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모함이 이어지다
십일월 초이틀.
궁에서 푹 쉰 황제는 정신이 맑아진 것 같아 조례를 원래대로 열겠다고 했다.
야홍릉은 암홍색 치마를 입은 채, 대전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싸늘한 표정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장포를 입은 능묵은 그녀의 옆에 서서 호위무사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나 지나치게 준수한 용모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그에게 향했다.
편전에 들어서니 대신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중에 정왕과 선왕도 있었다.
황제는 며칠간 쉬면서 허약한 몸 때문인지 마음도 약해진 상태였다.
그는 몇 남지 않은 아들을 떠올리자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장양후는 태후의 남첩일 뿐, 그의 친아들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정왕도 정왕부에서 조용히 지낸데다 초유도 결국에는 성공하지 못했기에 황제는 더 이상 정왕을 벌할 생각이 없었다.
그도 자신의 아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능력이 있는 황자들 중 황위에 욕심이 없는 황자가 어디 있겠는가?
제위에 욕심을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선을 넘는 짓만 하지 않으면 황제는 다 봐줄 생각이었다.
그는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그도 예전에는 다른 황자들과 태자 자리를 다퉈서 승리한 황자 중 하나였다.
태자 다툼에서 어떤 것이 필요한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 그와 경쟁했던 형제들은 그가 등극한 뒤, 하나둘 살해당해서 지금은 실권이 없는 친왕만 한 명 남았다.
그가 야천란을 좋아하는 것은 야천란의 욕심 없는 듯한 성격 때문이었다.
예전의 그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겉으로는 황위에 욕심이 없는 듯하지만 사실 그것 또한 방법이었다.
황제는 그 방법을 아주 좋아하고 있었다.
그래서 황위를 기꺼이 조용하나 똑똑한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이 점에서 야천란은 기준에 꼭 부합했다.
다른 아들들도 뛰어났으나 툭하면 사고를 쳐서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야소숙이야말로 황자들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궁에는 태후와 황후가 뒤를 봐주고 있고 밖에는 한씨 가문이 뒤를 받쳐주었다. 예전에는 야홍릉까지 그를 지지했기에 조력자로 따지면 야소숙의 조건이 제일 좋았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황제는 그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적국과 내통까지 하지 않았는가?
그런 야소숙을 황제가 어찌 가만둘 수 있겠는가?
그에 비하면 황제는 다른 아들들에 대해서는 그나마 너그러운 편이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야천란을 태자로 정한 그는 야천란이 남성국에서 돌아오면 바로 태자의 자리에 앉혀 다른 황자들이 괜한 기대를 접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천란이는 왜 아직도 남성국에서 돌아오지 않는 거지? 구월 초에 갔으니 벌써 두 달이 지났는데? 심지어 소식도 보내온 게 없고.’
황제가 신은전에 물어보았으나 신은전에서는 대황자가 아직 남성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만 했다.
남성국에 동제의 황제도 머물고 있는데 둘이 얘기를 잘 나누고 있다는 게 다였다.
남성국에 새 황제가 등극하였으니 각국의 황자와 황제들과 사이를 돈독히 하려고 잡아두는 거라고 했다.
황제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해 그냥 넘겼다.
태자의 일을 결정한 황제는 정왕더러 조례에 참석하라고 했다.
그리고 슬슬 그에게 일을 나누어줄 계획을 하고 있었다.
실추된 그의 명예가 얼른 회복되기를 바랐다.
편전에서 야정연은 처음으로 야홍릉의 옆에 있는 남첩을 보았다.
야홍릉이 소개를 하지 않았지만 흑의 시위복을 본 순간, 그는 능묵이 바로 요즘 떠들썩한 남첩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여기는 편전이지 네 공주부가 아니야. 남첩을 이런 곳에 데려오는 건 경우에 맞지 않은 행위 아닌가?”
야정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대신들은 모두 시위를 거느리지 않고 궁으로 들어오며 데려왔다 하더라도 문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런데 야홍릉이 조례의 대전까지 시위를 데려오다니?
“그러게나 말입니다. 공주 전하의 이런 행위는 규정에 어긋납니다.”
당 어사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공주 전하는 황족의 존엄을 일 순위로 생각하셔야 합니다. 최근에 황성이 떠들썩한데 공주 전하께서 전혀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야홍릉은 당 어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야정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넷째 오라버니, 그동안 집에 가만히 계시더니 요즘 정보를 잘 모르나 보네요?”
야정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너 그게 무슨 뜻이야?”
야홍릉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넷째 오라버니는 제 남첩에만 신경 쓰느라 오라버니의 장인어른 뵈러 갈 시간도 없으셨나 봅니다?”
야정연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야홍릉은 싸늘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곧 알게 될 거니까.”
야정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순간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야모침은 이쪽의 상황을 보다가 뭐라고 끼어들려고 했으나 조례에 오를 시간이 되었다. 야홍릉은 홀로 정전으로 걸어가며 능묵에게 말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라.”
능묵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정은 엄숙함의 대명사였다.
신분이 야홍릉의 시위이기만 한 그는 아직 대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능묵은 자신한테 쏠린 대신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밖으로 나갔다.
사람이 없는 곳에 도착한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휙 하고 사라졌다.
이때, 큰 목소리가 들렸다.
“황제 폐하 납시오!”
조정 대신들은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 만수무강 하십시오!”
용포를 입은 황제가 손평의 팔에 손을 올려놓은 채, 걸어와 용의(龍椅)에 앉았다. 그는 대전을 굽어보며 위엄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두 일어나게.”
