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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44)화 (245/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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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화 의심의 씨앗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능묵에게 규정을 세워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부터 입을 다물거라. 날이 어두워지기 전까지 말을 하면 안 된다.”

능묵은 안색이 변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님…….”

“입 다물래도. 한 글자라도 더 말한다면 오늘 홍릉원에 들어올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야홍릉이 눈썹을 찌푸리고 호통쳤다.

능묵은 입술을 깨물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야홍릉은 그를 상대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바람소리와 함께 영영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야홍릉의 귓가에 보고했다.

“전하, 폐하가 황족 종친과 내각 대신을 궁에 들이라고 명했습니다. 아마도 몰래 후계자를 선포하려는 것 같습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몰래 선포한다고?”

“대황자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폐하가 의심을 품은 듯합니다. 게다가 요즘 일어난 일로 불안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서 후계자를 선포하는 조서를 작성하고 황족 종친과 내각 대신들에게 확인시키려는 것 같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후계자 조서는 태자를 정하는 성지와 달랐다.

조서를 작성하고 황족 종친과 내각 대신들에게 확인시킨다면 야천란이 언제 돌아오든 그가 살아 있기만 한다면 황위를 이어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갑작스럽게 죽어도 조서가 있는 이상, 다른 사람들은 황위를 노릴 수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황위를 빼앗은 것이므로 황제가 된다고 해도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야홍릉은 침묵하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능묵.”

능묵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주인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 * *

건양궁의 분위기는 숙연했다.

손평은 책상 앞에서 공손한 자세로 먹을 갈고 있었다.

황제는 마지막 상주서를 다 읽은 뒤, 붓을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는 지친 얼굴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제는 짧은 시간 안에 많이 늙었다.

손평은 이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귀한 제왕도 똑같이 늙고 병들며 기쁘고 슬픈 감정에 휩싸인다.

그들에게는 또 끝없는 고민과 걱정이 뒤따른다. 자신의 의심병을 탓하면서도 권력이 지나치게 큰 사람에게는 경계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들이 모두 아들과 대신에 대한 불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황제는 하루가 다르게 초췌하고 늙어갔다.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3황자가 죽고 한씨 가문을 멸문한 지 꽤 지났지만, 그 기억들은 그림자로 남아 황제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의 상황을 떠올린 그는 암울하기만 했다.

“폐하, 어젯밤 잘 주무시지 못하신 것입니까?”

손평은 하던 일을 멈추고 황제의 옆으로 걸어가 그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요즘 조정에 일이 많아 폐하께서 많이 지치신 듯합니다. 정무를 황자들에게 나누어 주십시오. 그들은 젊고 정력도 왕성하기에 폐하의 걱정을 덜어드리는 게 당연한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폐하께서도 숨을 돌릴 수 있겠지요.”

“걱정을 덜어? 내 속을 썩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할 지경이니, 걱정을 덜어줄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는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는 오랜 세월 그를 모신 손평을 믿고 있기에 종종 마음속 얘기도 꺼내고는 했다.

“짐은 요즘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치는구나. 조정에도 일이 많이 생기고 밖에도 유언비어가 끊이지 않으니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손평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황자가 돌아오시면 폐하도 한시름을 놓을 수 있으실 것입니다.”

황제는 눈을 감고 손평의 손길을 즐겼다.

“천란이가 간 지 꽤 지났는데 아직도 소식을 보내온 게 없지? 신은전의 대답도 시원치 않고. 손평, 남성국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혹시 천란이가 위험에 닥쳤거나 한 것은 아니겠지?”

손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것은 아닐 듯합니다. 대황자는 남성국 황제의 등극 대전에 참석하러 간 것인데 남성국에서 대황자를 괴롭힐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자꾸만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성국 황제가 새로 등극하며 야천란은 사신으로 축하하러 갔다.

떠난 지 벌써 삼 개월이 되었지만 여전히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성국은 목국을 도와 금국을 물리치겠다 하며, 이것이 바로 남성국 황제가 야홍릉을 맞이하는 예물이라고 했다.

황제는 흠칫했다. 그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눈을 번쩍 떴다.

몇 달 사이의 일이 빠른 속도로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야천란이 남성국을 떠난 시기와 야홍릉이 밖에서 목국 제경에 돌아온 시기는 비슷했다. 야홍릉이 돌아오기 전에 3황자가 적국과 내통한 증거는 이미 황제의 손에 있었고 그 일로 야홍릉 휘하의 두 장군도 연루되어 있었다.

그래서 야홍릉이 궁에 들어왔을 때, 그는 야홍릉이 두 장군의 일을 알게 되고 급히 온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전혀 모른다던 야홍릉의 표정은 너무나 진짜 같았다.

야모침이 건넨 증거가 빈약한 것에 비해 야홍릉이 내놓은 증거는 완전했다.

비밀 서신, 명단, 동제 황제의 옥새가 찍힌 서신까지 없는 게 없었다.

야홍릉은 야소숙이 동제의 황제와 내통한 자초지종을 상세하게 꿰고 있었다. 직접 조사를 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증거가 완벽하니 황제는 의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홍릉이는 제경을 떠난 육 개월 동안 어디에서 뭘 한 거지? 그저 나들이를 간 것이라면 어떻게 그런 증거들을 다 가질 수 있었지? 야소숙은 변방에 있는데 누가 그와 동제가 내통한 것을 말해준 것일까? 홍릉이는 나들이를 간 게 아니라 야소숙을 상대하러 떠났던 게 아닌가?’

