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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18)화 (21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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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화 오래된 음모

야홍릉이 궁에 들어갔을 때, 한경백은 서신 한 통을 받았다.

서신에는 짤막한 글이 쓰여 있었다.

-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으니 도화산 누각에서 보시죠.’

한경백은 서신을 움켜쥐었다. 낯선 글씨체를 본 그는 생각에 잠겼다.

‘누가 날 만나려고 하는 거지? 위험하지 않을까? 정말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날 해치려는 것일까? 이 또한 음모가 아닐까?’

그는 생각을 해보다 고 집사에게 말 몇 마디를 한 뒤, 마차를 타고 도화산으로 향했다.

“한경백이 도화산으로 갔다고?”

궁에서 돌아온 야홍릉은 고 집사의 보고를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불러낸 것이냐?”

고 집사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모릅니다. 한 측부가 말하지 않았습니다.”

야홍릉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홍릉원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주변에 익숙한 느낌이 든다는 것을 얼핏 느꼈다.

홀로 정원에 서 있던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영을 불렀다.

“한경백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초씨 저택에 계십니다. 한 측부를 불러낸 사람은 초 각로의 손자 초유입니다.”

영영이 대답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초유라고?”

“네, 그렇습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켰다.

“그를 보호하는 사람이 있느냐?”

“제가 영삼과 영사를 한 측부에게 보냈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침전으로 들어갔다.

정란과 첨향이 다가와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정란은 야홍릉의 겉옷을 벗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앉으셔서 먼저 쉬고 계세요. 제가 차를 타서 타올게요.”

야홍릉은 창가의 비단 탑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정려는 어디 있느냐?”

첨향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정 낭자는 매 측부가 불러서 갔어요.”

말이 끝나자 침전은 정적에 잠겼다.

야홍릉은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싸늘한 그녀의 눈에서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잠시 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향긋한 차향이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졌다.

정란은 야홍릉에게 찻잔을 가져오며 물었다.

“지금 목욕을 하실 건가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참 뒤에 눈을 뜨며 물었다.

“오늘밤 저택에 다녀간 사람이 없었느냐?”

“허 공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허 공자가 와서 고 집사에게 공주 전하가 불렀다고 했어요. 하지만 한 측부도 안 계시고 전하도 궁에 들어가셔서 고 집사는 그더러 먼저 돌아가라고 했어요. 전하가 궁에서 돌아오신 뒤, 다시 부른다면 전할 거라고 하면서요.”

야홍릉은 차를 마시며 탑에 기대앉았다.

그녀는 문득 방금 전, 궁에서 본 사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전하의 어머니는 완주(莞州)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폐하께서 남방에 가셨다가 완주를 지날 때, 근비(槿妃)를 보시고 첫눈에 반하셨지요. 그래서 그녀가 혼약을 한 상태임에도 강제적으로 근비를 궁에 데려와 비로 책봉했습니다. 하지만 첫날밤에 피를 보지 못하자 폐하는 그녀를 더럽다고 여기면서 흥미를 잃었지요.

피를 확인한 것은 태후가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궁의 시녀는 침대에서 여인의 첫날밤을 상징하는 피를 보지 못했다고 태후에게 말하자 태후 옆의 어멈은 이런 상황도 있는 법이라고 했지요. 많지는 않으나 가끔씩 처녀임에도 불구하고 피가 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말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 여인이 처녀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황제가 강제적으로 데려온 여인이기에 처녀가 아니라도 황제를 만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가 황제를 속였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황족의 체면이 걸린 이상, 이런 이치는 통하지 않는 법이다.

근비가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황후도 불만을 품고 황제도 찜찜한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황제는 근비를 딱 한 번밖에 건드리지 않았다.

그 뒤로 근비를 께름칙하게 여긴 황제는 더 이상 그녀와 밤을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두 달 뒤, 근비가 임신한 사실이 알려졌다.

후궁은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곳이었다. 근비가 임신했을 때, 황제에게는 이미 아들 다섯 명과 딸 한 명이 있었고 후궁 비빈들이 가장 치열하게 황제의 총애를 다툴 때였다.

지금 보면 큰 일이 아니었으나 직접 그때의 고통을 겪지 못한 사람들은 사람의 마음이 얼마다 어둡고 추악한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첫날밤에 피를 보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로 강제적으로 궁에 끌려온 여인은 사람들의 냉대와 괄시를 받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근비가 황제의 눈에서 멀어질 때쯤, 황제에게는 새로운 여인이 생겼다.

봉호가 설빈(雪嬪)인 그녀는 피부가 백옥 같은 미인이었다. 황제는 그녀를 애지중지 조심스레 다루었다.

설빈은 다른 비빈들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근비가 딸을 낳은 이 년 뒤에도 설빈은 후궁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인이었다. 누구도 그녀의 기세를 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인은 명이 짧다고 하지 않았던가?

큰 사랑을 받고 있던 그녀에게 아이가 생기자 후궁 비빈들은 큰 위협을 느꼈다.

설빈은 임신했다고 확진된 해의 삼월에 살해당했다.

황제는 크게 화를 내며 이 사건을 조사하게 했고, 제왕의 분노에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그 해, 야홍릉은 갓 세 살이었다.

총애를 잃은 근비는 후궁에서 무사히 지내지 못했다. 태후에게 불려간 그날,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짐작했을 것이다.

“7공주가 이제 세 살이 되었군. 이 아이는 황족의 핏줄이니 내가 잘 키울 것이다.”

태후는 자애로운 목소리에 위엄을 숨기고 말했다.

