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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27)화 (228/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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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화 명분을 주실 겁니까

야홍릉은 초유처럼 도도한 귀공자가 정말 그녀의 저택에서 밤새 무릎을 꿇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시녀의 보고를 들은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가식입니다.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군.”

능묵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주인님, 절대 녀석의 고육계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야홍릉은 그를 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내가 이제 막 사랑에 눈을 뜬 소녀도 아니고 이런 것에 넘어갈 리 있겠느냐?”

능묵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얌전히 야홍릉이 씻는 것을 거들었다.

“능묵.”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이것들은 모두 시녀가 하는 일이다.”

“앞으로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능묵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야홍릉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야홍릉은 일하러 사부로 향했다.

그녀의 옆에는 측근 시위이자 남첩인 능묵이 따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숨길 생각도 없이 당당하게 야홍릉의 뒤를 따랐다.

공주부를 떠나기 전, 야홍릉은 시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초유에게 말하거라. 나에게 성의를 입증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그럼에도 고집을 부린다면 어제 약속대로 명분을 주겠다고 하여라. 하지만 명분이 생긴 이상, 그는 공주부의 규정에 따라 자유를 잃을 것이니 잘 생각해보라고 하여라.”

시녀는 고개를 숙이고 떠났다.

공주부의 대문을 나서서 마차에 오른 뒤, 능묵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님, 정말 그에게 명분을 주실 것입니까?”

“명분을 준다고 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초유는 똑똑하니 폐단을 잘 따져볼 것이다.”

야홍릉은 다른 사람과 달랐다.

그녀는 명분과 명성에 신경 쓰지 않았고 딱히 못 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 황제가 보낸 측부들을 모두 황족 족보에 올린 것이다. 다른 마음을 품고 공주부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아예 돌아갈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먼저 그들을 풀어주지 않는 이상 그들은 평생 그녀의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능묵 외에 단씨 형제는 능묵의 수하였으니 그녀를 돕기 위해 공주부에 들어오긴 했지만, 자유를 주고 말고는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그러나 초유는 야정연의 사람이니 감진이나 단씨 형제와는 다른 경우였다.

초유는 초 각로의 유일한 적손자라 아내를 맞이해 가문의 후대를 잇는 것이 그의 책임이었다.

아무리 야정연을 돕고 싶은 마음이 커도 자신의 평생과 초씨 가문의 핏줄로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초 공자가 자신의 열정으로 공주 전하의 마음을 녹여 그와 부부의 연을 맺어, 그를 봐서 야정연을 지지해 황위에 앉힐 거라는 말도 안 되는 환상을 품고 있을까 걱정입니다.”

마차 안은 정적에 잠겼다.

야홍릉은 능묵이 주절주절 떠드는 것을 듣다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꾼을 해도 되겠구나.”

능묵은 싱긋 웃으며 그녀를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제가 말을 잘하던가요?”

“아주 좋아. 굶지는 않겠구나.”

야홍릉이 말했다.

능묵은 다가가서 야홍릉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주인님, 전보다 많이 따뜻해지셨습니다.”

“너는 전보다 많이 수다스러워졌구나. 예전에는 하루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더니. 항상 내가 물어서야 입을 열었지.”

능묵은 침묵을 지키다 대답했다.

“지금은 신분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어영위일 때에는 말없이 과묵해야 하지만 남첩이 된 지금은 주인님의 환심을 사려고 애써야 할 것 아닙니까? 조용히 있다가 눈 밖에 나면 어떡합니까?”

야홍릉은 그의 얼굴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네가 말없이 조용히 군다고 해도 절대 내 눈 밖에 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능묵은 그녀의 손을 잡고 입가로 가져가 입을 맞추었다.

“지금 사부와 호부를 동시에 맡고 계신데 황제가 경계할까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야홍릉은 탑에 기대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경계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 나는 곧 남성국에 갈 운명이 아니냐? 부황은 통혼으로 남성국과 목국이 동맹을 맺어 앞으로 목국이 평화로울 것만 생각하고 있다.”

만약 봉서오가 떠나기 전에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황제는 절대 호부와 사부의 대권을 야홍릉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야홍릉을 겉으로는 너그럽게 대하고 중용했지만 사실 속으로 아주 경계하고 있었다.

야홍릉은 능묵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권력을 차지하게 된 것은 네 덕도 있다.”

“주인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능묵은 야홍릉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전 주인님을 위해 불바다도 뛰어들 수 있고 머리에 피가 나게 조아릴 수 있습니다.”

마차는 궁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능묵도 행동을 멈추고 문발을 젖혀 밖을 내다보았다.

“조례가 벌써 끝난 것입니까?”

야홍릉은 마차에서 내리며 대답했다.

“요즈음 일도 많고 곧 연말이라 조례를 점심까지 한단다.”

“홍릉아.”

야홍릉이 고개를 들자 야모침이 궁에서 나오고 있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조례가 끝났나요?”

“응, 부황이 몸이 좋지 않아 일찍 끝났단다. 궁에 들어가려고?”

야모침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조례가 끝났다고 하니 부황을 뵈러 가야겠네요. 마침 의논드릴 일이 있었는데.”

야모침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지금 대권을 쥐고 있으니 아주 위풍당당하구나.”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불만인가요?”

