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폭풍우가 휘몰아치다
“그만!”
황제는 화를 억지로 참으며 입을 열었다.
“홍릉이를 깎아내리는 게 아닌 상주서를 찾아내거라.”
“네.”
손평은 대답한 뒤, 상주서를 하나하나 펼쳐 보았다.
그는 상주서를 읽어보고 옆에 쌓아두었다. 황제는 평온한 얼굴로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았지만,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은 사라질 줄 몰랐다.
산처럼 쌓여 있던 상주서를 절반 넘겨 뒤적여서야 손평은 겨우 호국 공주를 깎아내리는 내용이 담겨 있지 않은 상주서를 찾았다.
“폐하.”
손평은 상주서를 황제에게 건넸다.
“이것은 호부의 6품 주사(主事, 관직 이름)가 올려온 것입니다. 호국 공주가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나 호부를 맡은 지 보름 만에 호부의 모든 장부를 확실하게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금 채무 정황까지 완벽하게 조사해 합당하게 해결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관리들이 빌려간 돈은 받기 힘든 돈이었는데 호국 공주가 강경한 수법으로 받아오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받았을 거라고 합니다…….”
“이름이 무엇이냐?”
손평이 대답했다.
“이 주사의 이름은 요영(姚榮)입니다.”
황제가 말했다.
“이리로 부르거라.”
“네.”
황제는 숨을 깊게 들이쉰 뒤, 다시 대교습에게 물었다.
“밖에서 떠돌고 있는 소문은 어떻게 된 것이냐?”
“폐하께 아룁니다. 반은 진실이고 반은 과하게 부풀려진 것입니다. 호국 공주는 야밤에 매 측부가 시녀와 단둘이 있는 것을 직접 보고 매 측부의 행위가 단정치 못하고 그 의도가 수상하다고 여겨 채찍 백 대를 내리고 장작 창고에 가두었습니다. 이튿날 점심, 선왕 전하가 매씨 가문의 차남을 데리고 따지러 갔습니다. 매현령은 마음이 급한 나머지 호국 공주에게 무례한 말을 했고 공주의 새로운 남첩이 매현령을 때렸습니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진술했다.
그는 말에는 개인적인 감정도 담지 않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은 채, 그저 있은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단어를 잘 선택해서 사용했다.
‘따지러 갔다’는 말은 선왕과 매현령이 시비를 걸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음이 급한 나머지’라는 말로 매현령이 충동적으로 공주에게 무례를 범했음을 암시했다.
그러니 결국 그가 먼저 잘못을 저질렀기에 매를 벌었다는 말이었다.
대교습의 얘기를 들은 황제는 그의 의도대로 반응했다.
“매현근은 홍릉이의 측부이니 홍릉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들이 무슨 이유로 따지러 간 것이냐? 참 간도 크구나!”
대교습은 계속 이어서 말했다.
“호국 공주부에서 무안을 당한 선왕은 궁으로 들어가 폐하께 고자질을 하려 했으나 옥체가 좋지 않은 점을 감안해 호국 공주가 남첩을 들이고 그 남첩이 관리의 자제를 때리도록 내버려 둔 악행을 퍼뜨리도록 했습니다.”
황제는 침묵을 지키다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호국 공주의 대권을 가지고 있어서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었다는 소문은 누가 퍼뜨린 것이냐?”
대교습이 대답했다.
“정왕이 선왕의 행동을 전해 듣고 이 정도 소문으로 부족하다고 여겨 사람을 보내 소문에 불을 지핀 것입니다.”
쨍그랑!
황제는 찻잔을 들어 바닥에 던졌다.
손평은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폐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저는 그저 사실의 경과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신은전은 뒷세력이니 증거를 원하신다면 믿을 만한 관리를 보내셔서 조사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마에 툭 튀어나온 실핏줄은 황제의 마음속 분노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쉰 뒤, 말했다.
“손평, 승상과 한묵, 정창을 불러오거라.”
손평은 지시를 듣고 물러났다.
대교습도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그는 궁에서 항상 흔적 없이 조용히 다녔다.
그러나 오랫동안 궁의 어두운 곳에 있었던 그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홀로 어두운 구석에 서서 햇살이 눈 부신 밖을 바라보는 그는 생각에 잠겼다.
아무 감정도 없어야 하는 그는 머지않은 미래가 떠올랐다.
황궁은 예전과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신은전은 존재를 드러낼 수 없는 황제의 조력자였다.
그들은 황위에 앉은 사람만 위해 존재하며 자신만의 생각이나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또 태자 다툼에서 그 어떤 황자의 편도 들 수 없었다.
신은전의 규정은 아주 많았다.
그중 하나라도 어긴다면 죽은 목숨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었다.
아무리 사람을 감정 없는 도구로 훈련해도 예외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가 바로 그 예외였다.
그는 기분만 잘 통제한다면, 말하는 어조만 신경 쓴다면 황제의 앞에서 여전히 완벽한, 아무런 결함이 없는 도구였다.
황제는 그를 이용해 자신이 알고 싶은 모든 정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는 이 정보들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서 추려지고 또는 보태진 것인지도 모르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직접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황제는 관리를 파견해 알아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관리가 알아내는 것 역시 신은전이 손을 댄 후일 것이다.
황제는 이것을 영원히 모를 것이다.
