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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39)화 (2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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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화 야심의 크기

야홍릉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한참 뒤에야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뭐라고?”

“소문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전 위로가 필요합니다.”

능묵은 그녀의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주인님?”

“착하지.”

야홍릉은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그렇게 마음 약한 사람이 아니야.”

“전 마음이 약합니다.”

“아니, 전혀. 넌 아주 강해.”

야홍릉이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능묵은 고개를 저으며 고집을 부렸다.

“전 위로가 필요합니다. 안아주고 입을 맞춰줘야 위로가 되지요.”

야홍릉은 또 침묵에 잠겼다.

그녀는 말없이 능묵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목욕하러 갈까?”

능묵은 눈을 반짝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야홍릉은 다른 일을 해서 머리를 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게 말이다.

머리를 비운 뒤에 앞으로 어떻게 할지 다시 생각해볼 계획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시를 내렸다.

“날 안고 가거라.”

능묵은 눈을 깜박이더니 공손하게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네, 공주 전하.”

말을 마친 그는 야홍릉을 번쩍 안고서 회랑을 지나 홍릉원으로 갔다.

능묵은 예전의 기억이 떠올라 품에 안긴 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주인님, 저를 안고 갔던 기억이 나십니까?”

야홍릉은 그의 어깨에 기댄 채, 되물었다.

“그게 왜?”

“그 느낌을 음미하고 있습니다.”

능묵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예전에는 주인님이 왜 저를 이렇게 부드럽게 대하실까 항상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주인님과 저는 생사도 갈라놓을 수 없는 운명이었지요.”

그는 원래 과묵한 사람이었다.

신은전 어영위일 때나, 남성국의 황제일 때나 그는 잘 웃지도 않고 다른 사람과 쉽게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야홍릉의 앞에서는 그는 항상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진심으로 즐거워서 활짝 웃는 웃음.

야홍릉 앞에서 그는 항상 그랬다.

야홍릉은 눈을 감고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보름이나 바삐 보낸 탓에 그녀는 많이 지쳤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차갑기만 해서 그녀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사람들은 잘 몰랐다.

야정연과 야모침 몰래 일을 처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부와 사부는 이미 내 통제에 들어왔고 병부는 중립이지.”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중립인 것은 야홍릉에게 가장 좋은 상황이었다.

적어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올해가 곧 끝나게 됩니다. 주인님, 계획이 있으신가요?”

능묵이 부드럽게 물었다.

“새해가 다가와도 사람을 죽이는 데는 지장이 없지.”

능묵이 대답했다.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황제가 새해라는 점을 감안하여 그들을 봐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을 지펴야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도 못하게 말이야.”

야홍릉이 차갑게 말했다.

뜨거운 열기에 김이 모락모락 나자 분위기가 야릇해졌다.

홍릉원의 욕지 안은 열기가 일렁였다.

남첩은 욕지에서 침전으로 옮겨가며 강인한 체력으로 야홍릉에게 큰 만족감을 선물했다.

항상 차갑기만 하던 야홍릉의 눈빛 역시 정욕으로 물들었다.

그들은 한나절 동안이나 정사에 푹 빠져 있었다.

* * *

어둠이 내려앉자 제경은 등불로 환해졌다.

각 기루에서 손님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제경에서 가장 큰 기루인 빙란각에는 손님이 가득 찼다. 사죽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고 미인들이 얇은 면사 치마를 입은 채 손님들에게 아양을 떨었다.

금붙이를 몸에 가득 두른 관리와 귀족들은 고개를 쳐들고 빙란각으로 들어와 수많은 미인 중에서 원하는 미인을 끌어안았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위층으로 올라가 화괴를 불러 술을 마셨다.

빙란각의 삼 층 개인 별실에서 붉은 옷을 입은 감진은 창가의 앞에 앉아 술잔을 들고 있었다.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눈부실 정도로 어여뻤다.

“공자.”

이때, 한 소년이 별실에 들어오더니 조용히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형부상서 정창의 아들 정승원(丁承元)이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감진은 시선을 들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자는 왜 왔지?”

이 말은 소년에게 하는 질문이 아니라 혼잣말에 가까웠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진은 옅게 미소를 짓더니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왜 왔는지 알 것 같기도 하네. 그자에게 전해. 내가 오늘 몸이 좋지 않으니 손님 접대를 할 수 없다고. 정말 용건이 있다면 그의 배후에게 직접 오라고 해.”

“네.”

소년은 물러갔다.

감진은 술을 마셨다.

달콤한 술향기에 그는 실눈을 뜨고 별이 가득 박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맑고 깨끗한 눈동자에는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가 드리웠다.

“공자.”

흑의 암위가 방에서 조용히 나타나서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정왕의 장인어른이 뇌물수수의 일에 연루되었습니다. 황제가 크게 화를 내며 형부상서인 정창더러 이 사건을 조사하라고 했습니다. 정왕부의 고수들이 모조리 출동해 증거를 없애려 기주로 갔습니다.”

이 말을 들은 감진은 아무렇지 않게 술을 마신 뒤, 매혹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호국 공주도 이 일을 알고 있냐?”

“네, 그러합니다.”

감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아라.”

‘공주가 알고 있다면 주인님도 아시는 거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지 계획을 다 짜두셨겠군.’

