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속이려 하다
한옥금이 탈옥했다.
야홍릉은 표정이 굳어진 표정으로 담담하게 물었다.
“이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폐하께서는 아직 모르십니다. 천뢰의 소식을 막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없이 홍릉원으로 돌아갔다.
천뢰는 신분이 높은 죄인들을 가두는 곳으로 담장이 높고 수비가 완벽했다.
한옥금은 물론이고 야홍릉처럼 무공이 뛰어난 사람도 혼자의 힘으로 탈옥할 수 없을 것이다.
한옥금이 탈옥했다는 것은 그를 돕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소문이 퍼지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한옥금이 왜 이 시기에 나온 거지…….’
야홍릉은 서재로 돌아가 사부의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변함없이 싸늘한 표정이었다.
“전하.”
서재 밖에서 시위가 보고했다.
“한 측부가 오셨습니다.”
“들라 하라.”
방문이 열리고 한 공자가 들어왔다.
늠름하고 훤칠한 그는 옅은 향기와 함께 야홍릉의 앞에 섰다.
그는 하얀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머금고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전하.”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초씨 저택으로 갔느냐?”
“……그러합니다.”
한 공자는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조금 늦게 대답했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한 공자는 그녀의 책상 앞으로 바짝 다가서더니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초유 공자가 제게 잘 보이고 싶은 건지 중요한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
한 공자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뗐다.
“전하, 절 좋아하십니까?”
야홍릉은 실눈을 뜨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는 절 좋아하십니까?”
한 공자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오늘 술을 좀 마셔서 전하와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한 공자는 눈을 내리깔고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
야홍릉은 입꼬리를 올리고 그를 바라보며 다시 반복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하거라. 듣고 있으니.”
“……전하, 절 좋아하십니까?”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흥미진진해진 듯했다.
“한경백, 초유가 너에게 뭐라고 했느냐?”
그녀가 물었다.
한 공자는 눈을 크게 뜨더니 야홍릉의 허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초유가 저더러 공주 전하의 옥패를 가져다 달라고 했습니다.”
아주 무례한 발언이었다.
이 요구를 제기한 초유나, 이 얘기를 옮긴 한 공자나 아주 큰 무례를 범한 것이었다.
옥패는 신분을 표하는 상징이자 매우 개인적인 물건이었다.
서로 정을 나눈 사이에만 주고받을 수 있었다.
초유가 이런 요구를 한 것도 이상하고 한경백도 오늘 어딘가 이상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숙이고 허리춤의 옥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옥패를 풀어내며 말했다.
“초유가 왜 내 옥패를 달라고 하는 것이냐?”
이 질문은 야홍릉이라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른 여인이라면 초유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수줍어했을 것이다.
물론, 초유가 이런 무례한 요구를 했고, 한경백이 사실을 전한 게 맞다면 말이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야홍릉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넌 초유를 어떻게 보느냐?”
“저는…….”
“초유가 누구의 사람인지 아느냐?”
“저는…….”
“한씨 가문과 초씨 가문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예전에 초유와 왕래도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친해진 것이냐?”
“그게 아니라…….”
“한옥금, 재미있나?”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노려보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힘들게 탈옥해서 겨우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게 다인가?”
한 공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고 말했다.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돼?”
한옥금은 입술을 꽉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더니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씁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라는 것을 어찌 아신 겁니까?”
“왜?”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코웃음을 쳤다.
“네가 한경백과 좀 닮았다고 분장을 하면 날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아니면, 내가 너에게 감정이 남아서 알아보는 거라 생각하였느냐?”
한옥금은 눈을 내리깔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그동안 항상 전하를 생각했습니다…….”
야홍릉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
한옥금은 그녀에게 손을 뻗으며 온화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마음을 입증할 기회를 주십시오. 전 정말 전하를 배신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야홍릉은 얼어붙을 듯 차가운 눈빛으로 그의 얄팍한 연기를 바라보았다.
이때, 갑자기 눈앞에 무언가 휙 하고 지났다.
한옥금이 말하는 동시에 널따란 소매에 가리고 있던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높은 소리로 외쳤다.
“야홍릉, 죽어라!”
비수가 날아오는 순간, 야홍릉은 손바닥으로 그의 손목을 내리쳤다.
손목에서 전해지는 극심한 고통에 한옥금은 비수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는 야홍릉의 발길에 차여 밖으로 날아갔다.
퍼억!
한옥금의 몸은 고통으로 웅크려졌다.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처럼 아파서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한옥금.”
야홍릉은 뒷짐을 진 채,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예전에 왜 너 같은 것을 좋아했는지, 또 후회하게 되는구나.”
한옥금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네가 어찌…….”
“어찌 중독되지 않았냐는 말이냐? 내가 이런 얄팍한 수도 이기지 못한다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겠느냐?”
