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피를 보지 않겠다
야홍릉은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능묵의 말뜻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네 말은…….”
“네. 맞습니다.”
능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 사람이 강산보다 중요하다고?’
그러다 문득 전생을 보여주던 꿈이 떠올라 그녀는 수긍하고 말았다.
일부 사람들에게는 좋아하는 사람이 나라보다 훨씬 중요할 수 있었다.
저택 문을 나선 야홍릉은 횃불을 든 시위의 시선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능묵도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고 집사를 포함한 열 몇 쌍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마차에서는 얘기를 나누기 더욱 편했다.
능묵은 야홍릉의 옆에 앉아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순간 그는 야홍릉을 품에 와락 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능묵은 충동이 더욱 강해졌다. 한동안 보지 못했더니 그는 그동안의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오며 무언가를 막 하고 싶어졌다.
“그 생각은 접어라.”
야홍릉이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무례를 범한다면 너를 마차 밖으로 내던지겠다.”
능묵은 입꼬리를 올리며 야홍릉의 허리를 감쌌다.
“정말 그러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능묵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애교를 부렸다.
“방금 감옥에 갔었습니다.”
그는 공주의 어영위 신분으로 공주부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공주부에서 그가 모르는 곳이 없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감옥으로 가서 뭘 했느냐?”
“한옥금을 보았습니다. 그에게 한(寒)씨 가문과 야소숙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지요. 그리고 그에게 진실을 보여주었습니다.”
능묵이 대답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옥금에게 한씨 가문이 멸문되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은 그의 마지막 희망까지 짓밟아 그가 처절하게 절망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무슨 진실?’
“제가 목국에 오기 전에 묵백은 저에게 제사전에서 사용하는 물건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궁금증을 눈치챈 능묵이 말했다.
“한옥금은 주인님이 왜 갑자기 달라지셨는지 궁금할 것이 아닙니까? 이제는 그 영문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말을 마치자 마차 안은 정적에 잠겼다.
야홍릉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헌원용수는 항상 예상을 뛰어넘는 일을 저지르고는 했다.
그녀는 묵백이 준 물건이 신비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도 직접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사지에 몰린 한옥금을 지금까지 남겨둔 것은 그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에게 자신이 황위에 오르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했던 말도 그때 홧김에 한 소리였다.
지금 야홍릉은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고 없었다.
야소숙과 한씨 가문을 사지로 몬 것도 이익을 생각해서 내린 결론일 뿐이었다.
지금 그녀는 오직 황위에 오를 생각으로 장애물을 제거하기 바빴다.
승자는 황위에 오를 것이고 패자는 죄인이 될 것이다.
권력의 절정으로 가는 길에는 원래도 위험이 가득 도사리고 있었다.
아무리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도 자칫하면 굴러떨어질 수 있었고 한 번의 실수로 온몸이 부서질 수 있었다.
하물며 야소숙은 똑똑한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럴 것까지는 없는데. 한옥금은 이미 나에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한옥금에게 질투하는 게 아닙니다.”
능묵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순한 그의 목소리에는 사무치는 분노가 담겨있었다.
“전 그냥 그를 괴롭히고 싶을 따름입니다.”
‘아주 많이. 내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을 뿐이지.’
능묵은 한옥금에게 세상의 가장 혹독한 벌을 내리고 싶었다.
그에게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뭔지 톡톡히 느끼게 하고 싶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야명주에서 발하는 부드러운 빛이 청년의 아름다운 얼굴을 비추어 주었다.
새까만 눈동자는 맑고 깨끗했다.
청년은 얼굴만 본다면 더없이 순하고 착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야홍릉은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에게 괜한 시간을 낭비할 것 없다. 그럴 시간에 어떻게 내 관심을 끌 것인지나 생각해 보아라.”
능묵은 그녀의 말을 듣고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오늘 밤 제가 잠자리 시중을 들까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능묵은 히죽 웃어 보였다.
마차는 천천히 한 상서의 저택으로 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능묵이 입을 열었다.
“초 공자를 곁에 두고 싶으면 저택에 들이십시오.”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공주부에 남지 않을 것이다.”
초유는 거만한 태도로 공주부에서 ‘퇴짜’를 맞았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만함을 내려놓으려면 조건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조건이 사라진다면 그는 굳이 고집을 부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능묵은 잠자코 있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야정연 때문에 온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
야정연을 제외하고 초 각로의 적손자가 무릎을 굽힐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능묵은 말할지 말지 고민했다.
남자인 그는 야홍릉을 바라보는 초유의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온화하던 그의 눈빛은 무릎을 꿇는 순간에 살짝 달라졌다.
그 속에 감춰진 감정은 능묵에게 더없이 익숙한 것이었다.
그것은 여인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었다.
초유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능묵은 미묘한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야홍릉을 여인으로 좋아하는 일이 신기한 것일 수 있었다. 남자들은 그녀를 존경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초유는 달랐다.