“네.”

감진은 창가에 앉아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차가운 밤바람에 그의 얼굴은 차갑게 얼었다.

감진은 우울한 눈빛을 한 채,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는 손을 뻗어 창문을 닫고 우아하게 일어났다. 붉은 장포를 입은 그는 어두운 밤과 대조되게 강렬한 분위기를 풍겼다.

“목국이 곧 뒤바뀌겠구나…….”

한탄에 가까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고개를 젓고 방을 나섰다.

* * *

밤이 되었다.

야홍릉은 피곤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능묵은 그녀의 옆에 애완동물처럼 엎드린 채,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애비.”

야홍릉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애비.”

“응.”

야홍릉은 대담하며 눈을 감았다. 온몸이 피곤해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능묵은 만족스럽지 못한지 눈을 반짝이며 또 불렀다.

“애비, 왜 그러십니까?”

야홍릉은 그의 부름에 대꾸하기도 귀찮았다.

“애비.”

짜증이 난 야홍릉은 그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닥쳐.”

능묵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애비는 체력이 좋지 못한 것 같군요.”

야홍릉은 침묵하다가 말했다.

“능묵.”

“…….”

“침대 끝에 가서 무릎을 꿇고 있어라. 날 귀찮게 굴지 말고.”

야홍릉이 말했다.

능묵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가 서서히 걷혔다.

자신의 무례를 알아차린 그는 다급히 사과했다.

“애비, 잘못했습니다.”

야홍릉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능묵은 자꾸 웃음이 났지만 주인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침대 모서리로 가서 야홍릉을 마주한 채, 무릎을 꿇었다.

이 광경은 아내에게 가법으로 다스려지는 남편 같았다.

드디어 조용해지자 야홍릉은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그녀는 한마디도 더 하고 싶지 않았다.

방금까지 실컷 야홍릉을 안은 능묵도 더 이상 떠들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반 시진이 지난 뒤.

그는 야홍릉의 옆으로 이동해 이불을 젖히고 들어가 야홍릉을 끌어안았다.

초겨울의 밤은 기온이 낮았다. 그가 이불 안으로 들어오며 한기를 느낀 야홍릉은 눈을 뜨고 물었다.

“누가 너더러 들어오라고 했느냐?”

“애비는 말만 못되게 하시지 않습니까? 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제가 애비의 이불 안을 덥혀 드리지요.”

능묵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누가 누구의 이불을 덥혀준다는 말이냐?”

능묵은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애비가 저더러 무릎을 꿇고 있으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야홍릉은 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넌 힘들지 않으냐?”

‘뭐?’

능묵은 멍하니 있다가 그녀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야홍릉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애비, 화내지 마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능묵은 불쌍한 눈빛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저도 힘듭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잘 모르겠는데?”

눈에 생기가 돌고 얼굴이 상기된 것이 누가 봐도 기운이 펄펄 나는 모습이었다.

“정말입니다.”

능묵은 애완동물처럼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애교를 부렸다.

“주인님…….”

야홍릉은 침묵했다.

반 시진 정도 쉬자 그녀도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제야 그녀는 그와 얘기할 기운이 생겼다.

하지만 말을 곱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소식이 없느냐?”

능묵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제가 지금 알아볼까요?”

“내가 물었을 때, 바로 답을 해야지. 넌 영위로서 실격이구나.”

능묵은 미간을 찌푸리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남첩의 신분 아닙니까?”

“지금 변명하는 것이냐?”

능묵은 침묵을 지키다 고분고분하게 말했다.

“계편이 필요하십니까?”

‘애비는 지금 부끄러운 마음에 괜히 더 쌀쌀맞게 구나 본데?’

그도 그럴 것이 야홍릉은 정사를 마치고 체력이 바닥났을 때나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나보다 체력이 못 해서 화가 나신 건가?’

야홍릉은 기분이 좋지 못했다.

이는 그녀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우리 둘의 체력은 비슷하잖아…… 어영위가 되려면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 하는 건 맞으나 나도 무공을 연마한 사람인데 이렇게 차이가 날 건 없잖아? 그리고 이런 것과 혹독한 훈련을 받은 것과 연관이 크게 없지 않나? 왜 항상 나만 지치고 능묵은 멀쩡하지?’

능묵은 야홍릉이 화난 이유를 알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애비, 만족하십니까?”

‘뭐? 뭘 만족하냐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생각을 해보았다.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평온하게 말했다.

“그럭저럭.”

“그럼 제가 다음에는 더 노력해서 애비를 만족시키겠습니다.”

능묵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을 마친 그는 침대 머리맡의 서랍에서 책을 꺼내 펼쳤다.

“주인님, 어느 자세가 마음에 듭니까?”

야홍릉은 의아한 눈빛으로 책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빛은 미묘하게 변했다.

능묵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주인님?”

야홍릉은 손을 뻗어 책을 든 뒤, 한 장 한 장 펼쳐 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능묵보다 더 진지했다.

한참 뒤, 그녀는 그중 한 그림을 가리켰다.

“다음에는 이 자세로 해보자꾸나.”

능묵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애비가 위에 있고 내가 아래에 깔린 자세잖아?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기대하는 듯하구나.”

이건 질문이 아니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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