야홍릉이 싸늘하게 물었다.
한옥금은 고통스럽게 숨을 헐떡였다.
“억울해, 이대로는 못 죽어…….”
“억울하긴 하겠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천뢰를 벗어나서 겨우 한다는 일이 한경백으로 분장해 날 죽이는 거라니……. 한옥금, 넌 생각이라는 게 있는 인간이냐? 설마 네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천뢰에서 도망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야홍릉의 코웃음 섞인 말에 한옥금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 도망도 내 계획 중 하나였다.”
야홍릉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이 기억나느냐?”
한옥금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난 널 죽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대권을 손에 넣는지 보여줄 거니까. 그렇다고 다른 사람까지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한옥금의 얼굴이 점점 더 핏기를 잃었다.
“야소숙과 한씨 가문이 이 상태로 천뢰를 차지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양식도 낭비하고 말이야.”
야홍릉의 말투는 한담을 나누듯이 평온했다.
“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
한옥금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지?’
“영영, 들어오너라.”
야홍릉이 입을 열었다.
검은색 옷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지시하십시오.”
“저자를 공주부의 감옥에 가두거라. 매일 두 끼를 주되 네가 직접 전해주거라. 절대 다른 사람의 손을 타서는 아니 된다. 한옥금이 날 죽이려고 했다는 말도 새어 나가면 안 될 것이다.”
야홍릉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한옥금은 온몸을 휘감은 한기에 고통도 잊고 겁에 질렸다.
그는 몸부림치며 일어나 이곳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영영은 공손하게 대답한 뒤, 그의 얼굴을 가리고 그를 가뿐히 들어올렸다.
“이거 놔! 이거 놔…… 읍!”
비명이 웅얼거리는 소리로 변했다. 한옥금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더욱 큰일은 그가 오늘 밤 충동적으로 벌인 행동 때문에 일어날 결과였다.
한씨 가문의 공자가 탈옥했다는 소식이 퍼진다면 황제는 크게 화를 낼 것이다.
‘폐하께서 화를 내신다면…….’
순간 한옥금의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야홍릉은 말없이 창가로 다가가 한옥금이 들려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밤 그는 한경백의 신분을 도용해 그녀를 찾아왔다.
공주부의 사람들도 그를 보았지만 다들 전혀 의심하지 않고 한경백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얼굴과 체형이 닮아서 조금만 단장해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분과 행적이 드러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 한경백은 지금 어디에 있지……?’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서재를 나섰다.
한옥금이 탈옥한 게 정말 야홍릉의 계획이었을까?
아니었다.
황제는 요즘 천뢰에 갇힌 사람들 얘기도 하지 않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야홍릉은 원래 관심이 없었다. 야소숙이 적국과 내통했다는 반역죄로 들어갔는데 죽지 않더라도 감옥에서 나올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친아들을 정말 죽일 수 있을지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태후와 황후의 행동을 본 그녀는 야소숙과 한씨 가문 사람들을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죽지 않는 한, 태후와 황후는 끊임없이 뭔가를 꾸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야홍릉은 눈빛을 흐렸다.
그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심지어 어머니의 얼굴까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가 어머니를 저버린 것도 사실이고 태후가 어머니를 죽게 한 것도 사실이었다.
곤경에 갇힌 어머니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목숨으로 딸을 구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억지로 궁에 들어가 수많은 냉대를 당했음에도 그녀는 어머니로서 흠잡을 곳이 없었다.
야홍릉은 딸로서 어머니의 원을 풀어주고 싶었다.
* * *
야심한 시각, 한옥금이 탈옥했다는 소식이 궁에 퍼졌다. 황제는 이 소식을 듣고 화를 내며 한묵을 불러와 한옥금의 행적을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며칠간 평온한 나날을 보냈던 대신들은 다시 긴장에 몸을 떨었다.
‘잠잠해지나 했는데 또 일이 터졌군.’
자꾸만 생기는 사건 사고에 그들의 심장은 편할 날이 없었다.
다음날 조례에 한묵이 한옥금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하자 직무 태만의 이유로 곤장 서른 대를 맞았다.
이 소식은 정왕부에도 전해졌다. 야정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천뢰는 수비가 완벽한데 무공 실력도 없는 한옥금이 어찌 탈옥했다는 말이냐?”
부하가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야정연은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는 죄를 지은 몸이라 자유까지 잃은 건 아니었으나 조심스레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장양후의 사건이 밝혀지기 전까지 그는 어디를 가나 제약을 받아 며칠째 정왕부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렇게 조용히 있다가는 제경의 천하가 바뀔 것 같았다.
야정연의 예감은 정확했다.
한묵이 곤장형을 받은 뒤, 건양궁에서는 또 성지 두 개가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