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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26)화 (22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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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화 먼저 겁을 주고 달래기

한 상서는 오래도록 침묵을 지켰다.

찻잔의 차가 다 식은 다음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공주 전하께서는 지금 병권과 큰 권력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향후 태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야홍릉이 대답했다.

“별생각 없네.”

한 상서는 또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그럼 지지하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없네.”

그 말을 들은 한 상서는 또 침묵에 잠겼다.

야홍릉은 그의 생각에 관심이 없는지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났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가 보겠네.”

한 상서도 따라서 일어나며 그녀를 직접 대문까지 배웅했다.

그들은 서재를 나서면서 민감한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한 상서는 야홍릉이 마차를 타고 상서부를 떠나는 것을 보고 그제야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주인님의 수는 아주 절묘합니다.”

능묵은 야홍릉의 앞에 앉아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부를 떨기 시작했다.

“저는 아주 감탄했습니다.”

야홍릉은 탑에 기대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상서는 똑똑한 사람입니다. 주인님이 그에게 증거를 다 주면서 같은 편으로 들이려는 것 같으나 그는 주인님에게 또 다른 증거가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능묵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예리한 말을 했다.

“그는 걱정이 되면서도 주인님에게 고마워할 것입니다. 한 상서는 지금 기분이 말이 아닐 것이지요.”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힐끗 보며 말했다.

“한 상서는 조정에서 깨끗한 편이야. 문관의 풍격을 지키고 있지. 난 그를 괴롭힐 생각이 없다.”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거절할 수 없는 방법으로 영입해야만 합니다.”

한 상서 같은 사람에게는 먼저 겁을 주고 달래는 방식이 가장 잘 먹혔다.

확실한 증거를 본 한 상서는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직접 이런 일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고 관리자인 그가 감독을 잘하지 못한 잘못도 있었다. 황제가 알게 된다면 그에게도 벌을 내릴 것이다.

야홍릉이 그에게 증거를 준 것은 그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였다.

또 그에게 자신이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은근슬쩍 보여줄 수 있었다.

야홍릉이 어떤 조건을 얘기할까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 야홍릉은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고 했다.

이렇게 되면 한 상서는 더욱 야홍릉의 속마음을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방금, 한 상서는 야홍릉이 과한 요구를 얘기하면 힘껏 반항할 생각이었다. 능묵은 그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야홍릉이 아무 조건도 얘기하지 않자 단단히 마음먹었던 한 상서는 기운이 빠지면서 더더욱 당황했다.

“오늘 입은 은혜와 보이지 않는 협박 때문에 한 상서는 앞으로 서서히 주인님 쪽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능묵은 한씨 가문의 움직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때가 되면 그들은 여제를 받아들일 수 없어도 이미 정해진 일이니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묵은 똑똑한 데다 눈치가 빨라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야홍릉에 대해 잘 알기에 그녀가 하는 행동의 목적과 의도를 빤히 알고 있었다. 사실 진정으로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과 비교하면 야홍릉의 수는 직설적이라 은밀하거나 어렵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들 그쪽으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야홍릉이 어려워 보이는 것이다.

현재까지 야홍릉의 속마음을 완벽하게 꿰뚫고 입 밖에 낼 수 있는 사람은 능묵 밖에 없었다.

그들이 공주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시였다.

능묵은 시녀들을 내보낸 뒤, 야홍릉의 옷을 벗겨 주었다.

이때, 서늘한 숨결이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주인님, 오늘 밤, 제가 잠자리 시중을 들어도 될까요?”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넌 침대만 덥히면 된다.”

능묵은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침대를 덥힌다는 말은 사실 함께 잔다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잠자리를 따뜻하게 하라는 말이다. 네가 겨울에 침대를 덥히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직 겨울이 되지 않았으나 미리 배워두거라.”

야홍릉이 평온하게 말했다.

능묵은 입을 삐죽거렸다.

“전 전하의 잠자리 시중을 들고 싶습니다.”

야홍릉은 그를 흘겨보았다.

“감히 내 말을 거역하는 것이냐?”

능묵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그윽하고 진지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야홍릉을 바라보기만 했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을 고수했다.

능묵은 싱긋 웃더니 양을 덮치는 늑대처럼 야홍릉을 침대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눈이 마주치자 야홍릉은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생각할 겨를이나 있겠는가?

남녀유별이고 뭐고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야홍릉은 딱히 그의 행동을 거부하지 않았다.

한 달 넘게 떨어져 있는 동안, 그리운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야홍릉도 그가 아주 그리웠다.

그녀의 묵인하에 능묵은 더욱 난폭하게 사랑을 드러냈다.

그는 야홍릉을 한입에 잡아먹을 것처럼 그동안 억눌러 왔던 감정을 마구 퍼부었다.

야홍릉은 이런 행동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잘 몰라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입술이 뭉개져 뻣뻣했지만 그녀는 반항하지 않았다.

