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흔들리지 않고 싶다
야홍릉은 화청의 의자에 앉아 난간에 기댄 채,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존여비의 세상이지 않느냐? 남자가 밖에서 큰일을 하고 여인은 집안을 관리하는 게 인지상정이고. 민며느리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동양부가 있다는 말은 처음이구나. 남자의 존엄에 먹칠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느냐?”
능묵은 심한의에게 묻는 그녀의 뒤에서 어깨를 주물러주고 있었다.
심한의는 시선을 돌려서 공주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앉아 있는 야홍릉과도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어깨를 주무르는 모습은 영락없는 노리개였다.
그래서 심한의는 야홍릉이 ‘남자의 존엄에 먹칠한다’는 말을 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능묵을 바라본 것이다.
그는 능묵이 아무리 비굴한 남첩이라도 이런 말을 들으며 민망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하지만 능묵은 태연한 얼굴로 야홍릉을 보물 다루듯이 소중하게 대했다. 그의 표정은 진지하고 애틋했다.
심한의는 시선을 거두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수치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능묵이 시선을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한순간이었지만 능묵은 심한의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진심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야홍릉이 물었다.
“왜?”
심한의는 생각을 하고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체면이라는 것은 허영일 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때 심씨 가문의 양자로 입양되었지만, 부모님은 저를 친자식처럼 대하셨고 형님들도 저를 엄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심지어 제가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도 숨긴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는 여동생도 있는데 성격도 좋고 마음씨도 착하며 저와 사이도 좋습니다. 처음에는 가족 사이에 이러는 것은 경우가 아닌 것 같아 불안했지만 아버지께서 저와 여동생을 부부로 맺어주실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너무 기뻤습니다. 전혀 창피하다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요. 그래서 남자의 존엄이나 체면은 저에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보더니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네 시험지를 본 적이 있다. 허무준도 네가 학식이 뛰어나고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무한한 사람이라고 말하더구나.”
심한의는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형님의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능묵은 심한의가 고마움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 사람이 될 생각이 있느냐? 내 사람이 되면 너는 크게 될 것이고 심씨 가문도 평생 무사할 것이다. 너와 심씨 가문이 율법을 어기는 일만 하지 않는다면 난 너희들을 끝까지 지켜줄 생각이다.”
심한의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호국 공주의 능력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천군만마를 지휘하는 사람으로 조정의 남자들보다 훨씬 강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인이었다.
‘내 사람이 되라’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똑똑한 심한의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바로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한 다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심씨 가문의 운명으로 모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외람되오나 공주 전하께 여쭈어볼 게 있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아라.”
“전하,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전하의 사람이 되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내 심복이자 주요 부하, 큰일을 도모하는 동료……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이다. 밖에서 떠도는 소문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선동한 게 맞지만, 소문이 항상 아니 땐 굴뚝에서 나는 건 아니지.”
심한의는 그 말에 또 한 번 흠칫 놀랐다.
“전하께서는 정말 태자 자리를 다투시려는 것입니까?”
“태자?”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코웃음을 쳤다.
“아니, 난 태자 자리를 노리는 게 아니다. 난 제위에 등극할 것이다.”
옷에 감춰진 심한의의 손끝이 떨렸다.
그는 침묵을 지키다 두 번째 질문을 했다.
“확신이 있으십니까?”
여인이 황제가 된다는 것은 목국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심한의는 야홍릉의 말에 비웃거나 의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감히 심씨 가문의 운명으로 도박을 할 수 없어 야홍릉의 확신 어린 말을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야홍릉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3황자와 한씨 가문은 내가 무너뜨렸다. 정왕의 장인인 기주 포정사는 뇌물 수수와 병기 밀매입 때문에 벌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왕의 입지는 더 난처해지겠지. 대황자는 남성국에 갇혀서 당분간은 돌아오지 못할 것이고 2황자 야모침은 멍청이니…… 네가 보기에는 이 정도 확신이면 족하지 않겠느냐?”
심한의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전 전하의 뜻에 따를 것입니다. 다만 전하께 바라는 게 있습니다.”
야홍릉이 말했다.
“말해보아라.”
“벼슬길에는 유혹도 많고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저 또한 앞으로도 초심을 잃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제게 제약을 걸어 주십시오. 제가 앞으로 어디까지 올라가든 평생 제 여동생 한 명만 아내로 삼고 그녀에게 미안한 짓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제가 초심을 잃고 방황한다면 저를 벌하여 정신을 차리게 해주십시오. 전 제 사랑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열여덟 살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을 내리깐 채, 공손한 자세로 앉아 있는 소년에게서는 강한 고집이 느껴졌다. 무릎을 꿇고 있지만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어 전혀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심지가 곧은 사람은 초심을 잃지 않고 명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명리와 권력에 방황할까 두렵다고 했다.
