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건강이 악화되다
황제가 과로로 몸이 상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랏일이 아무리 과중하다고 하나 조정에서 신경 쓸 일은 별로 없었다. 다른 일들은 대신들이 알아서 하기에 황제는 그저 매일 상주서를 읽고 대신들이 다 상의한 일에 결정만 내리면 되었다.
황제의 증상은 화병 때문이었다.
항상 우울한 기분으로 수심에 잠겨 있는 데다가 매일같이 의심하니 몸이 좋을 리 없었다.
겉으로는 너그럽고 열린 척해도 속으로는 황자들, 심지어 딸인 야홍릉에게도 의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병이 든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 3황자의 일 때문에 정신적으로 자극을 받은 데다 크게 화까지 내니 무너져버렸다.
야소숙의 일을 겪은 뒤, 황자들에 대한 황제의 의심과 경계는 더욱 커졌다.
야홍릉에게 큰 권력을 내어준 것도 남성국 사신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서였다. 남성국에서 약속한 이득에 마음이 흔들린 것이다.
하지만 의심이 많은 황제는 남성국이 그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 야홍릉에 대한 경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신은 이만 가서 정신을 안정시키는 탕약을 지어 올리겠습니다. 푹 쉬시면서 몸조리를 잘하신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황제는 눈을 감고 태의들을 내보냈다.
“홍릉아, 그동안 정무가 많아 힘들었지? 나도 몸에 이상이 생겨서야 옆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느꼈단다.”
조정 대신들 중 충성심과 능력을 겸비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부황, 승상과 걱정을 나누십시오.”
승상은 황제에 충성하는 사람이자 문관의 우두머리였다. 그런 그도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을 수 없다면 야홍릉은 더 할 말이 없었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하다가 물었다.
“장양후의 사건은 어떻게 되었느냐?”
“전 따로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화제를 돌렸다.
“넷째는 요즈음 뭘 하고 지내더냐?”
“제가 이제 막 사부와 호부를 맡아 다른 관리들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넷째 오라버니에 대해 알아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제 초유가 제 저택에 왔었습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초유가? 그 아이가 왜?”
황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 부마가 되고 싶다고 했으나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야홍릉이 평온하게 말했다.
황제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부마가 되고 싶다고?’
측부로 되려다가 거절당한 초유는 내각 중신 초 각로의 적손자였다.
명망 높은 명문가의 자제인 그는 공주를 아내로 맞이할 자격이 충분했다.
전에도 그가 자발적으로 공주의 측부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나 거만한 태도 때문에 결국 ‘퇴짜’를 맞았으나, 다들 그럴 만했다고 말했다. 명문가의 적자가 굽신거리는 게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공주부의 부마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다른 공주의 부마로 되려고 한다면 몰라도 호국 공주인 야홍릉을 넘보는 초유의 행위에 황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초유가 누구를 지지하는지, 왜 이렇게 한 것인지 그는 낱낱이 알아볼 생각이었다.
‘다른 공주라면…….’
황제는 초유와 야정연의 의도에 대한 생각을 미뤄두기로 했다.
“셋째 때문에 연루된 일이 많더구나. 황후를 폐위시키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나 자릉이는 내 딸이지. 홍릉아, 자릉이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야자릉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야홍릉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황제의 말 때문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야자릉이 떠올랐다.
그녀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전 부황의 결정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야자릉의 생사는 그녀와 상관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야자릉이 불행하면 되었다.
황후인 어머니를 잃고 3황자인 오라버니와 든든한 외가인 한씨 가문을 잃은 야자릉은 공주라는 명분을 유지해도 예전처럼 적공주의 유세를 부릴 수 없었다.
야자릉은 앞으로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을 조금씩 느낄 것이다.
야홍릉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녀는 충분히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되어 있었다.
황제도 더 이상 야홍릉에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야홍릉이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는 차갑고 무뚝뚝했으나 형제들과 애틋한 감정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형제들을 완전히 남처럼 대하고 있었다.
방금 황제가 야정연에 대해 물어본 것도 핑계를 찾아 야정연의 직무를 회복시키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야홍릉은 초유가 어젯밤에 찾아왔다는 얘기를 꺼내 황제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야홍릉은 야자릉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시리도록 차가운 태도를 보였다.
황제는 마음이 지쳤다.
그의 자식들은 여느 집안 자제들처럼 친남매를 아끼는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이게 바로 황족으로 태어난 자의 비애인가?’
침궁 안은 정적에 잠겼다.
야홍릉의 평온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퍼졌다.
“부황, 옥체 보존하십시오. 부황께서 쉬시도록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잠깐.”
