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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32)화 (23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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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화 밤바람이 찹니다

말을 마친 그는 뜨거운 시선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애비.”

야홍릉은 시선을 들었다.

“시녀들이 점심 식사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그래서? 낮인데도 그 짓을 하겠다는 거냐?”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능묵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야홍릉은 그의 애절한 눈빛을 무시하며 말했다.

“방금 전에 갈아입은 옷이라 더럽히고 싶지 않다.”

“제가 벗겨드리겠습니다. 절대 애비의 옷을 더럽히지 않을 것입니다.”

능묵이 다정하게 말했다.

“…….”

“애비?”

“날 지쳐서 죽게 할 셈이냐?”

능묵은 침묵을 지키더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전 애비가 절 죽을 정도로 힘들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마셨다.

“애비.”

야홍릉이 안된다면 안되는 거였다.

능묵이 아무리 감언이설로 꼬셔도 소용없었다.

“또 쓸데없는 말을 하면 계편으로 혼내겠다.”

그러자 능묵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계편?’

야홍릉이 정말 매를 든다고 해도 그는 반항하지 않겠지만 이런 분위기에서 계편을 언급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예전에는 계편으로 맞아서 피가 나면 야홍릉은 안타까워했겠지만 지금 피를 본다면 침대에서의 흥미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는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능묵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야홍릉의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정려와 정란이 음식을 다 준비하자 점심을 들 시간에 가까워져 있었다. 오늘은 둘이 늦게 일어난 탓에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도 지체되었고 측부들의 문안 인사를 받느라 또 시간이 지체된 탓이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다 보니 벌써 오전 시간이 다 지난 것이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야홍릉은 체력을 보충할 겸 낮잠을 자려고 했다.

능묵은 그녀와 함께 잠을 잔 뒤, 정려더러 침전을 잘 지키라고 하고는 홍릉원을 나갔다.

봉매를 시켜 감진과 단씨 형제를 부른 그는 정원 뒤편으로 향했다.

늦가을을 지나 겨울이 가까워진 탓에 호수 중심의 화청은 쌀쌀했다.

그러나 조용하고 주변이 뻥 뚫려 있어 누구도 능묵의 귀와 눈을 속이고 몸을 숨길 수 없는 장소였다.

능묵은 느린 걸음으로 구름다리를 지나 화청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화청에서 자리를 골라 앉았다. 그러자 그의 귓가에 공손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를 뵙습니다.”

능묵이 시선을 들자 감진과 단홍상, 단백의가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보였다.

“일어나거라.”

능묵은 황제가 되기 전이었음에도 호칭을 바로잡지 않았다.

“목국의 상황은 이미 알아보았다. 내일부터 감진은 빙란각으로 돌아가고 단홍상, 단백의 너희는 감진을 따라 빙란각에서 음률(音律)을 배우거라. 다른 것은 나중에 다시 알리겠다.”

감진은 능묵의 말에 불만이 없었다. 그가 공주부에 측부로 들어온 것은 몰래 야홍릉의 일을 도우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인이 돌아왔으니 다른 일을 할 때가 되었다.

단홍상과 단백의는 더욱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능묵은 목국에 온 지도 며칠 되었으니 목국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들에게 더 물어볼 것이 없었다.

있다고 해도 야홍릉에게 물어보면 되었다.

대신 다른 일이 있었다.

능묵은 단씨 형제를 내보낸 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애비와 함께 동제에 다녀온 적이 있다.”

‘동제?’

감진은 안색이 변했다.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던 그는 표정이 굳은 채,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영린이 애비를 수양 누님으로 모시기로 하였고, 애비는 지금 동제의 평양 공주로 책봉되었다.”

감진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주인님께서 동제와 통혼한다던 소식도 사실 호국 공주 전하와 혼인한다는 거였군요?”

능묵의 말대로라면, 동제의 평양 공주와 목국의 호국 공주는 같은 사람이었다.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진은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영린이 왜 갑자기 공주 전하를 누님으로 모신다는 거죠? 그처럼…….”

‘그 인정사정이 없는 사람이, 황위와 권력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던 그 사람이 왜 남을 누님으로 모신 걸까? 친누님도 있으면서?’

“무슨 조건을 내걸던가요? 아니면 공주 전하와 어떤 합의를 본 건가요?”

야홍릉은 전쟁에 능했다. 영린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직접 정무를 볼 수 있는 나이였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강한 섭정왕에게서 위기를 느껴 갖은 수를 써 영위와 대항할 사람을 찾는 것도 있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야홍릉은 뭘 가질 수 있지? 영린이 그녀에게 뭘 준다고 약속했을까?’

공주라는 명분이 조건일 리 없었다.

그 정도에 영린을 도울 야홍릉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은 없었다. 영린은 애비와 인연이 있다고 누님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공주로 책봉하는 조서를 내렸더군.”

능묵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감진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영린답지 않은 행위인데?’

“너에 대해 물어보더구나.”

감진은 흠칫 놀랐다.

“저를요?”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진은 그럴 리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번 생에 그는 일찍 동제를 떠났기에 영린과 마주친 적이 없다고 봐야 했다.

그는 더 이상 영린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십 년 전에 동제를 떠날 때, 영린은 몇 살이었지?’

감진은 영린의 나이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가 떠날 때 영린은 어린애였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들은 대화도 거의 하지 못했다.

