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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22)화 (22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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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화 제왕은 무정하구나

손평은 한숨을 내쉬고 뒤에 있는 역졸을 돌아보았다.

역졸이 열쇠를 꺼내 감옥 문을 열자 손평이 말했다.

“폐하께서 이것들을 하사하시며 3황자께서 고르라고 하셨습니다. 폐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뭐라고?’

야소숙은 멍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뭘 고르라고?’

그의 시선은 뒤에 있는 두 내관에게 향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물건을 본 순간, 야소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럴 리 없어! 부황이 날 이렇게 대하실 리 없어. 절대로…….’

그가 잘 아는 물건들이었다. 황제가 잘못을 저지르는 비빈들에게 하사하는 물건들이었다.

그동안 그도 이것들을 여러 번 보았지만 자신이 이런 것을 선택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손평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두 내관이 안으로 들어갔다.

“썩 꺼지거라!”

야소숙은 뒷걸음질 치며 소리를 질렀다.

“부황이 날 이렇게 대하실 리 없다. 손평, 감히 날 속여?! 거짓 성지를 전하는 게 얼마나 큰 죄인지 아냐? 누구의 지시를 받고 날 죽이러 온 것이냐?”

손평은 한숨을 내쉬고 동정 어린 시선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야소숙을 바라보았다.

“전하, 저는 성지를 따를 뿐입니다.”

야소숙이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아니야!”

손평이 담담하게 말했다.

“거짓 성지를 전하는 것은 죽을죄입니다.”

“아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부황께서 나에게 이럴 리 없어…….”

야소숙은 뒷걸음질을 치다 벽에 닿았다.

“아니, 아니야…”

그는 이성을 잃은 얼굴로 ‘아니야’만 중얼거렸다. 손평은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의 뜻이니 저도 어길 수 없습니다. 3황자께서 얼른 선택해 주십시오. 아니면 제가 결례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또 담담하게 덧붙였다.

“한씨 가문은 이미 처형당했습니다.”

‘한씨 가문이 뭘 당해?’

야소숙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핏기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 한씨 가문의 사람들은 모두 처형장에 끌려가 참수당했습니다.”

야소숙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한옥금이 탈옥해서 폐하가 크게 노하셨습니다.”

손평은 차분하게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직까지 한씨 가문의 2공자를 찾지 못했지만 폐하의 분노는 피로 달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야소숙은 한씨 가문의 사람들과 같은 곳에 갇혀 있지 않아 이 소식을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폐하의 분노는 피로 달랠 수 있다고?’

야소숙은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창백하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더니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절망과 비웃음이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

“부황께서는 정말 내가 반역이라도 할까 두려우셨던 건가? 하하, 화가 나셨다, 화가 나셨다라…… 제왕은 참 무정하구나. 제왕은 참 무정해…….”

눈부시던 과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태자 자리도, 한씨 가문도, 심지어 그의 목숨까지도……

‘부황은 참 독하신 분이다.’

그는 앞에 서 있는 내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낄낄 웃었다. 그리고 벽 모퉁이에 주저앉았다. 그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후는?”

손평이 대답했다.

“모릅니다.”

야소숙은 고개를 들어 감옥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서글픈 표정이 드리웠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부황이 부자의 정도 저버리는데 황후에 대한 부부의 정을 신경 쓸 리 없었다. 마음속에 황권밖에 없는 그에게 가족의 정은 사치품일 뿐이었다.

“가져오너라.”

그는 무기력하게 입을 열었다.

“술 말이다.”

술병을 들고 있던 내관은 손평을 힐끗 보았다. 손평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손 총관.”

야소숙은 내관에게서 술병을 받아 든 뒤, 지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죽기 전에 부황이 마음에 둔 태자 후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

“저는 폐하의 마음을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못해?”

야소숙은 손평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곧 죽게 생겼는데 이 정도 소원을 들어줄 수 있잖나. 그래야 황천길을 편히 가지.”

손평은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아마 대황자인 듯합니다.”

하지만 황제가 마음에 둔 태자 후보가 순조롭게 황위에 오를 수 있을지는 그도 장담할 수 없었다.

“대황자?”

야소숙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곧 피식 웃음을 흘렸다.

“큰 형님이었군……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어. 평소 조용하기만 하던 큰 형님이 최후의 승자가 된 거야? 하하, 야모침과 야정연이 안다면 실망하겠지?”

말을 마친 그는 독주를 벌컥 마시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왕은 참 무정하구나. 참 무정해…….”

그의 입가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야소숙이 들고 있던 술잔이 쨍그랑 떨어졌다.

벽에 기댄 그의 눈은 빛을 잃었다.

손평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관을 데리고 황제에게 보고하러 돌아갔다.

계승 싸움에서 가장 유력하던 4황자가 가장 먼저 탈락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야소숙은 죽기 직전까지도 그를 사지로 몬 사람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이것은 참 슬픈 일이었다.

어둡고 좁은 천뢰에서 나오자 밖은 눈부시게 밝았다.