황제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몸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보러 온 거냐?”
‘그렇다고 하면 너무 빠른데? 후궁의 비빈들보다도 빨라.’
“아닙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젓고 평온하게 대답했다.
“부황께 드릴 말씀이 있어 궁에 들어오다가 마침 둘째 오라버니와 마주쳤습니다. 오늘 조례가 일찍 끝난 게 이상해서 물어보고 부황께서 편찮으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뵈러 온 것입니다.”
‘할 말이 있었다고?’
황제는 심장이 철렁했으나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
야홍릉이 가져온 소식들은 모두 작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냐?”
“제가 요즘 사부의 일을 보고 있는데 우연히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올해 추위의 합격자 명단에 한 명이 빠져 있더군요.”
‘추위의 합격자 명단에 한 명이 빠졌다고?’
황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누구냐?”
“심한의입니다.”
‘심한의가 누구지?’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한경백이 어산서원에서 가르치는 학생 중에 허무준이라는 학생이 있는데 심한의와 친구랍니다. 그의 말로는 심한의는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어서 세 차례의 시험을 모두 급제할 수 있는 실력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가장 쉬운 시험인 추위에서도 낙방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산서원의 학생이라면 제경의 사람이겠는데 심한의가 허무준의 친구이면 그도 제경의 사람인가? 제경 쪽의 추위를 관리하는 사람이 누구더라?’
황제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사부에서 뽑은 관리인 것 같았어. 사부는 얼마 전까지 위종해 소관이었지…….’
위종해는 3황자의 일당이었다.
3황자를 떠올린 황제는 마음이 욱신거렸다.
“글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은 헛소문일 수도 있지 않느냐?”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마음이 불편하더군요. 만약 그가 정말 뛰어난 사람이라면 조정에서 젊은 인재 한 명을 놓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야홍릉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네 뜻은…….”
“그래서 제가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는데 추위의 성적을 조작한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작은 일이 아니었군.’
“추위의 성적을 조작해?”
황제의 피곤한 얼굴에 짙은 분노가 피어올랐다.
그는 이를 악물고 냉소를 터뜨렸다.
“조정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시험까지 조작하다니. 잘하는 짓이구나.”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거 시험 성적을 조작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저 그 정도가 다를 뿐이었다.
황자들 사이의 권력 다툼은 무공을 겨루는 것처럼 혼자만의 힘으로 결정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만의 세력을 키워야 했다.
과거 시험은 서생들이 벼슬길에 오를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통로였다.
그들이 조정에 들어오면 미래의 신생 세력이 되는 것이다.
조정의 젊은 신하들은 맡은 직무가 작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각 세력에서 눈에 잘 띄지 않으나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깃털’들이었다.
하지만 야홍릉은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다.
“지금 네가 사부의 일을 맡고 있으니 앞으로 이 일은 네가 전적으로 알아서 하거라. 난 관여하지 않겠다.”
황제가 말했다.
야소숙이 이미 죽었는데 그의 예전 심복의 죄를 밝혀낸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저 조정의 해충을 제거하는 일일 뿐이었다.
‘홍릉이도 이미 죽은 사람을 일부러 겨냥한 게 아닐 거야.’
야홍릉은 무릎을 살짝 굽히고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부황, 푹 쉬십시오.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손평을 바라보며 말했다.
“총관 대인, 부황을 잘 모시게. 부황이 과로하지 않게 신경도 좀 써주게.”
손평이 대답했다.
“공주 전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꼭 폐하를 잘 모시겠습니다.”
이때, 밖에서 어지러운 발소리가 들렸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후궁 마마들이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 오셨나 보네요.”
그러자 황제가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손평, 지금 피곤하니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이르거라.”
손평은 공손하게 대답하고는 야홍릉에게 손짓을 했다.
“공주 전하, 나가시지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걸어갔다.
외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능묵도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림자 같은 그의 모습에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돌아서서 야홍릉을 따라가는 순간, 황제는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마침 능묵의 날카로운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대전 밖으로 걸어간 야홍릉은 여러 명의 후궁 비빈들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사현비, 초숙비를 선두로 여러 명의 비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우울한 표정으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야홍릉을 보자마자 시끄럽게 물어보았다.
황제의 옥체는 어떤지,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은지, 돌볼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은지, 황제의 시중을 드는 궁녀는 야무진지……
이때, 손평이 계단 위에서 나타났다. 그는 시위더러 대전 문을 닫으라고 한 뒤, 황제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사현비, 초숙비, 매비, 양비는 모두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폐하를 뵈러 온 우리를 들여보내지 않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