앞으로 초심을 굳건히 지킬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예로부터 이런 걸 걱정할 수 있는 황제가 성군이 되는 법이다. 아직 벼슬길에 들어가기도 전에 앞으로 권력과 명리 때문에 눈이 멀까 걱정하고 초심을 잃어 사랑하는 사람을 저버릴까 두려워하는 심한의는 좋은 남편이자 큰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세상 사람은 일반인이지 환상 속에 존재하는 성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의 결심에 확신이 있더라도 혹시나 하는 경우 때문에 자신을 단속할 무언가를 찾은 것이다.
벼슬길에 들어서면 많은 일이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흘러가는 법이다.
그래서 심한의가 야홍릉에게 자신이 초심을 잃지 않도록 단속해 달라는 것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가 정인을 저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달라고 조건을 내건 것이었다.
야홍릉은 그를 감시할 수도 있고 특별한 경우에는 그를 도와 난처한 상황을 해결해 줄 수도 있었다.
심한의는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사랑에 대해서도 이렇게 깊이 멀리 생각하여 만일의 경우를 대비할 줄도 아니, 다른 일도 충분히 그러지 않겠는가?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오른 뒤, 첩실을 가득 들이고 미인을 품에 안기 원하지. 그런데 넌 좀 다르구나.”
심한의가 대답했다.
“전 그저 제 양심에 미안한 짓을 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양심에 미안한 짓을 하고 싶지 않다?’
야홍릉이 말했다.
“부디 네가 그러기를 바라마.”
능묵은 생각에 잠겼다.
‘여동생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깊고 자제력이 강하다면 절대 다른 마음을 품는 일이 생기지 않겠군. 여인에 대해서도 이렇게 진심을 다 하니, 다른 쪽으로도 믿을 만한 사람이겠군.’
“먼저 내려가 보아라. 심심하면 한경백을 찾아가 얘기를 나눠도 좋다.”
야홍릉이 말했다.
심한의는 대답한 뒤, 물었다.
“저는 언제 기주로 돌아가면 됩니까?”
“기주 포정사의 사건을 조사한 뒤에 돌아갈 수 있다. 너는 추위 성적 조작의 피해자 겸 증인이니 지금 돌아간다면 계한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죽여 입을 막으려 할 것이다.”
심한의는 미간을 찌푸렸다.
“심씨 가문 쪽은 내가 사람을 보내 보호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공주 전하,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그는 일어나서 자리를 떴다.
야홍릉은 난간 앞에 앉아서 떠나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가 큰 인물이 될 것 같으냐?”
능묵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부를 떨었다.
“주인님의 안목이 어디 가겠습니까? 심한의는 쓸 만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 조정의 핵심 인물이 될 것입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돌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본 뒤, 밖으로 걸어갔다.
능묵은 그녀를 따라갔다.
“주인님, 어디 가십니까?”
야홍릉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곧 연말이니 조정의 각 부문이 모두 바쁠 텐데 나도 집에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능묵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주인님이 언제 가만히 계셨습니까? 우리는 매일 아주 바쁘게 보내지 않았…….”
야홍릉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입 다물어.”
능묵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 몰랐다.
화가 났으나 짐짓 위엄 있게 호통치는 야홍릉의 모습.
그는 야홍릉의 이런 모습이 좋았다.
‘체력이 좋은 게 내 잘못인가?’
야홍릉의 체력도 나쁘지 않았으나 남자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능묵은 이 일로 화를 내는 야홍릉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음번에 애비에게 주도권을 주면 되지.”
“뭐라고 했느냐?”
능묵은 그제야 생각을 말로 내뱉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는 애비가 주도권을 가지고 움직이세요. 전 절대 반항하지 않고 애비가 하자는 대로 하하겠습니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본 뒤, 말했다.
“가죽 채찍과 초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능묵은 당황하여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가죽 채찍? 초?’
“그건 누구에게서 배운 것입니까? 주인님이 저를 짓밟는 것은 좋으나 주인님처럼 우아하고 고귀한 여인이 어찌 이런 것을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능묵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아하고 고귀해?’
야홍릉은 능묵의 아부에도 꿈쩍하지 않고 말했다.
“너도 그런 책을 보면서 내가 그러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느냐?”
능묵은 눈을 깜박였다.
“애비.”
“응.”
“가죽 채찍과 초를 제외하고 애비께 필요한 것은 쇠사슬이 될 것 같습니다.”
능묵은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저처럼 무공 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손발을 묶어야 주인님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주인님께 복종하는 쾌감을 즐길 수 있고요.”
야홍릉은 입가를 실룩이며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너, 정말 혼나고 싶으냐?”
능묵은 반항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서 야홍릉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전 사나 죽으나 주인님의 것입니다. 주인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이 인간은 점점 더 뻔뻔스러워지는구나. 아직도 어영위의 신분을 가지고 있지만 전처럼 귀엽지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