“내가 어찌 불만을 품겠느냐? 네가 대단한 수단으로 순식간에 형제들 중 최고 승자가 되다니. 하지만 여인이라서 다행이야. 안 그러면 정말 걱정이 될 것 같거든.”

“뭐가 걱정인데요? 제가 황위를 빼앗을까 걱정이에요?”

야홍릉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야모침은 표정이 확 변하며 고개를 돌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지러운 발소리가 전해졌다.

조례가 끝나서 대신들이 궁 밖으로 나오고 있는 소리였다. 그들은 뒤에 있어서 야홍릉의 말을 듣지 못했다.

궁 문을 나선 그들은 호국 공주가 밖에 있는 것을 보고 예를 올렸다. 그리고 바로 각자의 마차에 올라탔다.

야모침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의 시선은 야홍릉 뒤에 서 있는 청년에게 멈췄다. 그는 실눈을 뜨고 물었다.

“넌 누구냐?”

방금 스쳐볼 때는 야홍릉의 옆에 일반 시위가 따르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아주 잘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검은색 장포를 입어 훨씬 훤칠해 보이는 몸을 가진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온몸으로 신비롭고 날카로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능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옆을 지나는 관리들은 모두 그를 스쳐보았다.

냉기가 흐르는 그의 얼굴에 사람들은 속으로 그를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호국 공주 주변의 사람인데 만만할 리 있겠어?’

대신들은 이렇게 생각하며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잘생긴 청년의 신분을 생각해보았다.

‘호국 공주가 새로 들인 남첩일까? 아니면 그냥 측근 시위일까?’

“내가 묻고 있지 않느냐?”

야모침은 미간을 찌푸리고 능묵의 얼굴을 바라보다 야홍릉에게 말했다.

“네 호위무사는 기세가 아주 대단하구나.”

“과찬이세요.”

야홍릉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고 궁 문으로 걸어갔다.

“능묵, 가자.”

능묵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한 뒤, 그림자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 궁 문에 들어섰다.

“야홍릉!”

야모침은 미간을 더욱 심하게 찌푸린 얼굴로 돌아서서 고함을 질렀다.

그는 다른 대신들이 모두 흩어진 다음 말을 하려고 했으나 야홍릉이 기다려 주지 않고 먼저 떠난 것이다. 그녀는 야모침의 외침을 듣고도 못 들은 척했다.

야모침은 둘의 뒷모습을 보면서 오래도록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하.”

야모침을 지지하는 관리가 야홍릉이 떠나는 것을 보고 마차에서 내려와 다시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야모침과 함께 걸어가는 야홍릉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국 공주 옆의 저 젊은 남자는 누구입니까? 아주 특별해 보이는데요.”

야모침은 말없이 있다가 어두운 눈빛으로 말했다.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야홍릉과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았다.

“폐하의 옥체가 좋지 않으신데 7공주가 대권까지 가지고 있으니…… 전하께서 신경을 쓰셔야겠습니다.”

야모침은 표정이 변했다.

그는 야홍릉이 사라진 곳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마차로 걸어갔다.

선왕부의 시위가 걸어오더니 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초 각로의 손자가 어젯밤 공주부로 들어가서 밤새 나오지 않았답니다.”

야모침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초유? 그놈이 공주부에는 왜 갔지? 야정연을 위해 야홍릉에게 몸이라도 바치겠다는 건가?’

“참 충성스럽군.”

야모침은 마차에 오르며 말했다.

“왕부로 돌아간다.”

* * *

황제의 건강이 나빠지자 태의원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야홍릉이 능묵과 함께 건양궁에 들어갔을 때, 황제의 침궁에는 이미 오래된 태의 열 명이 둘러서 있었다. 그들은 황제에게 증상을 물어보다가 또 황제의 시중을 드는 내관과 궁녀들에게 황제의 식사와 수면이 정상적인지, 염려하는 일은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폐하께서는 밤낮으로 나랏일을 걱정하시면서 감정의 기복이 심해져 원기가 상하신 듯하니, 며칠 푹 쉬시면 됩니다.”

침궁에 들어서자마자 이 말을 들은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태의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른 증상은 없느냐?”

태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돌아서서 예를 올렸다.

“7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거라. 부황의 옥체가 그리 좋지 않은 것이냐?”

야홍릉이 물었다.

“공주 전하께 아룁니다. 폐하께서는 밤낮으로 나랏일로 고민하시다 과로하시고 밤잠도 잘못 주무셨으며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셔서 원기가 상하셨습니다. 그리고 요즘 기분이 많이 저하되어 가슴이 답답하고 정신이 맑지 않은 증상도 보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위경련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야홍릉은 잠자코 듣고 있다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 황제의 창백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부황, 지금은 좀 괜찮으세요?”

“……괜찮다.”

황제는 힘겹게 일어나 머리맡에 기댔다.

“아까 좀 어지럽고 위가 아파 대신들을 보낸 것이다.”

태의원의 수령이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요즘 너무 힘드셨습니다. 며칠 푹 쉬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나랏일이 과중하나 두 황자와 대신들이 있으니 폐하께서는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다른 태의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께서 무사하셔야 백성들이 편히 살 수 있습니다. 폐하, 부디 옥체 보존하십시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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