어쩌면 영린은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영린이 궁금해야 할 사람은 헌원용수나 야홍릉이어야 했다.

감진은 영린이 자신에 대해 물어봤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용수가 그를 속이지 않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는 없었다.

그는 진작 동제의 영린에 관한 모든 소식을 단절한 채, 지내왔다.

그는 이번 생에 더 이상 영린과 엮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정신을 차린 감진은 능묵이 이미 자리를 떠났음을 깨달았다.

그는 아무도 없는 호수를 말없이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감진의 시선에 어두운 그늘이 져서 평소에는 밝고 유하기만 한 그의 인상에 차가운 분위기가 맴돌고 있었다.

* * *

능묵은 홍릉원으로 돌아왔다.

내전으로 들어오니 야홍릉이 마침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다녀온 것이냐?”

“해결할 일이 있어 좀 다녀왔습니다. 주인님, 더 주무실 건가요?”

야홍릉이 답했다.

“아니.”

일어나려고 하던 그녀는 능묵에게 깔려 도로 침대에 눕고 말았다.

붉은 입술이 뒤덮이며 남자의 향이 확 풍겼다. 남첩답지 않은 난폭함이었다.

야홍릉은 잠깐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정신을 차린 그녀는 능묵의 귀를 잡고 그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에서 떨어뜨렸다.

“정신 좀 차려라.”

능묵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애비.”

야홍릉이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내일 하면 되잖습니까. 꼭 지금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능묵은 다시 고개를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묻었다.

야홍릉은 그의 입맞춤에 짜증이 났지만 점점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능묵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둘은 또 침전에서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일을 마친 능묵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야홍릉을 안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사이 정란과 첨향은 침대보를 바꾸었다.

둘이 목욕을 마치자 날이 저물었다.

야홍릉과 능묵은 함께 저녁 식사를 했고, 하루 사이에 공주부의 사람들은 야홍릉이 아리따운 남첩을 들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남첩은 말도 안 되게 잘생겨서 공주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소문이 퍼진 것은 야홍릉과 능묵이 그 소문을 굳이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밤이 깊었다.

다들 쉬는 시간이었지만 능묵은 배를 불린 늑대처럼 실눈을 뜨고 말을 걸었다.

“오늘 밤 날씨도 좋은데 정원으로 가서 산책 좀 할까요?”

야홍릉은 바보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능묵은 웃으면서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주인님.”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나서 옷을 입었다.

능묵은 그녀의 어깨에 모피 피견(披肩, 숄)을 둘러주며 말했다.

“밤바람이 차니 조심하세요.”

야홍릉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둘은 함께 홍릉원 정원 뒤편으로 걸어갔다.

정원의 오솔길은 구불구불했고 상큼한 꽃향기가 가득 풍겼다.

시녀 몇 명이 등롱을 들고 둘의 앞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오솔길을 끝까지 가니 담장이 나왔다. 담장 뒤쪽은 서쪽 국화원이었다.

야홍릉은 말없이 산책하며 달빛 속의 낭만을 즐겼다.

밤공기는 조용하고 쌀쌀했다. 공주부의 정원 뒤편 정자에 두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은은한 등불로 비춰보니 한 쌍의 남녀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다.

맞은편 남자의 시선은 너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렬했다.

만약 세상 물정을 모르는 소녀라면 이런 시선에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정려는 눈을 내리깐 채, 수줍은 얼굴로 물었다.

“공자, 왜 저를 이런 시선으로 보시나요?”

매현근은 미소를 지으며 정인을 대하듯 다정하게 말했다.

“정 낭자는 자신이 예쁘다는 걸 아시오?”

정려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투덜거렸다.

‘촌스럽게 이런 방식으로 여인을 꼬시겠다고? 좀 참신한 방법이 없나? 잠자는 시간까지 내서 상대해주고 있는데 성의를 좀 보여주면 안 되나?’

“정…….”

“거기 뭐 하는 짓이냐?”

갑작스러운 호통에 매현근은 하던 말을 멈추었다.

둘은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려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밖으로 뛰어갔다.

속도가 너무 빨라 정려를 잡으려고 했던 매현근의 손은 정려의 옷자락을 스친 게 다였다. 정려는 순식간에 정자에서 사라졌다.

허둥지둥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죄를 지은 모습이었다.

메현근도 안색이 변했다.

“서라! 한 걸음만 더 움직이면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다. 너희는 지금 뭐 하는 것이냐?”

능묵이 차갑게 물었다.

정려는 온몸이 굳은 채,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는 정말 능묵이 다리를 분지를까 두려웠다.

능묵은 정자 밖의 돌계단에 서서 싸늘하게 말했다.

“이리 오너라.”

매현근은 멍하니 정자 안에 서 있었다.

그는 머리를 굴리며 대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아까까지 온몸이 굳은 채로 불안해하던 정려가 갑자기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더니 야홍릉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공주 전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가서 그만…… 매 측부가 저를 부른 것이지 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전하, 부디 절 믿어 주세요…….”

야홍릉은 떨리는 입가로 능묵을 돌아보았다.

‘정려가 잘못한 거 아니지?’

능묵은 목을 가다듬고 정자 안의 매현근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매 측부는 왜 밤에 자지 않고 공주 전하의 시녀를 몰래 불러낸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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