* * *
근정전의 분위기는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야정연은 직접 보지 못했지만 곧 다가올 폭풍우를 예감했다.
그는 재빨리 심복과 정왕부의 암위를 파견해 각각 지시를 내렸다.
“가장 빠른 속도로 기주에 가서 계한우에게 알리거라. 병기 창고의 모든 입구를 봉하고 장부책을 파기하여 심씨 가문 사람들의 입을 막으라고!”
“부황이 기주에 보내는 관리들을 매수해! 매수할 수 없다면 죽이고!”
“심한의를 산 채로 잡아 와!”
“기주의 관리들에게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전하라. 누구라도 내 일을 그르친다면 가문을 몰살하겠다고 해!”
황제가 기주의 일을 조사할 사람을 알아보고 있을 때, 정왕부의 암위들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정연은 서재에 앉아 갈색 약병을 꺼내 만지작거리다 옆에 있는 흑의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독사처럼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창의 아들이 빙란각의 감 공자를 좋아한다고 했지? 이것을 그에게 전해주어라. 그러면 원하는 사람이 그의 품에 안길 것이다.”
흑의인은 약병을 가지고 떠나갔다.
야정연은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서재의 분위기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운 것 같았으나 또 아주 또렷한 것 같기도 했다.
‘야홍릉. 야홍릉! 내가 정말 네 손에 당할 것 같으냐? 꿈 깨시지!’
* * *
같은 시각, 다른 곳.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영영, 공주부의 모든 영위를 출동시켜 정왕부의 첩자를 막아라. 반드시 심한의의 일가가 무사해야 한다.”
능묵이 말했다.
“공주부의 사람을 출동시키기는 불편하니 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능묵은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말했다.
“공주부의 사람을 제경에 남겨 두어야 황제가 정왕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낼 게 아닙니까?”
황제는 지금 화가 나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경에서 연이어 일어난 일로 그는 황자들이 그를 끌어내려서라도 황위를 차지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생각은 서서히 그의 이성을 갉아먹을 것이다.
이렇게 민감한 순간에는 작은 움직임조차 황제의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고 살기를 끌어낼 수 있었다.
야홍릉은 회랑의 기둥에 기대어 한참이나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그자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능묵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번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현근도 쓸모가 있었지요.”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현근은 스스로 찾아온 바둑돌이었다.
그가 만약 공주부에서 몸을 사리고 조용히 있었다면 야홍릉도 굳이 그를 괴롭힐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육 개월 넘게 조용히 있던 그는 움직임을 보였다.
매현근이 스스로 원한 것인지, 아니면 야모침이 그에게 지시를 내린 것인지를 막론하고 공주부에서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매현근을 벌할 때, 야홍릉은 이미 야모침이 찾아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남첩이 매현령을 때리게 내버려 두었다’는 약점을 내준 것이다. 야모침의 충동적인 성격으로 차분하게 계획을 짜기는커녕 야홍릉에게 불리한 소문을 내기에 바쁠 것이다.
제경에는 귀족이 많기에 모여서 한담은 나누는 모임도 많았고 귀족의 사생활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을 좋아하는 심심한 아낙네들도 많았다.
호국 공주가 남첩을 들인 일은 남자의 존엄에 대한 도전이었다.
아무리 야홍릉이 공을 세운 입장이라도 그들은 야홍릉의 공을 인정하는 한편, 그녀가 여인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자들이 보기에는 여인이 남첩을 들였다는 자체가 사생활이 난잡한 것이었다.
그녀가 측부를 저택에 들이고 남첩을 기르며 여인의 몸으로 큰 권력을 움켜쥔 것만 봐도 호국 공주는 그 어떤 친왕이나 황자보다 더욱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런데다 누가 의도적으로 선동까지 하니 유언비어가 퍼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야홍릉이 유언비어를 신경 쓸 리가 없었다.
떠들썩한 소문을 잠재우는 것은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가 소문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정왕의 장인어른 쪽 일로 화가 나고 불안할 것입니다. 소문이 오히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되었지요.”
능묵은 싸늘하게 코웃음 쳤다.
이번에도 야정연은 곧 야홍릉의 손에 당하게 될 것이다.
그는 야모침이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보고 ‘호국 공주가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었다’는 소문을 선동했다. 이것으로 야홍릉에 대한 황제의 의심과 경계를 불러일으킬 생각이었으나 자신의 꾀에 자신이 당한 것이었다.
두 황자가 손을 잡고 여동생을 음해하는데 황제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기주 포정사는 심씨 가문의 재산을 독차지하려다 실패하니 과거 시험에서 심씨 가문 양자의 앞날을 망쳤다.
이 일로 계한우는 그동안 뇌물을 받은 돈으로 병기와 갑옷을 사 모은 행동이 적발되었다. 수상한 행동에 그의 가족은 몰살당할 것이다.
이것과 비교했을 때, 야홍릉에 대한 소문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신은전의 대교습은 궁에서 오래 있었기에 어두운 곳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존재라고 해도 황제에 대해 손평 못지않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가 있는 한, 주인님은 많은 걱정을 덜 수 있지요.”
능묵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야홍릉은 말없이 서서 생각에 잠겼다.
“주인님.”
능묵은 야홍릉의 어깨를 끌어안고 고개를 그녀의 목덜미에 묻었다.
“밖에 퍼지는 소문은 제게 큰 상처입니다.”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