“하지만 네가 설빈을 죽인 것은 내가 감싸줄 수 없구나.”

짧은 몇 년 안에 인생의 삭막함을 느낄 대로 느낀 근비는 태후의 말에 숨겨진 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녀가 설빈을 죽였다고 인정한다면 태후는 딸인 7공주를 무사하게 크도록 지켜줄 것이란 말이었다.

만약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태후는 그들 모녀가 후궁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설빈은 근비가 죽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태후는 그녀더러 이 죄를 뒤집어쓰라고 한 것이다.

지켜줄 배경도 없고 황제의 총애도 받지 못하는 근비는 궁에서 버려진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태후가 그녀더러 죽으라고 하는데 그녀가 반항할 여력이라도 있겠는가?

그래서 근비는 죽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죄를 지어 딸을 두고 자살한 것이라고 했다.

7공주가 천성적으로 싸늘한 사람이라고?

천성적으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성장 환경 때문에 성격이 변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어린 시절을 조곤조곤 말해줄 사람이 없으니, 그녀도 알지 못했다. 세 살은 온전한 기억을 가지기 어려운 나이였다.

그녀는 수많은 기억이 흐릿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오늘 황후가 예전의 일을 그녀에게 얘기하지 않았다면 야홍릉은 평생 이 일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비단탑에 기댄 야홍릉은 마음이 차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태후 때문에 죽은 것이었다.

그리고 태후에게는 그녀가 황제의 친딸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었다고 했으나,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어머니가 첫날밤에 피를 보지 못해 피어난 거짓말일 뿐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고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이 손에 드디어 피를 묻힐 때가 온 것이었다.

자시가 되었지만 한경백은 돌아오지 않았다.

공주의 측부가 야밤에 돌아오지 않는 것은 사소한 일이 아니었지만 야홍릉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한경백은 그녀의 측부일 뿐만 아니라 어산서원의 사보이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밖에서 일을 보는 건 당연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시가 되기 전에 정려가 돌아왔다.

“공주 전하.”

목욕을 마친 뒤, 침대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야홍릉을 보자 정려는 찻잔을 들고 걸어왔다.

“공주 전하.”

야홍릉은 ‘응’하고 대답했다.

“제가 직무에 태만했습니다. 전하, 용서해 주십시오.”

정려는 무릎을 꿇고 사실을 고했다.

“매 측부가 절 불러 바둑을 두자기에 그만…….”

‘바둑?’

야홍릉은 고개를 돌렸다.

“바둑을 잘 두느냐?”

“아니요.”

정려는 고개를 젓고는 찻잔을 야홍릉에게 가져갔다.

“전 칼이나 좀 다룰 줄 알지 다른 것은 잘하지 못합니다.”

야홍릉은 찻잔을 받아서 가볍게 마셨다.

“매 측부가 직접 가르쳐 주었습니다.”

정려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런 행위는 전하를 배신하고 바람을 피우는 행위 아닌가요?”

야홍릉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매 측부는 듬직하고 매력적인 남자입니다. 얼굴도 잘생겼고 가문도 나쁘지 않아서 훌륭한 편이지요. 만약 그가 자유의 몸이라면 서자라고 해도 세가 여인 중에서 골라 혼인했을 것입니다. 좋은 가문의 서녀거나 좀 낮은 가문의 적녀와 말이에요. 하지만 그는 지금 공주 전하의 사람인데 이렇게 저에게 접근하는 것은 좀 수상한 듯합니다.”

‘수상해?’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차를 마셨다.

그녀의 저택에 측부가 여섯 명 있었지만 모두 목적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인지라 그녀도 그들을 자신의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람을 피우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죄를 묻는다면 단번에 바람을 피운 측부를 잡을 수 있겠지만 그녀가 그러고 싶지 않다면 측부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측부가 정말 바람을 피웠냐가 아니라 매현근이 정려에게 접근한 목적이었다.

“매 측부는 오늘 밤 아무것도 묻지 않고 바둑 두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정려는 야홍릉의 침묵에 담긴 뜻을 눈치챘는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묻지 않을지는 모르겠어요.”

야홍릉은 차 한 잔을 다 마신 뒤, 찻잔을 정려에게 건네주며 담담하게 말했다.

“다들 물러가거라.”

정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야홍릉은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침전에서 풍기는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능묵.”

대답이 없었다.

주변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야홍릉은 눈을 떴다.

그녀는 자신이 환각을 느낀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를 그리워해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건가?’

어젯밤 봉서오의 말을 떠올린 그녀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용수의 행적에 관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그가 어디로 갔는지 짐작이 가기에 궁금하지 않은 것일 뿐이었다.

‘황위로 등극한 지 한 달 만에 사라져? 그것도 각 곳에서 온 황제와 태자들을 내버려 두고 제멋대로 사라지다니.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황제가 또 어디 있겠어.’

자시가 반 정도 지날 무렵.

야홍릉은 졸음이 쏟아져 자려고 했다.

이때, 미세한 숨결이 느껴지며 특이한 향이 그녀의 코로 파고들었다. 얕게 들었던 잠이 깊어지며 찌푸려진 상태였던 그녀의 미간도 서서히 풀어졌다. 야홍릉은 깊은 잠에 들었다.

주변은 정적에 잠겼다. 이때, 야홍릉의 마른 몸은 따뜻한 품에 안겼다. 곧이어 그녀의 이마 위로 가벼운 입맞춤이 촉 하고 떨어졌다. 짙은 그리움이 담긴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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