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알 수 없는 생각
‘하룻밤을 잤다고?’
한묵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일을 공주 전하는 아시나?”
“아실 것입니다.”
한기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대충 짐작할 수는 있었다.
“3공자는 공주 전하의 측부이니 공주부의 규정에 따라야 하지요. 측부가 밤새 돌아오지 않았으니 하인은 분명 공주 전하께 보고드렸을 것입니다.”
“한경백은 더 뭐라고 하지는 않더냐?”
한기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묻지 않았고 그도 더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한경백은 공주부의 사람이자 측부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어 한기는 쉽게 말을 꺼낼 수 없는 것도 많았다.
“형님, 공주 전하께서 오늘 왜 우리 집으로 온 것입니까?”
한기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한묵이 대답했다.
“내 병문안을 오신 것이다.”
“그게 다입니까?”
“그건 모르겠다.”
한기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공주 전하는 지금 홀로 사부와 호부를 관리하시고 또 병권까지 가지고 계십니다. 정왕이나 선왕보다 권력이 더 크신 거지요. 이런 상황이면 조정 대신들과 거리를 두면서 몸을 사리는 게 정상 아닌가요?”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묵을 바라보았다.
“공주 전하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다.”
한묵이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한기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방 안에 있는 시녀들과 하인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의자를 끌어당겨 한묵의 옆에 앉았다.
“그럼 우리 한(韓)씨 가문의 입장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한묵은 어두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권을 가진 관리들은 황위 다툼에서 입장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중립을 유지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왕이 병부 대권을 움켜쥐고 있을 때, 사람들은 한씨 가문이 정왕쪽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씨 가문 사람들은 입장을 밝힌 적이 없었지만 부인할 수 없었다.
그들이 부인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한씨 가문이 이황자나 대황자쪽 사람이라고 생각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황위 싸움과 연관이 아예 없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관리들은 항상 말을 조심해야 했다.
한씨 가문 역시 선택해야 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호국 공주는 누구를 지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한씨 가문은 호국 공주가 하는 대로 따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편이 안전하니까요.”
한기가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야홍릉이 현재 가지고 있는 권력과 영향력을 보면 그녀가 지지하는 황자가 최후의 승자가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대립각에 선다면 승산이 없었다.
한묵은 한참 말없이 있다가 물었다.
“넌 호국 공주가 누구를 지지하는 것 같으냐?”
한기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입을 열었다.
“3황자는 불가능하고.”
이미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조정에서는 3황자와 한씨 가문을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괜히 황제의 분노와 의심을 불러일으킬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2황자일 가능성도 크지 않습니다. 선왕은 황위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호국 공주가 2황자를 지지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호국 공주는 목국의 강산에 진심이기에 현명한 황제를 지지할 것 같았다.
선왕은 황제감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면 4황자와 대황자가 남는데…….”
한기는 한묵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형님은 둘 중 누구의 승산이 클 것 같습니까?”
한묵이 대답했다.
“누구의 승산도 크지 않아.”
‘뭐라고?’
한기는 당황했다.
“그럴 리가요?”
‘불가능한 건 아니지.’
한묵은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
“폐하께서는 대황자를 태자로 세우려고 하신다.”
한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가 야천란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란 것이 아니었다.
다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다. 야천란은 황자들 중에서 존재감이 강하지 않았지만 능력이 뛰어나고 겸손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한묵은 한령의 자리를 이어받아 금위군 통령이 된 뒤로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 아무리 조심스럽게 행동해도 한묵은 조정 정무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의 옆은 아주 위험한 자리였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해야 3황자나 한씨 가문 같은 결말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겉으로 내색하지 않아도 한묵은 황제의 속마음을 짐작해 보아야 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필요한 것을 알아내야 했다.
한기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폐하께서 대황자를 태자로 책봉하려고 하신다는데 형님은 왜 그와 4황자는 모두 승산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한묵이 대답했다.
“호국 공주가 중요한 요소이다.”
그는 한묵의 정확한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대황자, 2황자와 4황자밖에 없었다. 6황자는 출신이 좋지 않은 데다가 3황자의 일에 연루되어 지금은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었다.
9황자는 아직 어려서 형제들과 경쟁할 실력이 없었다.
‘폐하께서 염두에 두신 대황자도 승산이 크지 않다면 태자는 결국 누가 될까?’
* * *
한씨 가문 서재의 분위기는 경직되어 있었다.
한 상서는 공문서와 명부책을 펼쳐 보다가 표정이 굳고 말았다.
“왜 이것을 폐하께 드리지 않으신 겁니까?”
그가 물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한 상서가 그리 생각한다면 내일 아침 조례에 부황께 드리겠네.”