“감사합니다.”
그동안 그는 조용히 지냈다. 황제는 바깥의 소리 소문을 듣지 못한 채, 침궁에서 푹 쉬었다.
태의가 준 탕약을 마신 그는 몸이 전보다 호전되었고 안색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러나 오랜만에 조례에 오른 그는 조정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용건이 있으면 얘기하라 하라.”
손평은 황제의 말을 전했다.
“용건이 있으면 전하고 없으면 물러가라십니다.”
용건이 없을 리 없었다.
황제가 며칠 동안 쉬어서 잡다한 상주서가 많이 쌓인 것은 물론이고 호국 공주가 요 며칠 쳤던 사고만 해도 어사와 문관들은 할 얘기가 가득했다.
손평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 아룁니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신도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폐하…….”
“폐하…….”
대신들이 하나둘 나서며 말했다.
그들은 화나고 불만으로 가득한 표정이었으나 미묘하게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과 달리 야홍릉이 조례에 참석한 것을 보고 그녀가 얼마 전에 얘기했던 추위 성적 조작 사건을 떠올렸다.
대신들의 높은 목소리에 머리가 아픈 그는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짐이 며칠 쉬었더니만 경들이 이렇게 부지런해졌을 줄 몰랐군. 아주 뿌듯하네. 하지만 얘기할 것이 많아도 차례로 하나씩 얘기하게.”
그러자 가장 먼저 나섰던 대신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잠시 후.
“홍릉아, 저번에 얘기했던 추위 성적 조작 사건은 어떻게 되었느냐?”
황제가 시선을 야홍릉에게 돌리며 물었다.
그러자 조정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추위의 성적을 조작해?’
대신들은 서로서로 눈치를 보며 무슨 얘기인지 파악했다.
야홍릉은 앞으로 나선 뒤, 허리를 살짝 굽히고 대답했다.
“부황께 아룁니다. 어사와 다른 대신들이 모두 급히 드릴 말씀이 있나 본데 그들더러 먼저 얘기하라고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소매에서 두툼한 증거를 꺼냈다.
“이것들은 모두 추위 성적을 조작한 증거입니다. 한 번 보십시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평은 황제의 뜻대로 계단에서 내려와 야홍릉의 손에서 증거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 두 손으로 황제에게 건네주었다.
황제는 야홍릉이 바친 증거를 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경들도 할 얘기가 있으면 하게. 다 듣고 있으니.”
야홍릉이 올린 증거는 아주 완전했다.
그중에는 장부책도 있었고 비밀 서신도 있었으며 시험지도 있었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
황제는 가장 처음 시험지를 펼쳐 보았다.
글씨체가 힘 있고 정연한 것이 지식인의 느낌이 다분했다.
그가 쓴 문장도 날카롭고 겸손한 것이 아주 훌륭했다.
문장을 끝까지 읽지 않았지만 황제의 눈에는 이미 찬사의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글을 읽으면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지. 이 시험지의 저자인 심한의는 아주 훌륭한 젊은이군.’
“폐하께 아룁니다.”
이때 당 어사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쉬고 계실 때 밖에는 유언비어가 휩쓸었습니다. 모두 호국 공주에 대해 불만이 많습니다.”
‘뭐라고?’
황제는 멍한 얼굴로 시험지에서 시선을 뗐다.
“호국 공주에 대해 불만이 많다고? 이게 무슨 소린가?”
그는 야홍릉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러나 야홍릉은 당 어사의 말에 관심이 없는 듯,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제경 각 곳에서 공주 전하가 남첩을 들인 것에 대해 의논하고 있습니다. 폐하, 황족 공주 출신인 호국 공주는 황실의 체통과 위엄을 지켜야 마땅하나 이렇게 언행에 조심하지 않고 황족의 존엄을 무시하고 있습…….”
당 어사가 화난 얼굴로 말했다.
“잠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남첩이라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홍릉이의 공주부에 있는 측부들은 내가 보낸 사람들이잖아? 당 어사는 지금 나한테 불만이 있다는 건가?’
“폐하께 아룁니다. 당 어사는 지금 홍릉이가 새로 들인 남첩이 매씨 가문의 장남에게 사적으로 형벌을 준 일을 말하는 듯합니다.”
이때, 야모침이 나서며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홍릉이가 남첩을 새로 들였는데 그 남첩은 성질이 고약하고 마음도 악독합니다. 있지도 않은 죄명으로 매현근에게 형벌을 가한 게 아니겠습니까? 저도 이 얘기를 듣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매현령과 함께 공주부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남첩이 제 앞에서 매현령을 때려 다치게 했습니다. 홍릉이를 믿고 설치며 황자인 저도 안중에 두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놀란 표정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남첩을 새로 들였다고? 듣자 하니 성미가 고약하고 머리도 멍청한데다 홍릉이를 믿고 으스대는 것 같은데?’
황제는 이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심한의의 문장을 다시 읽어보았다.
이런 실력으로 추위도 통과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는 시험지를 접은 뒤, 다른 증거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또 보고할 것이 있나?”
“폐하께 아룁니다.”
이때, 왕 어사가 나섰다.
“호국 공주의 사생활을 제외하고도 최근 제경에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호국 공주가 사내들을 마구 들이는 게 다른 야심이 있다고 말입니다. 신도 이 소문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나 호국 공주가 여인의 몸으로 사부, 호부의 대권과 병권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