제경으로 돌아온 뒤, 야홍릉이 바친 증거 때문에 야소숙과 한씨 가문은 반역 죄명을 쓰고 천뢰에 갇혔다.

황제는 원래 정에 약해져 처형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갑작스러운 한옥금의 탈옥에 화가 나 한씨 가문을 바로 처형한 것이다. 야소숙도 독주를 먹고 죽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탈옥한 한옥금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천뢰는 수비가 엄격하여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 곱게 자란 한옥금이 탈출할 수 없었다.

‘누가 도와준 거지? 아니면 누가 탈옥을 계획한 건가?’

황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용의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한씨 가문과 3황자가 죽은 뒤, 정왕에게 일이 생겼다.

장양후의 죽음에 가장 큰 혐의를 받은 것이다. 그는 조정 관직을 빼앗긴 뒤, 왕부에 갇혀 지내다시피 했다. 곧이어 기주의 포정사 계한우가 추위의 성적을 조작한 일이 드러나며 그가 뇌물을 받고 병기를 밀매입하는 등 사건도 밝혀지게 되었다. 조사가 끝난다면 이 또한 반역죄로 다스려질 것이다.

죄명이 확실해진다면 정왕도 곧 야소숙의 뒤를 따라 천뢰에 갇힐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육 개월 사이에 아들을 두 명이나 죽인다면 아무리 황제라도 정신적인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조정 대신들과 민간 백성들은 모두 그를 의심병이 심하고 무정한 황제가 아들도 마구 죽인다고 욕할 게 뻔했다.

안개에 가려져 있던 진실들이 서서히 드러나자 황제의 안색도 퍼렇게 변했다.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성국 황제는 홍릉이와 진작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닐까? 그게 아니면 동제의 평양 공주와 통혼을 약속한 뒤에 왜 갑자기 야홍릉을 황후의 자리에 앉히겠다는 거지?’

남성국 황제는 등극하기 전에 야천란을 찍어 남성국으로 보내라고 했다.

남성국 황제가 야홍릉을 황후로 맞이하겠다고 하며 목국을 도와 금국을 물리치겠다고도 했다. 남성국 사신은 그의 황제가 야홍릉과 함께 정무를 보려고 하기에 그녀가 먼저 정무에 익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랬기에 황제는 야홍릉에게 호부와 사부의 직책을 맡긴 것이었다.

남성국과 목국이 통혼을 약속한 이상, 야홍릉의 성격으로는 두 나라의 관계를 가지고 모험할 리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공주부에 남첩을 들인 것도 모자라 제경 전체가 떠들썩해지게 남첩을 총애했다.

그 소문 중에는 호국 공주가 황위를 노린다는 소문도 들어 있었다.

황제는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문득 야자릉이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야홍릉이 황위를 노린다는 말에 그는 의심이 들었지만 야홍릉이 병권을 바쳤기에 바로 그 의심을 지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최근 조정에서 일어난 큰일은 모두 야홍릉과 연관이 있었다!

황제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손평.”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호국 공주가 요즘 이상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더냐?”

손평은 심장이 철렁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저는 궁 밖의 상황을 잘 몰라서……. 하지만 듣자 하니 그 남첩과 매일 합방을 한다고 합니…….”

황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남첩의 신분을 물어보지 못했구나.”

그는 야홍릉에게 측부를 총 다섯 명 하사했다.

야홍릉이 직접 저택에 들인 한경백까지 더한다면 모두 여섯 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야홍릉이 누구를 침대로 불러들였다는 말은 한번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 불쑥 나타난 남첩이 야홍릉의 총애를 듬뿍 받는 것은 물론, 감진과 단씨 형제를 내쫓고 매현근을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다.

이게 그저 단순한 총애 싸움이라는 말인가?

손평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대전 밖에서 시위가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말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황족의 종친 대인과 내각 대신들이 모두 도착했습니다.”

황제는 사색에서 빠져나와 담담하게 말했다.

“들라 하라.”

말을 마친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손평에게 지시를 내렸다.

“사람을 보내 내 말을 전하게 하라. 한 시진 뒤, 홍릉이더러 남첩을 데리고 궁에 들어오라 하여라. 짐은 그 아이의 남첩을 직접 보아야겠다.”

손평은 허리를 굽힌 뒤, 대전 밖으로 걸어갔다.

이때, 대전으로 종친과 내각 대신이 들어왔다.

진작 정무에서 손을 뗀 황족 종친들과 수십 년 동안 정무에 몸 담근 내각 중신들은 나이가 적어도 예순은 넘었다.

손평은 고개를 숙이고 예를 올린 뒤, 그들을 스쳐 지났다.

그러면서 속으로 묵묵히 인원수를 세어 보았다. 스무 명이 되지 않지만 모두 말이 서는 사람들이었다.

오늘 조서가 정해진다면, 앞으로 언제든 황제가 죽어도 대황자가 죽지 않는 이상, 차기 황제는 반드시 야천란이 될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었다.

황족 종친과 내각 대신들은 정무를 보든 안 보든 떠나서 반드시 조서를 지킬 것이다. 그리고 이 노인들은 조정에서도 영향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열 명이나 넘는 사람이 함께 조서의 진실성을 입증한다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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