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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21)화 (22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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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화 멸문되다

첫 번째 성지.

3황자 야소숙은 적국과 내통한 죄는 용서받을 수 없으나 황자임을 배려해 독주(毒酒, 독이 든 술), 또는 백릉(白綾, 자결의 용도로 쓰이는 하얀색 천) 둘 중에서 선택하라.

두 번째 성지.

한씨 가문의 차남은 공주를 죽이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한 뒤 탈옥하였기에, 한씨 가문의 구족을 참수형에 처한다.

성지를 들은 대신들은 몸서리를 쳤다.

다른 황자를 지지했던 대신들도 황제의 지시를 듣고 겁에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적인 황권 앞에서 모든 이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황후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태후가 늘 손에 쥐고 있던 염주도 줄이 끊어지며 구슬이 바닥에 흩어졌다.

3황자와 한씨 가문의 운명처럼 모조리 나락에 떨어진 것이다.

‘제왕이 화를 내면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는 말이 현실이 된 셈이었다.

처형장에는 피가 강을 이루었고 공기 중에는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백성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한때 영광을 누렸던 사람들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구경했다. 그들은 무섭기도 했지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에 혀를 내둘렀다.

남 부러울 것 없이 살던 한씨 가문은 결국 멸문하고 말았다.

“한씨 가문이 처형당한다는데, 처형장에 가보지 않으십니까?”

한경백은 호수 중심의 정자에 앉아서 물결이 일렁이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걸 보아서 뭐 하겠습니까? 제가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한 공자는 구할 수 없는 건가요? 아니면 구하기 싫으신 건가요?”

한경백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구할 수 없기도 하나 구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3공자는 지금 어산서원의 사보이니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도 되나요?”

“가식적인 모습이 모범이 될 리는 없지요.”

한경백은 차를 마시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한씨 가문과 오래된 원한이 있습니다. 그들이 무너지는 게 제가 오랫동안 바랐던 결과이지요.”

초하는 그 말을 듣더니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3공자는 한옥금의 행방이 궁금하지 않아요?”

“네, 궁금하지 않습니다. 그건 제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니까요.”

한경백이 대답했다.

초하는 놀란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한씨 가문의 서자를 제대로 알게 되는 기분이 들었다.

“3공자는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르네요.”

한경백은 미소를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떠들썩한 밖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처형장과 비교하면 그의 모습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

초하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제 오라버니가 말씀드린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셨나요?”

한경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공자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고 지금 관직까지 맡았으니 호국 공주의 측부로 남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듯해요.”

한경백은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초 낭자의 뜻은 저더러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까?”

“은혜를 저버리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한다고 해도 호국 공주에게 영향이 미치지 않을 거예요.”

초하는 고개를 저었다.

한경백은 빙그레 웃더니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초하를 바라보며 점잖게 말했다.

“이만 가보아야겠습니다. 초 낭자, 접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하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격식을 차리지 않으셔도 돼요.”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인 뒤, 화청을 떠났다.

초하는 한 걸음 뒤떨어져 그를 앞뜰까지 배웅했다.

이때, 초유가 회랑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고 한경백과 초하는 발걸음을 멈췄다.

“3공자, 이만 가시렵니까?”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폐를 끼쳤습니다.”

“아닙니다. 3공자, 점심식사는 하시고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초유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경백은 침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젯밤에 공주부로 돌아가지 않아서 전하가 화를 내신다면 큰일입니다. 먼저 가겠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초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혹 공주 전하께서 화를 내신다면 제가 해명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둘은 예의 바르게 말을 주고받았다.

적자와 서자의 신분을 제외하고 외모와 분위기, 학식으로만 본다면 초유와 한경백은 모두 제경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공자였다.

예전이라면 초씨 가문의 적자인 초유는 한경백 같은 서자와 왕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얻어낼 것이 있으니 그는 허리를 숙이고 먼저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경백은 감격하거나 황공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금 호국 공주부의 사람인데다 어산서원의 사보직을 맡고 있기도 했다. 제경의 가장 뛰어난 학부의 인맥을 손에 쥐고 있는데 그의 신분이 어찌 예전 같겠는가?

초유가 정왕을 도우려고 허리를 숙이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초씨 남매는 대문 밖에 서서 한경백이 마차를 타고 떠나는 것을 지켜보다가 한참 뒤에야 저택으로 들어갔다.

“오라버니, 저자는 우리 사람이 될까요?”

초유는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모르겠구나.”

“한씨 가문의 서자는 우리 생각보다 똑똑한 것 같아요. 속을 알 수 없잖아요. 겉보기는 온화하나 사실 우리와 거리를 두고 있죠.”

초하가 말했다.

“분위기를 봐서는 서자 같지 않구나. 명문가의 적자 못지않지.”

초유가 말했다.

초하는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서자잖아요.”

“한씨 가문은 이미 사라졌는데 적자고 서자고 할 게 뭐가 있어?”

