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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23)화 (22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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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화 다른 방식으로 할 것입니다

말을 마친 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신분이 고귀하여 황자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초유에게 관심이 없었다.

체면을 구기려고 찾아온 사람을 굳이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홀로 화청에 남은 초유는 멍한 얼굴로 야홍릉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호국 공주도 야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호국 공주의 야심이 뭔데? 정왕은 뭘 알고 있는 거지?’

야정연이 숭준의 죽음에 연루되어 정직된 뒤, 그는 한 번도 야정연에게 연락을 해본 적이 없었다.

황제가 그를 달리 볼까 두려운 것도 있었고 그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방금 전, 야홍릉과 대화를 한 그는 생각에 잠겼다.

‘내가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나?’

초유는 점점 멀어져가는 여인의 마른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금 바로 떠날지, 아니면 정왕과 호국 공주 사이의 관계를 파악할지 고민했다.

‘이렇게 떠나면 오늘 밤 노력은 헛수고한 게 되는데…….’

그가 하는 고민에 대해 야홍릉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조정 업무에 바빴던 그녀는 최근 들어 한가한 적이 별로 없었다.

홍릉원에 돌아간 그녀는 정려와 정란더러 목욕에 쓸 뜨거운 물을 받아오라고 했다.

지시를 마친 야홍릉은 병풍 앞의 비단 탑에 앉았다.

그녀는 우물쭈물거리는 정려를 보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왜 그러냐?”

“……아닙니다.”

정려는 고개를 젓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뜨거운 물은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이렇게 빨리?’

야홍릉이 병풍 뒤로 가보자 정말 욕조에 뜨거운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욕조 안에는 꽃잎까지 떠 있었다.

‘정려와 정란이 내가 언제 돌아올 줄 알고 시간을 맞춰서 뜨거운 물을 받아 놓은 거지? 이건 이상한 일은 아니나…….’

야홍릉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를 보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침전 안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옷을 벗고 목욕했다. 눈을 감은 채, 욕조 안에 기대앉자 따뜻한 물이 몸을 감쌌다. 그러자 며칠간 피곤했던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정려는 옆에서 살뜰하게 시중을 들었다. 그녀는 물을 끼얹고 야홍릉의 몸을 닦아주었다. 하얗고 매끈한 피부는 다른 명문가 규수들과 다를 바 없었다.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바람을 맞은 무장 같지 않았다.

하지만 육 개월이 넘도록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으니 다시 원래의 피부색으로 돌아올 만도 했다.

가는 손끝이 어깨를 따라 뒷목을 부드럽게 눌렀다. 적당한 힘과 손길에 그녀는 피곤을 잊고 잠이 들었다.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야홍릉은 눈을 감은 채, 졸고 있었기에 두 손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다.

반 시진이 지나자 그녀의 어깨를 주무르던 손길이 사라지고 정려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일어나시지요. 물이 다 식었습니다.”

야홍릉은 티가 나지 않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눈을 뜨고 잠깐 앉아 있더니 말없이 욕조에서 나왔다. 정려는 그녀의 몸을 닦아 주고 부드럽고 널따란 침의를 입혀 주었다.

침전 안은 연기가 자옥하고 향내가 났다.

야홍릉은 병풍을 지나 내전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시야에 준수한 얼굴이 들어왔다.

‘탐스럽군.’

그녀의 머릿속에 불쑥 이 네 글자가 떠올랐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새하얀 속옷을 입은 청년이 침대 위에서 얌전하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부드러운 긴 머리를 내려뜨린 그는 어깨를 살짝 들고 매혹적인 목과 쇄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도하고 싸늘하나 유순했다.

야홍릉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정려와 정란은 이미 침전의 다른 시녀들을 데리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내전에는 둘밖에 남지 않았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풍에 기댔다.

그녀는 담담하게 침대 위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주인님.”

청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을밤은 찹니다. 이미 주인님의 침대를 덥혀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언제 온 것이냐?”

청년은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박거렸다.

“방금 전입니다.”

야홍릉이 또 같은 질문을 했다.

“언제 온 것이냐?”

청년은 야홍릉이 넘어오지 않자 애교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에 뵙는 건데 제가 전혀 그립지 않으셨습니까?”

“…….”

그녀는 걸어가 침대 옆에 앉았다.

“언제 온 것이냐?”

“맞추어 보십시오.”

야홍릉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다.

“봉서오가 떠난 날 밤.”

단호한 말투에 청년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온 것을 진작 알고 계셨군요. 그러면서 말씀도 안 하시고.”

청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흥분한 것처럼 들떠 있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 아주 기쁩니다. 주인님이 제 냄새에 익숙하시다는 거니까요.”

그는 활짝 웃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의 표정을 보다가 이상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다 한참 뒤, 입을 열었다.

“무슨 냄새?”

‘음?’

청년은 고개를 살짝 들고 대답했다.

“노리개의 냄새 말입니다.”

야홍릉은 입가를 실룩이며 화제를 돌렸다.

“왜 온 것이냐?”

