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작은 벌을 내리다
정려가 잘못을 시인하는 순간부터 매현근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그는 온몸이 뻣뻣해지고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능묵의 질문을 들은 그는 정신을 번쩍 차리고 정려를 노려보며 말했다.
“정 낭자, 그게 무슨 말이오? 내가 언제 불러냈다고 그러시오? 괜한 사람을 모함하지 마시오!”
그리고 그는 능묵을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넌 그저 공주 전하의 노리개일 뿐인데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따져 묻는 것이냐?”
“내가 자격이 없다고?”
능묵은 코웃음을 치더니 말을 이었다.
“공주 전하의 측부가 야밤에 자지 않고 정원에서 시녀와 단둘이서 밀회를 즐겨? 네가 바람을 피우려는 게 목적이든, 다른 꿍꿍이가 있든 죽은 목숨이다. 그런데도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나한테 큰소리를 치느냐?”
매현근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누가 바람을 피웠다고 그래?”
“여기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있나?”
“너…….”
“매현근.”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싸늘한 얼굴은 오늘따라 낯설게 보였다.
그녀는 고요한 시선으로 매현근을 바라보더니 살을 에는 것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해명해 보아라.”
그녀의 말에 주변의 온도가 급속도로 냉각되는 것 같았다.
매현근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매정하다고 소문난 호국 공주는 그를 죽은 사람 보듯이 서늘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매현근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러나 그는 가까스로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힌 뒤, 공손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전하께 아룁니다. 저는 공주부로 들어온 뒤로 한 번도 전하와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이 없습니다. 그동안 이러면 측부라는 신분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측부들도 이름뿐인 것을 생각해 전하께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오전, 공주 전하가 이 사내와 밤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총애를 다투고 싶은 마음이 들어 정 낭자를 부른 것입니다. 공주 전하의 취미를 알아내 전하의 환심을 살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규칙을 어겼다면 벌을 달갑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절대 다른 마음은 없었음을 알아 주십시오…….”
“정려.”
능묵은 매현근의 장황한 말을 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매현근의 말을 잘랐다.
“매 측부의 말이 사실이냐?”
정려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공주 전하께 아룁니다. 매 측부는…… 저를 첩자로 만들 생각이었습니다…….”
“허튼소리!”
매현근은 안색이 변하며 정려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정려, 왜 전하 앞에서 날 모함하는 것이오? 내가 뭘 잘못한 것이오?”
그는 방금까지 수줍어서 어쩔 줄 모르던 소녀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거짓말할 줄 몰랐다. 물론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아직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는 시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 그녀가 스스로 그에게 정보를 전해주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이야.
순간, 매현근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정려를 노려보았다.
“네 음모구나……!”
“그만!”
야홍릉이 무표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봐라! 매 측부가 공주부의 규정을 어기고 시녀와 밀회를 즐겼다. 또한 내 움직임을 감시하려는 등 수상한 행동을 보였으니 쳐 죽여라!”
‘쳐 죽이라고? 이렇게 바로 죽인다고?’
정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매현근의 얼굴은 핏기가 싹 사라졌다.
“공주 전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전 폐하께서 하사한 전하의 측부이니 전하는 저를 이렇게 죽일 수 없……!”
“닥치거라!”
능묵은 그를 차갑게 노려보더니 고개를 돌려 야홍릉을 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이렇게 죽인다면 폐하께 드릴 말씀이 없지 않겠습니까? 채찍 백 대가 어떻습니까? 조금만 벌을 줘도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작은 벌? 채찍 백 대가 작은 벌이라고?’
정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네 말대로 하거라.”
야홍릉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며 지시를 내렸다.
“끌어내서 채찍 백 대를 때리거라. 그리고 장작 창고에서 보름간 반성하게 하여라.”
시위들은 야홍릉의 말이 끝나자마자 매현근의 양쪽 팔을 잡고 끌어갔다.
매현근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소리를 질렀다.
“전하, 억울합니다. 전하……!”
“더는 말하지 말거라. 소용없으니.”
능묵이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사정을 하여 네 목숨을 살려주었지만 굳이 고마워할 것은 없다. 장작 창고에서 푹 쉬도록 해라.”
말을 마친 그는 손을 저어 시위들이 매현근을 끌어가게 했다.
정려는 입이 벌어졌다.
‘우리 폐하는 못 하는 게 없네. 황제일 때도 훌륭하더니 남첩 역할도 그럴듯하게 하고. 이제는 공주를 등에 업고 제멋대로 구는 역할까지 천연덕스럽게 소화하시네? 호국 공주 같은 여인만 한 나라의 황제를 남첩으로 두고 다른 측부들과 총애를 다투게 내버려 둘 수 있지. 그리고 질투를 핑계로 다른 마음을 품은 사람을 제거까지 하고. 대단해, 아주 대단해!.’
하룻밤 사이에 제경 전체에 호국 공주가 새 남첩을 들였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그때 측부를 들였을 때보다 더욱 떠들썩했다.
새 남첩이 성질이 고약하고 공주의 총애를 등에 업은 채, 제멋대로 굴었다는 것에 사람들은 관심을 보였다.
새 남첩은 짧은 시간 내에 측부 세 명을 내보내고 다른 한 명에게 벌까지 주었기 때문이었다.
곳곳에서 그에 대해 의논하는 소리가 넘쳐났다.
의논하는 도중, 많은 대신은 중요한 일이 떠올랐다.
