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날 믿는다고?
달빛이 비춰 들어온 침전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야홍릉은 멍하니 있다가 무늬가 새겨진 천장을 바라보다 다시 옆을 보았다. 아무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정려.”
정려와 정란은 시녀들과 함께 외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야홍릉의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급히 들어왔다.
“공주 전하, 일어나셨어요?”
다른 시녀들도 따라 들어와 물을 나르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들의 행동은 모두 조용하고 조심스러웠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인 뒤, 씻으러 들어갔다.
“전하.”
이때, 고 집사가 밖에서 걸어오더니 병풍 밖에서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내관이 찾아왔습니다. 폐하께서 전하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궁에 들어오라고 하셨답니다.”
야홍릉은 흠칫하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겠다.”
공손히 답한 집사가 물러났다.
세수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야홍릉은 마차를 타고 궁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근정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에게 일상적인 안부를 물은 뒤, 본론으로 들어갔다.
“홍릉아, 너에게 사부와 호부를 맡기고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하냐?”
야홍릉은 침묵에 잠겼다.
“왜 갑자기 이런 결정을 하신 것입니까?”
“요즘 조정에 일이 생겨 관리들이 파면되며 자리가 꽤 많이 났더구나. 당분간 그 빈자리를 채울 사람이 없어서 이러는 것이다. 네 오라버니들은 사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있지 않느냐? 조정에서 누가 둘째의 사람이고 누가 넷째의 사람인지, 또 누구를 쓸 수 있고 누구를 쓸 수 없는지 짐은 이젠 잘 모르겠구나. 그걸 알아볼 기운도 없고 말이야. 그래서 아예 너에게 맡긴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성국과의 통혼에 대해 할 말이 있느냐?”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알아서 하겠다. 목국의 종묘사직을 위한 것도 있지만 남성국 황제가 하는 행동을 보면 널 섭섭하게 대할 것 같지 않구나. 그래서 남성국에 가기 전에 정무를 보는 것을 배우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런 결정을 한 것이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았다.
‘봉서오가 부황 앞에서 또 뭐라고 한 건가? 왜 갑자기 사부와 호부를 내게 맡기겠다는 거지? 부황이 날 믿는다니…….’
“천란이가 곧 돌아오겠지?”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문득 오래도록 야천란의 소식을 듣지 못한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짐은 그가 돌아오면 태자로 책봉할 생각이다.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환상을 품고 있으니…….”
‘말도 안 되는 환상?’
야홍릉은 눈빛이 흔들렸다.
기회만 된다면 황제의 자식으로서 제위를 노리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야소숙, 야모침, 야정연, 심지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권력 다툼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대황자 역시 그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왜 음모와 술수가 난무하겠는가?
다만 다들 사용하는 수단이 조금씩 다를 뿐이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제가 정무를 맡는다면 사람들의 미움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침묵에 잠겼다.
야홍릉은 원래도 미움받기 쉬운 성격이었다. 거기다 사부의 일을 맡는다면 매정한 처사 방식에 다른 사람들이 반감을 살 게 분명했다.
하지만 미움을 받는다고 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녀와 척을 지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황제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건 괜찮다. 난 네 성격을 잘 알고 있지. 조정의 관리들은 그동안 너무 쉽게 살았어. 다들 자신의 직책을 잊은 것 같더구나. 네가 그들에게 신하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야홍릉은 생각에 잠겼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황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먼저 사부로 가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관리들에게 물어보아라. 손평을 보내도록 하겠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황, 감사합니다.”
손평이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전하, 이리로 가시지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평과 함께 근정전을 나서서 사부의 관아로 갔다.
“전하께서 갑자기 사부와 호부를 맡게 되셔서 당황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곧 익숙해지실 것입니다. 폐하께서 지금 믿을 수 있는 분도 공주 전하밖에 없으십니다.”
손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홍릉은 말없이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손 총관은 황자 중 누가 태자가 될 것 같나?”
손평은 흠칫 놀랐으나 고개를 숙이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제가 어찌 감히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다른 사람도 없지 않나?”
야홍릉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총관 대인은 부황을 수십 년 모셨으니 부황의 마음을 잘 알 테지.”
손평은 침묵에 잠겼다.
“부황이 첫째 오라버니를 마음에 두고 계시는 걸 알고 있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총관도 야천란이 무사히 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손평은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저는…….”
“그러고 보니 손 총관에게 동생이 있지?”
야홍릉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손평은 안색이 확 변했다.
“손 총관은 손씨인데 동생은 강씨지. 강안(江安). 그 강안에게는 아들이 있는데 손 총관에게는 조카인 셈이군. 강정금(江程錦)이라던데, 이름을 아주 잘 지었어. 앞날이 비단길처럼 순탄하라고 지은 이름인 듯한데 부친이 큰 기대를 걸었나 보군.”