“주인님의 침대를 덥혀 드리려고요.”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는. 한 나라의 제왕이 조정에 힘쓰지 않고 침대를 덥힐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야홍릉이 꾸짖었다.

청년은 그녀의 말을 듣더니 서운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전 주인님의 노리개입니다. 그러니 주인님의 침대를 덥혀 드려야 하는 것도 제 소임이지요.”

야홍릉은 그를 노려보았다.

청년은 그녀의 시선을 아랑고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초유를 측부로 들일 것입니까?”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것 때문에 오늘 밤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냐?”

온 지 며칠이나 되었으면서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 오늘 갑자기 그녀의 침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그를 보니 야홍릉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초유는 못생긴 건 아니나 저와 비교하면 멀었습니다.”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기다란 목을 드러냈다.

“그리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주인님, 절대 그 녀석의 꾐에 들지 마십시오.”

‘꾐에 들지 말라고?’

야홍릉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난 그렇게 바보가 아니다.”

‘내가 남색이나 밝히는 멍청이로 보이나?’

능묵은 시선을 들고 그녀의 싸늘한 얼굴을 보자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름을 부르거라.”

“주인님.”

“…….”

청년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측근 어영위나 남첩은 주인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그건 예의 없는 짓이지요. 만약 제가 주인님의 이름을 그대로 부른다면 다른 사람의 의심만 살 것입니다.”

“무슨 의심?”

“제 신분과 우리 사이를 의심할 것입니다.”

청년은 고개를 살짝 들며 글썽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어떤 신분이어야 주인님의 이름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을까요?”

“…….”

“제가 그립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는 말을 하면서 야홍릉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그리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지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안고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덤덤하게 말했다.

“일어나거라. 밖에 다녀오겠다.”

“나가시려고요? 이 시간에 어디로 가신다는 것입니까?”

능묵은 미간을 찌푸렸다.

야홍릉은 일어나 옷걸이에 걸렸던 옷을 입으며 말했다.

“한 상서의 저택.”

그녀의 말을 들은 능묵은 바로 그녀의 의도를 파악했다.

금위군 통령 한묵은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곤장 서른 대를 맞았다. 이번 일은 한옥금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한옥금은 지금 공주부의 감옥에 있었다.

야홍릉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한묵은 영원히 한옥금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한묵이 벌을 받은 건 야홍릉의 탓도 있으니 그녀가 가서 살펴보는 것도 인지상정이었다.

그녀는 한씨 가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능묵은 더 이상 장난을 치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나 야홍릉이 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옷장에서 검은색 장포를 꺼내 입고 허리띠를 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평소의 진지하고 과묵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너도 가려고?”

능묵이 대답했다.

“제 직책은 주인님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걸어갔다.

“주인님, 참 대단하십니다.”

능묵이 따라가며 감탄 섞인 말투로 말했다.

“목국의 상황은 제 예상보다도 빨리 변하더군요.”

야홍릉은 그에게서 ‘주인님’ 소리를 듣자 그가 예전 어영위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둘의 사이는 전혀 변한 적이 없는 듯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조심스러운 말투에는 모두 그의 애틋한 마음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둘의 사이가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온 것이냐?”

“주인님이 절 그리워할까 봐서요.”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능묵은 눈치 빠르게 말을 바꾸었다.

“제가 주인님이 너무 그리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른 것도 아닙니다. 전 원래…….”

“똑바로 말하지 못하겠느냐?”

능묵은 침묵을 지키다 대답했다.

“전 원래 등극 대전이 끝나자마자 오려고 했으나 주인님이 화내실까 두려워 한 달을 더 버티다 온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녀에게 한 소리 듣고 말았지만 말이다.

정원은 불빛으로 환했다.

지나가던 시녀들은 그들을 보고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둘이 지나가서야 일어났다.

능묵은 야홍릉의 곁을 따르며 최대한 가까이 붙으려고 애썼다.

“영린은 아직 남성국에서 주인님의 큰 오라버니를 접대하고 있습니다.”

청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으나 제법 제왕의 위엄을 풍겼다.

“설까지 있다 영린은 동제로 돌아가 정무를 볼 것입니다. 섭정왕 영위는 병사들을 거닐고 천하를 통일시킬 것이고요.”

‘천하를 통일시켜?’

야홍릉은 흠칫 놀랐다.

영린이 제국을 통일시킨다면 어린 황제 영린은 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제왕 중 한 명으로 남을 것이며 길이길이 제국 백성들의 찬사를 들을 것이다.

물론, 책에 기록되어 오래도록 전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야홍릉은 헌원용수가 천하를 통일시키려고 했던 계획이 떠올랐다.

“만약 나중에 남성국과 제국이 싸운다면…….”

능묵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성국과 제국은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왜?”

“주인님.”

능묵은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전생에 저는 무력과 기예병으로 천하를 통일시켰으나 이번 생에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냐?”

“피를 보지 않는 방법으로 승부를 보겠습니다. 영린이 남제를 치려고 하는 것은 위대한 포부가 있는 게 아니라 나중에 담판할 조건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 두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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