신을 궁으로 불러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무슨 일인지 짐작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무모하게 움직일 수 없었다. 종친과 대신들이 궁에서 나와 각자의 저택으로 돌아간 뒤에야 그는 자안궁에 자객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야홍릉은 냉소를 하며 물었다.

“부황께서 쓰러지셨다는데 제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녀의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화가 난 야모침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너는 왜 궁에 남아 효성을 다하지 않은 것이냐?”

“부황께서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하시니까요. 손 총관이 옆에 있으니 제가 나서기도 무엇하고요.”

야홍릉이 말했다.

야모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야홍릉, 네가 한 짓이 아니기를 바라마.”

야홍릉은 코웃음을 치고는 마차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돌리고 야홍릉을 바라본 야모침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궁으로 들어갔다. 어찌 된 일인지 파악하는 것이 시급했다.

‘왜 하루도 지나지 않아 궁에 또 급변이 생긴 거지?’

야홍릉이 마차에 타자 강한 팔 힘이 그녀를 품으로 와락 끌어당겼다.

능묵은 그녀를 탑에 눕히며 미친 듯이 입을 맞추었다.

야홍릉이 호통쳤다.

“장난치지 마.”

“장난친 적 없습니다. 애비는 역시 큰일을 하실 사람이었습니다. 방금 저도 애비의 기세에 깜짝 놀랐지 말입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능묵도 더 이상 장난을 치지 않고 그녀의 옆에 앉아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위엄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계획보다 이날이 빨리 왔지만 나쁠 것은 없습니다. 충분히 통제할 수 있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묵도 더는 말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옆을 지켰다.

마차 안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차가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권력 다툼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군.”

얼마나 지났을까.

야홍릉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녀답지 않은 서글픔이 담겨 있었다.

“다음 생이 있다면 정말 황족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아.”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성미는 권력 다툼을 하는 것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가끔씩 조정에서 필요하다고 하면 그녀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 적을 물리칠 것이다. 전쟁이 없을 때는 저택에서 책을 읽고 무공을 수련하며 여유로운 삶을 지내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바둑을 두거나 달빛이 좋을 때 산책을 하며 또 가끔씩은 넓은 초원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달리는 그런 삶을 원했다.

그러나 막상 상황이 닥치면 그녀가 싫어하는 권력 다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전생에 사무친 원한을 품은 사람이 이번 생이라고 어찌 아무렇지 않게 물러설 수 있겠는가?

전생에 당한 게 너무 많아 그녀는 이번 생에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해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마차는 둘을 싣고 공주부 밖에 도착했다.

야홍릉은 마차에서 내릴 때에는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까의 연약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계단을 오른 야홍릉은 저택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말없이 한참 서 있다 지시를 내렸다.

“여봐라, 말을 준비하거라!”

그러자 곧 누군가가 그녀의 말과 검은색 말을 끌고 왔다.

야홍릉과 능묵은 말에 올라탔다.

둘은 채찍을 휘두르며 제경의 성 밖으로 뛰어갔다.

* * *

쨍그랑!

찻잔이 깨지는 소리가 조용한 서재 안에서 들리자 유난히 귀를 찌를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와 함께 빨간색 피가 손가락 틈 사이로 흘러나오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야정연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상처가 가득한 흑의 부하를 바라보았다.

“어찌 된 일이냐?”

“전하께 아룁니다. 기주로 파견했던 우리 쪽 사람들의 상황이 좋지 못합니다. 형부의 관리를 죽이려고 했던 부하들은 모두 반격을 당했습니다. 그쪽 사람들은 모두 고수라서 저희는 반항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살아 있는 자가 없다고?”

야정연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흑의 부하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네, 없습니다.”

야정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재의 분위기는 얼어붙어 있었다.

흑의 부하 역시 심각한 정도의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서 보고하러 뛰어온 것 같았다. 서재 안에서 흐르는 정적에 그는 자결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야정연이 입을 열었다.

“물러가거라.”

감정의 기복 없이 차가운 목소리였다.

흑의 부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야정연은 눈을 내리깔고 손으로 으스러뜨린 찻잔의 파편을 보았다.

그는 싸늘하게 웃으며 생각에 잠겼다.

‘야홍릉, 내가 정말 네 손에 죽을 것 같으냐?’

손바닥을 돌리자 깨진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야정연은 책상 위의 빨간 천에 피를 쓱쓱 닦았다. 작은 파편이 손바닥을 파고 들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왼손으로 골라냈다.

서재를 나선 그는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회랑을 지났다.

도중에 만난 호원과 시녀들은 그를 보고 예를 올렸지만 야정연은 보지 못한 척, 왕부의 서쪽에 있는 조용한 정원으로 곧게 걸어갔다.

정원 밖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그들은 야정연이 온 것을 보고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그중 검은색 무공복 차림의 젊은 남자는 야정연을 데리고 정원에 들어섰다.

“전하, 궁에 변고가 생긴 듯합니다.”

남자는 문을 열며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

“오늘 아침 폐하께서 중요하게 의논할 일이 있다면서 종친 대인과 내각 대신을 모두 궁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다 자안궁에서 태후가 습격당했다는 말을 들으시고는 급히 그쪽으로 가시면서 의논하던 일을 중단했지요. 태후를 습격한 자객을 잡지 못해 폐하께서는 한묵더러 끝까지 쫓으라고 했는데 황후마마가 자결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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