천뢰의 입구에서 불어 나오는 찬바람에 손평은 몸을 흠칫 떨고 옷깃을 여몄다.

‘오늘 날씨는 그다지 좋지 않군.’

아침까지 햇살이 눈이 부셨지만 점심때가 지나자 바람이 불면서 햇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이윽고 하늘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그러다 또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황궁에 폭풍우가 휘몰아칠 것이라고 미리 말해주는 듯했다.

“비가 마침 제때에 오는군.”

손평은 천뢰 입구에 서서 한숨을 내쉬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비가 더 크게 내려 처형장의 피비린내까지 다 씻어주었으면 좋겠구나.”

* * *

비는 점점 세게 내렸다.

공기 중의 피비린내가 씻겨 내려가는지, 점점 옅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공주부의 감옥 있는 한옥금은 빗소리를 듣자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기만 했다.

그는 절망에 빠진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그는 탈옥하기 전에 누군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순간, 그는 자신이 음모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찬 바람이 불어오자 한옥금은 몸서리를 쳤다. 갑자기 눈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나자 그는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너, 너는 누구냐?”

아름다운 흑의 소년이었다.

싸늘한 표정에 깡마른 몸매를 가진 소년에게서는 무섭도록 차가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한옥금, 야소숙은 죽었다.”

흑의 소년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한옥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휘청거리다 무기력하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씨 가문도 멸문되었지. 그런데 너는…….”

소년의 목소리에서는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소년이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색 단약이 튀어나오며 한옥금의 눈앞에서 터졌다. 향긋한 냄새와 함께 약간의 습기가 그의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한옥금은 고개를 벌떡 들었다.

그가 이 냄새를 파악하기도 전에 몸에 힘이 풀렸다.

흑의 소년은 차가운 시선으로 그를 보더니 몸을 돌리고 어둠 속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 * *

어느덧 사흘의 시간이 지났다.

조정 대신들은 다사다난한 상황에 익숙해졌지만 수시로 나타나는 변수에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한씨 가문의 멸문 사건으로 그들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요즈음 조정을 드나드는 대신들은 전보다 훨씬 조용했고 기루도 손님이 줄어들었으며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적어졌다. 물론 좋은 점도 있었다.

길거리에서 싸우거나 아녀자들을 건드리는 망나니들도 적어졌기 때문이었다.

으스대던 관리들도 요즈음엔 거의 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최대한 외출을 삼가하고 꼭 집을 나서야 하는 일이라면 하인을 한두 명밖에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다들 황제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지내기 바빴다.

황제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번 상황은 예전과 달랐다. 친아들의 목숨이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살의를 품은 것도 사실이었고 화를 낸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후회했는지 안 했는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도 제거하는 황제 앞에서 누가 이 시국에 눈치 없이 까불겠는가?

대가문에서도 왕래가 뜸해졌다.

조금이라도 떠들었다가 누명을 쓸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야홍릉이었다. 그녀는 조정 업무를 맡은 뒤로 매일 바쁘게 움직였다.

일에 익숙해지는 것도 중요했으나 사부와 호부에서 그녀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도 그녀가 해야 할 일이었다.

야홍릉은 매일 공주부와 황궁을 오가며 다른 황자들보다 훨씬 바쁘게 보냈다.

시월 초여드레 밤에 초유는 야홍릉을 찾아왔다.

야홍릉은 화청에서 그를 접견했다.

한때 한옥금과 마찬가지로 유명했던 초유는 여전히 온화하고 준수했다.

차를 마신 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 뵌 것은 공주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말하거라.”

“저는 전하를 좋아합니다.”

야홍릉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입니다.”

초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 피식 코웃음을 흘렸다.

“예전에 전하를 놓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습니다…….”

“그래서 내 측부로 들어오고 싶다는 말인가?”

초유는 살짝 당황하더니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저는 더욱 그럴 듯한 신분을 원합니다. 제가 너무 당돌하여 전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더러 측부의 자리에서 시작하라고 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의 착각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말이 끝난 뒤, 초유는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차갑게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야홍릉이 별다른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그는 더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 한기는 공주 전하가 내뿜은 게 아니었어…….’

그는 고개를 돌리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측부에서 시작해도 된다?”

야홍릉은 입꼬리를 올리고 피식 웃었다.

“내 규정은 변하지 않는다. 측부가 되고 싶다면 네 성의를 보여야지.”

그 말을 들은 초유는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지만 태연하게 일어나 옷자락을 들고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공기 중의 온도가 더욱 떨어진 듯했다.

“야정연을 위해서 자존심도 버리는군.”

야홍릉은 찻잔을 들고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야정연이 이걸 말해주지 않던가?”

‘뭘?’

초유는 당황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나도 야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초 공자가 진심으로 날 좋아한다면 오늘 밤새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있거라. 그런다면 내가 네 성의를 봐서 저택에 들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목적으로 온 것이라면 일찌감치 돌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그 얄팍한 수는 나한테 통하지 않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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