초유는 여동생을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한경백이 앞으로 출세하면 새 한씨 가문의 가주가 되겠지.”

적자생존의 세상이다.

권력과 재물을 가진 귀족들은 늘 생명의 위험과 함께했다. 한씨 가문의 서자인 한경백이 어떻게 야홍릉의 눈에 들었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그가 운이 좋든 실력이 뛰어나든 한씨 가문이 멸족당할 때 홀로 멀쩡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초하는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한경백의 우아한 행동과 깨끗하고 준수한 용모에 그녀는 마음이 살짝 떨렸다.

“오라버니의 뜻은…… 저와 그를 혼인시키려는 것인가요?”

“그것이 사이가 가까워지는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지. 하지만 네가 싫다면 나도 강요할 생각은 없어.”

초유가 말했다.

초하는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한경백의 조건은 나쁘지 않아요. 그러나 그는 아직 공주의 측부라, 제가 원한다고 해도 당분간은 혼인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녀도 나이가 어린 편이 아니라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일 년 안에 그가 우리 쪽 사람이 된다면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보마. 그러나 우리 쪽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그가 누구의 사람이 되든 우리와 상관이 없는 일이야.”

초유가 말했다.

그렇게 되면 이 혼사는 없던 일이 될 것이다.

초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화제를 돌렸다.

“오라버니, 처형장에 구경 갔었어요?”

“아니.”

초유는 눈을 내리깔고 옷을 툭툭 털었다.

“난 그런 것을 못 봐.”

한씨 가문이 참수당하고 3황자가 자결을 지시받은 일은 무서운 것이지만 정왕 쪽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기도 했다.

강한 적이 다시 일어설 가능성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적이 줄어들수록 정왕의 가능성이 커지는 게 아니겠는가?

4황자인 정왕이 지금 난처한 상황에 빠지긴 했으니 2황자도 상황이 좋지 못했다.

어차피 가장 강한 적수는 남성국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대황자 야천란이었다.

야천란을 떠올리자 초유는 야홍릉의 속마음을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 인정머리 없는 공주는 누구를 지지할까? 모르는 척 지켜볼까? 아니면 누가 황위에 오르든 관심이 없나?’

“폐하께서 요즈음 기분이 좋지 않으니 오라버니도 밖에 다니지 마세요. 폐하에게 전해지기라도 한다면 좋지 않잖아요. 정왕의 상황도 좋지 않으니 폐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초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잠깐 망설이던 끝에 그는 입을 열었다.

“넌 공주 전하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초하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놀란 눈빛으로 초유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의 뜻은…….”

“공주부에 측부가 여섯이나 있지만 난 7공주가 남자를 밝히는 여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 측부들은 그저 보여주기식이겠지.”

초유가 담담하게 말했다.

초하는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오라버니, 설마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죠?”

초유는 어두운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른 생각이라고 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그의 머릿속에는 야홍릉의 싸늘한 얼굴이 떠올랐다.

제경 귀족 공자 사이에 서 있는 그녀에게서는 강한 기운이 풍겼다. 사람들은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압박감을 느꼈다.

그녀는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초유는 야홍릉에게 ‘퇴짜맞은’ 적이 있었다.

지난번 감진의 생일 연회에서도 야홍릉을 본 적이 없었다.

그때, 야홍릉의 냉담한 반응에 그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뒤로 다른 여인을 볼 때마다 야홍릉이 떠올랐다.

곱게 자란 세가 여인들은 얼굴만 다를 뿐이지, 다들 판에 박은 듯 똑같이 연약하고 얌전했다. 그래서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초씨 가문 적자라는 자부심을 부리지 않고 다른 측부들처럼 고분고분하게 굴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초유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수많은 측부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아. 된다고 해도 내 마음을 떳떳하게 표현할 수 있는 부마가 되어야지. 다른 측부들처럼 신하로 자칭하며 굽신거리고 싶지 않아.

그런데…… 야홍릉처럼 다가가기 어려운 여인의 마음을 무슨 수로 사로잡지?’

* * *

손평은 사람을 데리고 어둡고 좁은 통로를 지나 조용한 감옥에 도착했다.

뒤에는 나무 접시를 든 두 내관이 따르고 있었다. 접시에는 술병, 비수와 백릉이 있었다.

죄수복을 입은 야소숙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가 그의 초췌하고 창백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예전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손평은 잠깐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3황자 전하.”

익숙한 목소리에 야소숙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환각인 줄 알고 굳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손평은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3황자 전하, 손평입니다.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야소숙은 벌떡 일어나 감옥 밖에 서 있는 손평을 보고 불렀다.

“손 총관?”

손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접니다.”

“손 총관!”

야소숙은 흥분한 얼굴로 다가와 감옥 쇠창살을 움켜쥐었다.

“부황께서 날 내보내 주신다고 하셨나? 날 용서한다고 하셨나? 손 총관, 부황이 날 용서한 게 맞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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