호국 공주는 남성국의 황제와 혼약한 몸이었다. 그런 그녀가 당당하게 남첩을 들였으니 어떻게 남성국과 혼인을 한다는 말인가?
남성국 황제가 이 일로 화를 내며 목국의 공주가 정조를 지키지 않고 목국에 성의가 없다고 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심각한 결과가 일어나는 게 아닌가?
백성들은 통혼에 대해 잘 모르고 국가 대사에도 관심이 없어 소문을 퍼뜨리기에 바빴지만 조정 대신들은 그렇지 않았다.
대신들은 걱정에 빠졌다.
그러나 남들의 생각을 신경 쓸 야홍릉이 아니었다.
야홍릉은 전과 다름없이 조정을 드나들고 사부와 호부에 출입했다.
그런 그녀의 옆에는 새로 들인 남첩이 항상 따라다녔다.
* * *
매현근이 채찍에 맞은 다음 날.
야모침과 매현령이 공주부를 방문했다.
말이 좋아 방문이지 사실 야홍릉에게 따지러 온 것이다.
“그들을 침향사 화청으로 모셔라.”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집사는 그녀의 지시를 받고 물러갔다.
홍릉원은 야홍릉의 개인 영역이었다.
그녀는 홍릉원에서 손님을 잘 맞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야모침을 침향사의 화청에 데려가게 한 뒤, 그녀는 침전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능묵은 말없이 그녀를 따라다녔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
“후회됩니다.”
능묵은 입을 삐죽 내밀고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애비가 유언비어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는 건데.”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대답했다.
“난 괜찮아. 별로 신경 쓰지 않으니.”
하지만 그는 신경이 쓰였다.
대부분의 소식은 그들이 일부러 퍼뜨린 것이지만 세상은 여인에게 불공평했다.
남자가 첩실을 가득 들이거나 외실을 둔다면 사람들은 기껏해야 그 사람이 풍류스럽고 호색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여인은 달랐다.
야홍릉은 일반 여인과 달랐지만 세상 사람들은 남자와 같은 잣대로 야홍릉을 평가하지 않았다. 게다가 남성국과의 통혼이 엮였으니 일은 더 커졌다.
만약 누군가 이것을 트집으로 잡아 뭐라고 한다면…….
야홍릉은 그를 바라보더니 그에게 손을 저었다.
능묵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순순히 그녀의 옆으로 걸어갔다.
야홍릉은 그의 턱을 치켜들고 입을 맞추었다.
능묵을 다독이는 듯한 행동이었다.
“걱정할 것 없어. 죽고 싶은 자들이 있다면 찾으러 오라고 하라지.”
능묵은 눈을 크게 뜨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의 입술을 만져보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빨리 뛰었다.
“주인님.”
그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야홍릉을 바라보며 애원했다.
“한 번만 더 해주세요.”
그녀가 처음으로 먼저 그에게 입을 맞춘 것이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 번 더?’
야홍릉은 가까이에 다가온 능묵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만졌다. 그러자 능묵은 더욱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다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는 됐지?”
능묵은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젠 주인님의 사람이 되었으니 앞으로 많이 사랑해 주십시오.”
야홍릉은 말없이 그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을 마친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능묵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제자리에 굳어졌다.
그는 빠르게 그녀의 뒤를 따르며 생각에 잠겼다.
‘내 말을 못 들었나? 아니, 내 말을 알아들은 게 맞나?’
둘은 함께 침향사에 도착했다.
침향사에는 야모침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고 매현령은 화난 얼굴로 난간 앞에 서 있었다.
간혹 야모침에게 불만을 터놓는 것 같았다.
야홍릉과 능묵이 회랑에 나타나자 야모침은 그녀를 보더니 매현령에게 눈치를 주었다.
매현령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홍릉아.”
야모침은 상냥하지 않은 얼굴로 일어나 야홍릉에게 말을 건넸다.
그리고 시선을 그녀의 옆에 서 있는 잘생긴 남자의 얼굴에 돌렸다.
“이자가 바로 네가 갓 들인 노리개냐?”
그는 능묵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으며 무례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럴 만도 했다.
고귀한 황자가 어찌 몸을 파는 남첩 따위에게 예의를 갖추겠는가?
“오라버니,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하세요. 전 바빠서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요.”
야모침은 시선을 거두며 담담하게 말했다.
“현근이를 보러 왔다.”
야홍릉은 옆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매현근은 손님을 만나기 불편한 상황이에요.”
“뭐가 불편한데? 노리개 때문에 매현근에게 손을 대? 부황이 아실까 두렵지 않아?”
야모침은 미간을 찌푸렸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싸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첫째, 매현근은 공주부의 사람이에요. 제가 그를 어떻게 하든 외부인이 간섭할 일은 못 되지요. 둘째, 매현근은 다른 마음을 품고 제 옆의 시녀를 매수해 제 동향을 파악하려고 했어요. 이 두 가지 이유만으로 때려죽인다고 해도 과한 게 아니지요. 더 하실 말씀이 있나요?”
야모침은 이를 악물었다.
“개를 때려도 주인을 보라는 말이 있다. 매현근은 매씨 가문 사람인데 네가 어찌…….”
“둘째 오라버니는 귀가 좋지 않은 거예요? 기억력이 좋지 않은 거예요? 매현근은 공주부의 사람이니 그를 어떻게 하든 제 마음이에요.”
“야홍릉!”
야모침은 화난 얼굴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