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각자의 계략
능묵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애비와 함께 잠자리에 들 수만 있다면 자세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애비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요.”
‘거짓말하기는.’
야홍릉은 외설적인 삽화가 가득한 책을 다시 서랍에 넣으며 눈을 감았다.
“잠이나 자거라.”
능묵은 그녀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애비.”
야홍릉은 눈을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
‘또 왜 이러지?’
“좋은 날은 택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비에게 주도권을 되찾을 기회를 주지요.”
능묵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애비의 체력도 이제는 회복되지 않았습니까?”
야홍릉은 눈을 감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밤만 해도 침대보를 세 번이나 바꾸었다.”
“한 번 더 바꾸면 되지요. 정려와 정란도 이해해 줄 것입니다.”
능묵은 그녀의 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야홍릉도 방금 수모를 갚아주고 주도권을 되찾을 생각이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요즘 시국이 어지러워서 체력을 보충해야 한다. 이번 일이 해결되면 다시 손봐주마.”
결국에는 이성이 이기고 말았다.
능묵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활짝 웃는 그의 얼굴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는 야홍릉이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야홍릉은 정사까지도 딱딱하게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 딱딱하고 메마르기 그지없었지만 능묵은 행복하기만 했다.
전생에 짝사랑만 칠 년이었다. 끝내 놓치고 만 여인을 이번 생에는 일찍 품에 안았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를 가진 그는 세상을 가진 것만 같았다.
밤이 깊어지자 둘은 끌어안은 채로 잠이 들었다.
* * *
같은 시각.
누군가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야정연은 서재에서 한참 앉아 있었다. 어두운 표정이 불안한 그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하의 뜻은 호국 공주가 정말로 황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호국 공주는 여인이지 않습니까…….”
정왕부의 심복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말했다.
“여인이라고? 나도 홍릉이를 그저 여인이라고만 생각했다.”
정왕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야홍릉은 항상 남자들만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호국 공주의 권력이 점점 커집니다. 이러다 전하에게 불리할까 걱정됩니다. 어서 폐하께 호국 공주의 야심을 알려야 합니다.”
다른 심복이 말했다.
황제는 의심이 많았다.
이것 때문에 그들은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음해하기에는 또 가장 좋은 반격 무기이기도 했다.
황제가 야홍릉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다른 황자들보다도 야홍릉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공주가 황제가 된 선례는 없었다.
황제는 절대 황자가 아닌 공주에게 황위를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야정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부황께 야홍릉의 야심을 알리라고?’
그도 이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왕부에 갇혀 지낼 때, 그는 수많은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가장 흔한 방법은 황제의 중요한 물건을 야홍릉의 서재에 넣어 두고 사람을 불러 조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먹히지 않았다.
호국 공주부는 수비가 완벽하고 엄격하여 일반인은 들어갈 수도 없었다.
들어간다고 해도 수색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야모침이 소문을 퍼뜨렸을 때, 그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바로 소문에 불을 지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야홍릉의 음모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시간이 너무 짧아 그는 깊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의 곤경에 처한 것이었다.
기주의 사건이 해결되기 전까지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보인다면 야홍릉의 음모에 빠질 수 있었고 황제도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전하.”
서재 밖에서 공손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정연이 대답했다.
“들어오너라.”
밖에서 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서재에 있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야정연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뭐라고 했다.
야정연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알겠다.”
그 사람은 물러갔다.
야정연이 말했다.
“오늘은 이만하지. 볼일이 있으니 이만 나가겠다.”
심복들은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야정연은 옷을 갈아입고 서재를 나섰다.
지금 딱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였다.
* * *
빙란각에는 즐거움에 찬 목소리가 흘러넘쳤다. 야정연은 시녀의 안내를 받으며 삼 층의 별실로 들어가 붉은 옷을 입은 감진을 만났다.
감진은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꽃 같았다.
아니, 꽃보다는 독 같았다.
아름다움이 극치에 달했을 때 그 독은 치명적일 것이다.
“정왕 전하라니, 귀한 손님이시네요. 전하는 미인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소관을 원하십니까?”
감진은 눈을 굴리며 매혹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야정연은 시위 한 명만 데리고 빙란각에 방문했다.
온몸에 흑의를 두른 것을 보니 암위가 분명했다.
야정연이 손을 젓자 암위는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야정연은 별실의 문을 닫았다.
감진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가의 의자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등불 아래에서 보니 유난히 아름다웠다.
감진은 물이 끓고 있는 주전자를 들어서 차를 타기 시작했다.
하얀 손가락을 익숙하게 놀리는 행동까지 아름다웠다.
“정왕께서 미인을 안으려고 오신 것은 아니실 테고, 저 때문에 오신 것입니까?”
감진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야정연은 감진의 왼쪽에 있는 하석에 앉았다.
그는 느긋하게 옷을 정리하며 말했다.
“감 공자에게 물어볼 말이 있어 왔소.”
감진은 열심히 차를 타며 담담하게 물었다.
“뭐가 궁금하신가요?”