능묵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한경백과 분위기가 비슷해 보이던데 정말 주인님에게 마음을 품었다는 건가?’
어쩌면 이 감정은 그도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직 싹을 틔우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마음이 더 커지기 전에 아예 싹을 자를까?’
“공주 전하.”
마차 밖에서 시위의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마차가 멈추었다.
“한(韓) 상서부에 도착했습니다.”
야홍릉이 마차에서 내리자 능묵은 하던 생각을 멈추었다.
그는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야홍릉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정말 마음을 품었다면 싹을 잘라야지.’
능묵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굴리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정려는 말없이 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야홍릉이 준비하라고 지시한 약재가 들려 있었다.
문지기가 들어서 보고하자 상서부의 집사가 황공한 얼굴로 한달음에 달려와 야홍릉을 맞이했다. 그는 야홍릉을 한묵이 거주하는 강운헌(絳雲軒)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인지라 한 상서 부부는 모두 집에 있었다. 야홍릉이 갑자기 찾아온 것을 보고 한 상서는 황공해 어쩔 줄 모르며 직접 나와서 그녀를 맞이했다.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이곳에…….”
“한 대인, 그렇게 격식을 차리지 말게나. 난 한 통령을 보러 왔네. 불쑥 찾아온 점은 양해 부탁하네.”
“공주 전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전하께서 이렇게 오신 것은 저와 제 아들놈의 영광이지요. 안으로 드시지요.”
한 상서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 있던 한묵은 바깥의 기척을 듣고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두 발이 바닥에 닿으려고 하는 순간, 야홍릉이 들어왔다.
“한 통령, 몸은 어떤가?”
한묵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괜찮습니다. 전하께서 걱정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 상서는 시녀더러 의자를 내오게 했다.
“정왕부에서 보내온 차를 타오너라.”
시녀가 물러갔다.
야홍릉은 한묵의 창백한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한 통령,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몸을 잘 추스리거라.”
곤장 서른 대는 가벼운 형벌이 아니었다.
무공을 익힌 한묵도 침대에서 며칠은 있어야 할 정도였다.
야홍릉은 정려더러 약재를 담은 함을 한 상서에게 전해주게 했다.
“이건 약재인데 상처 회복에 도움이 될 걸세.”
말을 마친 그녀는 소매에서도 약병을 꺼냈다.
“이건 바르는 약인데 효과가 좋은 것이네.”
한 상서는 머리를 주억대며 말했다.
“공주 전하, 감사합니다.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묵은 말없이 야홍릉을 바라보다 그녀의 옆에 서 있는 흑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압박감에 한묵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남자는 누구지? 호국 공주의 옆에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한묵이 능묵을 볼 때, 능묵도 무표정한 얼굴로 한묵을 힐끗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야홍릉의 옆에 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통령, 침대에 올라가거라. 난 한 상서와 나눌 얘기가 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에 한 상서는 표정이 변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서재로 드시지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갔다.
한묵은 다시 침대로 올라가 엎드린 뒤, 생각에 잠겼다.
호국 공주는 먼저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예전에도 호국 공주는 한씨 가문과 왕래가 없었다. 물론 그녀가 왕래하지 않은 것은 한씨 가문만이 아니었다.
그간 제경의 귀족 가문에서 야홍릉의 눈에 들 수 있는 가문은 없었다.
호국 공주는 예전에 바라는 것이 없었기에 그 누구와도 사이좋게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보니 호국 공주는 자신만의 계획이 있는 것 같았다.
한묵은 한옥금 가문의 결말과 죽은 3황자를 떠올렸다.
그리고 탈옥한 뒤, 사라진 한옥금도 떠올랐다.
그러다 채찍에 목 졸려 죽은 장양후와 장양후를 죽인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는 정왕도 떠올랐다.
이상한 느낌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퍼져갔다.
‘호국 공주는……. 뭘 원하는 것일까?’
한묵은 방금 야홍릉의 옆을 따르던 준수한 청년이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의 아름다운 용모에 정신이 팔려 그에게서 풍기는 강한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할 수 있었지만 한묵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도대체 신분이 뭐지?’
“형님.”
이때, 병풍 밖에서 하늘색 장포를 입은 공자가 들어왔다.
“호국 공주가 오셨습니까?”
한묵은 그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 전하는 서재로 가셨다.”
‘서재?’
한기는 놀란 듯, 잠시 뒤에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함께 가신 것입니까?”
한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논하러요?”
한묵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넌 요즘 한경백과 가깝게 지내고 있느냐?”
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 편입니다. 한 공자는 아는 것도 많고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지요. 전 그의 인품과 학식을 좋게 보기에 친구가 되었습니다.”
“요즘 그가 이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더냐?”
‘이상한 행동?’
한기는 의아한 얼굴로 한묵을 바라보았다.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지…….”
“아무거나 좋다.”
한기는 생각을 해보고 대답했다.
“이상한 모습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초씨 저택에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하룻밤 자기도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