한 상서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병부 대권을 가지고 있고 많은 일들을 관리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 그의 위에는 정왕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일에서는 그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정왕의 사람들이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해도 그는 눈감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야홍릉이 병부의 관리들이 관직을 사고팔고, 뇌물을 받고, 심지어 심복을 군영에 꽂은 사실도 알아낸 것이다.
한묵이 지금 관리하는 금위군에도 관직을 사거나 낙하산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사실 이런 일은 아주 흔한 것이었다.
아무리 현명한 황제라도 부패한 관리를 모조리 잡아낼 수는 없었다.
조정에서 각 관리들 사이는 이익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믿을 만한 배경이 없다면 그들이 어떻게 이토록 간이 크게 놀 수 있겠는가?
그래서 대부분 사람은 이런 것을 알면서도 굳이 까발리지 않았다.
황족과 귀족들에게 미움을 사는 것은 물론, 자신까지 연루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독 야홍릉은 달랐다.
그녀는 이 증거들을 한 상서에게 보여주며 충분히 더 많은 증거를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공주 전하, 잘 생각해보고 결정하십시오. 이 증거들을 폐하께 바친다면 가장 먼저 재앙을 당하는 사람은 정왕일 것입니다.”
야홍릉이 말했다.
“정왕도 그렇지만 한 상서도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이네.”
죽지 않는다고 해도 녹봉이 깎이거나 관직이 강등될 수 있었다.
특히 지금은 특수 시기였다.
대신들은 모두 조용히 숨죽여 지냈다. 기분이 안 좋은 황제가 이 증거들을 보고 얼마나 화를 낼지 한 상서는 예상이 가능했다.
지금 상황에서 작은 잘못도 얼마든지 엄히 다스릴 수 있었다.
게다가 관직을 사고팔고 뇌물을 받은 일은 작은 잘못이 아니었다.
한 상서는 의자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공주 전하의 조건은 무엇입니까?”
야홍릉의 성격으로는 이런 일을 보고 귀찮아서 모르는 척하거나 아예 황제에게 바치는 것이 정상이었다.
이 증거들을 가지고 그를 찾아온 것이 이상했다.
한 상서는 야홍릉이 아무 이유 없이 이러는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녀가 말한 조건이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아니, 난 조건이 없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조건이 없다고?’
한 상서는 당황했다.
“조건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한 상서는 병부를 맡고 있고 난 병권을 가지고 있어 모두 군사들과 연관된 일을 하고 있지. 무장은 원래 문관들처럼 음모를 꾸미는 것보다 직설적인 것을 좋아한다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옆에 조용히 서서 눈을 내리깔고 있던 능묵은 속으로 외쳤다.
‘애비, 대단하십니다.’
무장은 직설적인 것을 좋아했다.
다른 사람을 겨냥하더라도 대놓고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당하는 사람들은 당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찌하지 못했다.
한 상서도 같은 상황이었다.
상서의 자리까지 오르려면 적어도 벼슬길에서 몇 년, 수십 년은 몸 담그고 있어야 한다.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약기 그지없었다.
그런 한 상서가 어찌 야홍릉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음모를 꾸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야홍릉의 말을 한 상서는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완전히 거짓말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야홍릉은 음모를 꾸미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조정 대신들은 모두 그녀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야홍릉은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관심을 한옥금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녀가 야소숙을 돕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남들이 다 알게 한 것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황제는 그녀와 한옥금의 혼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야홍릉은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그녀가 한옥금과 사이가 틀어진 순간부터 야홍릉에게는 많은 비밀이 생겼다.
그녀가 왜 한옥금과 사이가 나빠졌는지…… 아니, 한옥금이 왜 갑자기 그녀를 죽이려고 했는지 지금까지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몇 달 전까지 사람들은 이것이 야홍릉과 한옥금이 짜고 치는 연기라고 의심했으나 한씨 가문이 멸문된 것을 보고 다들 그 생각을 접고 말았다.
야홍릉과 한옥금은 정말 사이가 틀어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씨 가문이 멸문되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중요한 사실이 또 있었다.
야홍릉은 3황자가 적국과 내통한 증거를 황제에게 바쳤다. 야홍릉이 목국의 강산을 위해 정의를 바로잡으려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사심을 채우기 위한 것인지 한 상서는 알지 못했다.
병부 상서인 그는 병부 대권을 가지고 있었고 군사의 일을 관리하고 있어 야홍릉과 자주 왕래할 수밖에 없었다.
둘의 대화는 공적인 일에만 그칠 뿐이지, 사적으로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한 상서도 다른 대신들과 마찬가지로 야홍릉을 존경의 대상으로 보고는 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은 쉽게 변하는 법이다.
지금 호국 공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꾸미는지 한 상서는 이제 더 이상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