손평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하…….”
“얼마 전에 각지 추위의 성적을 보았는데 강정금이 글재주가 있더군. 칠 년 동안 힘들게 공부한 보람이 있어.”
야홍릉의 말투는 한담이라도 하듯 담담하기만 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있지 않나? 그러나 개천을 벗어나도 귀인의 도움이 있어야 더욱 크게 될 수 있지. 안 그런가?”
손평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하지요.”
“손 총관은 궁에서 세력을 키웠겠지만, 궁의 세력은 궁 바깥일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지. 만약 내관이 과거시험에 손을 댄다면 그건 죽을죄고.”
손평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공주 전하, 하고 싶은 말씀이 무슨…….”
“손 총관은 숭준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지 않나?”
손평은 안색이 또 변했다. 손바닥에 땀이 고였지만 그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제가 폐하께 말씀드릴까 두렵지 않으십니까?”
“내가 말을 했다는 건 그게 두렵지 않다는 것이네.”
야홍릉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싸늘하게 말했다.
“난 두려운 게 없네. 심지어 많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지. 손 총관도 그리할 수 있나?”
손평은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궁의 대총관인 그의 권력은 작지 않았다.
궁의 크고 작은 내관과 궁녀 모두 손평의 소관이었다. 그래서 누구를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단지 이것뿐이었다.
내관은 정무에 간섭할 수 없었다. 그는 궁 밖의 일에도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래서 황제의 총애를 아무리 받고 있어도 황제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만 했다. 겉보기엔 대단해 보이나 실제로는 천한 노비였다.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른다면 바로 처형당할 신분이었다.
무엇보다 야홍릉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달리 손평은 죽는 게 무서웠다.
그에게는 약점도 있었다.
조카가 출세한다면 가문에 큰 영광을 가져오는 일이었다.
앞으로 대대손손 귀한 신분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도중에 사고라도 생긴다면 목숨을 잃을 텐데 무슨 앞날이고 말고 할 것이 있겠는가?
손평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이 얘기를 황제에게 말할 수는 있었으나 지금 호국 공주의 중요성을 잘 아는 황제가 그의 얘기를 듣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다른 것은 둘째치고 야홍릉이 가지고 있는 병권과 남성국 황제와의 혼인만으로도 황제는 그녀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야홍릉이 가문 배경도 없는 학자 한 명을 죽이는 것은 더없이 손쉬운 일이었다. 심지어 단서도 남기지 않을 수 있었다.
손평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전하,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해 주십시오.”
“강정금은 인재네. 난 그를 내 사람으로 쓰고 싶네.”
야홍릉이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승상까지는 힘들어도 마흔 전에 시랑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마흔 전에 시랑에 오른다고?’
손평은 마음이 흔들렸다.
가문 배경이 없는 사람이 시랑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더없이 큰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가 지나친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그가 명을 다할 때까지 지켜주겠네.”
손평은 마음이 또 흔들렸다.
명을 다할 때까지 지켜준다는 말보다 더 확실한 장담은 없을 것이다.
벼슬자리를 차지하고 큰 권력을 움켜쥐는 것은 대단한 일이나 누구도 자신이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황자들이 태자 자리를 두고 다툴 때는 백 년 세가여도 연루되어 몰락하기 일쑤인데 하물며 배경도 없는 보잘것없는 관리는 어떠하겠는가?
야홍릉의 말을 들은 손평은 걱정을 덜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침묵을 지키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공주 전하, 지시하실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하십시오. 목숨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야홍릉은 뒷짐을 지고 앞으로 걸었다. 손평의 말을 들은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싸늘한 그녀의 눈은 늘 그렇듯 속내를 읽을 수 없었다.
* * *
호국 공주가 동시에 사부와 호부 대권을 차지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목국에 퍼졌다. 이 소식을 들은 야정연은 화가 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사부와 호부? 육부 중에 야홍릉이 홀로 둘이나 움켜쥐었다고? 부황이 미친 거 아닐까?’
선왕도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부황이 홍릉이에게 사부와 호부 대권을 맡겼다고?”
이건 국고를 통째로 야홍릉에게 맡긴 거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관리의 임명과 승진 모두 야홍릉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지금껏 공주에게 이런 대권이 주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병권도 가지고 있지 않던가!
야모침은 황제가 무슨 충격을 당해서 이렇게 황당한 결정을 내린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조정 대신들도 황제의 뜻을 짐작하기 바빴다.
하지만 야홍릉은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얼른 정무를 숙련되게 익히는 게 급선무였다.
야홍릉은 사부에서 관리들을 만나고 자료들을 읽어 보며 빈자리에 넣을 인원들을 생각해 보았다.
어둠이 내려앉아서야 그녀는 공주부로 돌아갔다.
공주부에 들어서자마자 영영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전하, 한옥금이 탈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