능묵은 늑대처럼 야홍릉에게 달려들어 점점 거칠게 행동했다.

처음에는 그녀의 어깨만 잡고 있다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두 손은 동시에 그녀의 옷으로 향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그의 뒷덜미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채를 잡고 힘을 주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고통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멍한 표정으로 일어난 그는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깔린 여인을 바라보았다.

또 눈이 마주쳤다.

야홍릉은 눈빛은 또렷했고 욕정에 흐릿해졌던 능묵의 눈도 점차 맑아졌다.

야홍릉의 퉁퉁 부은 입술에 시선이 닿은 능묵은 말없이 있다가 야홍릉을 올려다보았다.

미안한 눈치였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야홍릉의 입술을 살살 문지른 다음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는 이렇게 말없이 한참 있었다.

“제가 주인님의 부마가 되는 건 어떻겠습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목소리에는 간절한 기대가 담겨 있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남첩이 아니고?”

“남첩이 되어도 잠자리를 가질 수 있다면 전 당연히 불만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이 허락을 안 하시니…….”

능묵은 원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안된다고 한 적은 없다.”

그는 건강한 사내이고 야홍릉을 좋아하기도 하니 그쪽의 욕구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열일곱 살이었다.

일반적으로 가문에서는 여인이 열대여섯 살이 되면 혼인을 한다. 혼인하면 부부 관계도 맺을 것이고 열예닐곱 살에 아이를 낳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이로는 문제가 될 게 없었다.

그렇다고 명분을 신경 쓰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측부도 들인 야홍릉인데 명예나 정조에 신경 쓸 리 있겠는가?

‘그런데 내가 왜 잠자리를 피하는 거지?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정말 잠자리 시중을 들고 싶으냐?”

능묵은 희망이 보이자 대뜸 기운을 차리고 그녀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야홍릉은 입가를 실룩이며 말했다.

“싫다고 한 적은 없다…….”

“좋은 날을 택하고 싶으신 겁니까?”

능묵은 눈을 휘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매혹적인 눈빛으로 말했다.

“잠자리에 드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요. 그래서 좋은 날을 택해…… 아니, 먼저 원앙욕을 함께 하지요. 물 위에 꽃잎을 띄워서 깨끗하게 씻은 다음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야홍릉은 그가 환상에 흠뻑 빠진 표정을 짓자 그의 뒤통수를 톡톡 쳤다.

“좋은 날은 택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거지.”

‘뭐라고?’

능묵은 당황했다. 그는 눈을 깜박거리며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주인님의 뜻은…….”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묵은 심호흡을 한 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그녀의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주인님, 시간이 늦었으니 일찍 주무십시오.”

그 말을 들은 야홍릉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참을 수 있겠느냐?”

그녀는 그의 몸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능묵은 둘의 첫날밤이 좀 더 아름답고 달콤하기를 바랐다.

분위기 좋고 기분 좋은 날, 좋은 체력으로 밤새 정을 나누고 싶었다.

그렇게 그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강렬한 기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런 것은 사내라면 천성적으로 할 줄 알겠지만…… 그래도 책을 보고 미리 공부라도 해둘까? 서툴러서 안 좋은 추억을 남기면 안 되니까 말이야. 책에 자세도 많다고 하던데…….’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는 야홍릉은 그가 참을 수 있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거라.”

야홍릉을 어떻게 잡아먹을지 생각하고 있던 능묵은 그녀의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야홍릉의 옷을 벗겨서 옷걸이에 걸고는 자신의 옷도 함께 걸어 두었다.

고개를 돌리고 보니 야홍릉은 이미 이불을 덮고 누운 상태였다.

능묵은 익숙하게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님…….”

그는 야홍릉을 품에 안은 뒤, 목덜미에 코를 묻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주인님, 피부가 너무 좋으십니다.”

야홍릉은 그가 물고 빨자 목이 간질거려 그의 머리를 떠밀며 말했다.

“얌전히 있거라.”

이날은 둘이 떨어져 있다가 처음 함께 자는 날이었다.

능묵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야홍릉이 좋은 날은 택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거라고 하는 것을 들었는데 어찌 설레지 않겠는가?

아직 부부의 정을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둘의 사이가 전보다 더 가까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당연히 이 기회를 잡을 것이다.

‘얌전히 있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둘이 정식으로 더 깊은 사이에 들어가기 전에 그는 먼저 맛보기를 할 생각이었다.

이날 밤은 능묵의 달콤한 맛보기 속에서 평안히 지나갔다.

* * *

한편, 공주부의 감옥에 있는 한옥금은 몸과 마음의 이중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한옥금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숨을 헐떡이며 꿈에서 본 장면을 떠올렸다.

온몸이 잘리는 고통에 그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악몽 속에서 깨어났음에도 그는 꿈에서 느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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