야정연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차를 타는 감진의 행동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감 공자, 그대는 지금 호국 공주의 측부라는 것을 잊었소? 기루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공주의 측부가 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감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이미 공주부에서 쫓겨났습니다.”
야정연이 말했다.
“하지만 공자의 이름은 이미 황족 족보에 올라 있지 않소?”
“괜찮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감진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야정연은 한참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정말 쫓겨난 것이오?”
“거짓일 리 있겠습니까?”
감진은 차를 따른 찻잔을 야정연의 앞에 놓으며 말했다.
“제 솜씨를 한 번 느껴보십시오. 아무나 드리는 게 아닙니다.”
말을 마친 그는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붉은 옷을 입은 그는 행동 하나하나가 우아했다.
온몸에서 멋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야정연은 찻잔을 들고 입가로 가져가서 냄새를 맡았다.
미간이 펴진 그는 아무렇지 않게 차를 마셨다.
맑고 씁쓸한 맛과 함께 향긋한 차향이 입안에서 퍼졌다.
야정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찬사를 보냈다.
“감 공자의 솜씨가 좋군.”
감진이 대답했다.
“전하의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안부도 물었고 차도 마셨으니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갈 때였다.
야정연이 물었다.
“감 공자는 어디에서 왔소?”
“왜 그러십니까? 호적 조사라도 하시는 것입니까?”
감진은 시선을 들고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야정연이 대답했다.
“감 공자의 출신이 궁금할 뿐이오.”
감진은 눈을 내리깔고 차를 마신 뒤,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전 그저 천한 목숨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보지. 감 공자는 호국 공주부의 사람이오?”
야정연이 또 물었다.
감진은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하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저는 공주부의 측부이고 황족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그러니 명분으로 따지면 공주부의 사람이지요.”
“그것 말고는 없소?”
감진은 고개를 저었다.
“공주부에 들어가기 전까지 저는 공주부와 아무런 왕래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전까지 그는 호국 공주라는 이름만 들어봤지 야홍릉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고 둘은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가 누구의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사실 명확했다.
그는 남성국 태자 헌원용수의 지시를 받고 호국 공주를 보호하러 공주부에 들어간 것이다.
따지자면 그는 야정연의 질문에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헌원용수와 야홍릉의 관계.
그가 헌원용수의 지시를 받고 호국 공주에게 충성하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야정연이 대답했다.
“공주부에 들어간 것은 누구의 지시를 따른 것이오?”
감진은 시선을 들며 물었다.
“지금 심문하시는 것입니까?”
야정연이 대답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되오.”
감진은 미소를 지었다.
원래 아름다운 얼굴인 그는 웃지 않을 때도 경국지색이었다.
그러나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미소를 짓고 있자 온몸으로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감진은 여유로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제가 공주부의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야정연은 불쾌한 듯,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는 제경에 십 년 넘게 있었지만 그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았지요.”
감진은 손을 들어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어떻게 처사했는데 전하도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 관리 귀족에서 졸병에 평민까지, 제 앞에서 위엄을 부린 자들은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야정연이 차갑게 말했다.
“황권 앞에서 감히 굴복하지 않겠다는 말이오?”
감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폐하께 말씀드려 빙란각을 수사할 것입니까? 아니면 병사를 출동해 빙란각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일 것입니까?”
야정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하께서 즐기러 오신 게 아니라면 일찍 돌아가 쉬십시오. 이곳은 전하가 오실 만한 데가 아닙니다.”
야정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봐라.”
밖에서 지키고 있던 흑의 고수가 들어오며 허리를 숙였다.
“전하.”
“감 공자를 왕부로 모셔라.”
감진은 고개를 들고 시위를 바라보다가 창가 앞의 의자에 기댔다.
“제게 무력을 사용하실 생각입니까?”
야정연이 대답했다.
“난 말을 잘 듣는 사람이 좋소.”
감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가 반골이라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이자는 무공 고수일 뿐만 아니라 독을 쓰는 데도 능하지. 날이 밝기 전에 빙란각의 모든 이가 죽기를 바란다면 안 가도 되오.”
야정연이 싸늘하게 말했다.
감진은 표정이 굳더니 시선을 들었다.
그는 아름다운 눈으로 야정연을 차갑게 쏘아보며 말했다.
“지금 그게 무슨…….”
“공자, 큰일 났습니다!”
바로 이때, 밖에서 초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2층 별실의 손님과 여인들이 모, 모두…… 기절했습니다. 숨이 붙어 있으나 깨어나지 않습니다.”
감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야정연을 바라보더니 소름 끼치게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정왕 전하,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난 감진 공자를 난감하게 할 생각이 없소. 감 공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많다기에 알아볼 것이 있을 뿐이오.”
야정연은 옷을 툭툭 털며 말했다.
감진은 냉소를 하였다.
“정왕이 요즘 곤경에 처했다던데 막다른 골목에 몰려서 저를 찾아오신 것입니까? 기주 포정사 계 대인이 잡힌다면 연루될 사람도 한가득일 텐데 이번에는 마음이 좀 아프시겠습니다. 이래서 이렇게 급하신 모양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