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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17)화 (218/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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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화 진실을 알고 싶다

“한씨 가문이 큰 화를 입지 않았다면, 황후마마가 지금도 위엄이 넘치는 후궁의 주인이라면, 야소숙이 태자가 되었겠죠. 황위에 오르기까지 했다면, 그랬다면 한옥금은 야자릉을 맞이했을 때죠. 하지만 만약 그냥 여기서 그쳤다면 전 그를 이토록 사무치게 증오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말을 멈춘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수십 년간 부귀영화를 누린 여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야소숙이 절 죽이려고 했습니다. 황후마마와 한씨 가문도 절 죽이려고 했지요. 야소숙이 황위에 오른다면 저는 그가 가장 처음으로 제거해야 할 걸림돌이 되겠지요. 맞습니까?”

황후는 크게 당황했다.

그녀는 주먹을 움켜쥔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다고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 저런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야홍릉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야홍릉이 야소숙을 보좌할 능력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야홍릉을 남겨두기 위험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야소숙이 황위에 오르면 야홍릉을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인정할 수야 없지 않은가?

“그래서 전 그와 철천지원수라는 겁니다.”

야홍릉은 황후가 인정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야소숙이 절 제거하고 싶어하니 저도 그럴 수 밖에요.”

황후는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네 착각이야. 소숙이는 네 오라버니인데 어찌…”

“못할 건 없죠. 다 뻔히 아는데 부인하지 마시죠.”

야홍릉이 싸늘하게 말했다.

황후는 침묵을 지키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소숙이는 널 해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어!”

“제가 꿈을 꾸었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숙이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옥금이 직접 독이 묻은 비수로 제 심장을 찌르는 꿈을요. 그리고 제가 죽은 지 며칠 되지 않아 그가 야자릉을 맞이하는 꿈도요.”

그 말에 황후는 안색이 확 변했다.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서리가 낀 것처럼 차가웠다.

“그 아픔과 한은 가슴 깊이 상처로 새겨졌지요. 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황후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고작 꿈 하나 때문에 이러는 것이냐?”

‘고작 꿈 하나라고?’

야홍릉은 냉소를 하였다.

“황후마마도 제가 미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아시지 않나요? 제가 사실도 아닌 꿈을 믿을 리는 없겠죠. 제가 믿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황후는 눈을 감았다. 순간 그녀는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수십 년간 황후 자리에서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순식간이 가문이 몰락하고 아들은 범죄자가 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운명이 무정하다는 것을 처음 느껴 보았다.

그런데 이 모든 게 꿈 때문이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야홍릉.”

황후는 눈을 뜨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소숙이가 황위에 오른다면 옥금이가 너 아닌 자릉이와 혼인할 거라고 했지…… 그래, 맞아. 옥금이는 널 아내로 맞이하지 않았을 거다.”

야홍릉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한옥금이라는 이름은 이제는 그녀에게 아무 의미 없었다.

한옥금은 그녀에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지 아느냐?”

황후는 야홍릉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네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래서 불안한 게 다가 아니야. 더욱 큰 이유가 있지.”

야홍릉은 차분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넌 폐하의 핏줄이 아니다.”

황후가 또박또박 말했다.

“한씨 가문은 고귀한 혈통의 공주를 맞아들이고 싶지 너처럼 공주 신분만 누리는 가짜 금지옥엽을 원하지 않거든.”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평온하게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후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못 믿겠느냐? 하긴,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십칠 년간 공주의 자리에 있었는데 자신이 사실상 황족 혈통이 아니라는 말을 믿고 싶지 않겠지. 네 존재는 네 어머니가 폐하를 배신한 것에 대한 증거니까…… 야홍릉, 폐하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널 어떻게 할지 두렵지 않느냐?”

그녀도 태후에게서 방금 들은 거라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잘 모르고 있었다.

만약 야홍릉이 황제의 친딸이 아니라면 그녀의 어머니가 황족의 체면을 깎는 수치스러운 짓을 했다는 말이었다.

자신 몰래 바람을 피운 여인의 딸을 황제가 어찌 받아들일 수있겠는가?

황후는 황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야홍릉의 운명도 한씨 가문처럼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져 옥살이를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사약을 하사받을 수도 있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말을 듣고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심지어 황후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디어 답을 얻은 것 같았다.

그녀는 여태까지 자신이 나라를 위해 세운 공을 고맙게 여기고 칠 년 동안 전쟁터에서 고생한 것을 안쓰럽게 여기던 부황이 사실인지 확인되지도 않은 죄명 때문에 그녀를 죽이라고 지시를 내린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에야 이해가 되었다.

만약 태후가 뭔가를 알고 있었다면 그것이 사실 여부를 막론하고 태후와 황후는 황제가 믿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부황이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것도 말이 되었다.

그녀의 병권과 세운 공을 제외하고 그녀의 출신 역시 전생에 죽게 된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황후는 그녀가 이 비밀을 듣고 충격에 빠져 말을 못하는 줄 알고 있었지만 사실 야홍릉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태후는 이 비밀을 알고 있었지만 야홍릉이 야소숙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기에 진실을 일찍 밝히지 않았다. 전생에는 야소숙이 태자의 자리에 오른 뒤에 야홍릉은 군공이 너무 커서 태자 자리를 위협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태후와 황후도 한옥금을 그녀와 혼인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야홍릉에게 살심을 품은 것이다.

태후가 만약 그때 황제에게 야홍릉의 출신을 말해주었다면 황실의 존엄과 제왕의 위엄에 흠집이 갈 수 있는 비밀에 황제는 크게 화를 내고 살심을 품었을 것이다.

거기다 그들이 역모죄까지 야홍릉에게 뒤집어 씌웠다면 황제가 야홍릉을 죽이라고 지시를 내린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전생의 죽음과 음모에는 야홍릉이 모르는 게 많았다.

독이 묻은 비수는 그녀의 목숨을 순식간에 빼앗아 가 그녀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죽음은 부황을 포함한 모든 황족 사람들이 바라던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전쟁터에서 칠 년간 고생하며 나라를 지켰지만 결국 이용가치를 잃은 뒤, 살해당하고 만 것이다.

야홍릉은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표정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뭐?’

황후는 경악했다. 그녀는 야홍릉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널 속이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이렇게 큰 비밀을 알고도 왜 침착하지?’

“속이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야씨 황족과 핏줄이 이어져 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누가 죽고 사는지만 중요할 뿐이었다.

전생에 그녀는 자신의 목숨과 네 장군의 목숨을 잃었다.

이번 생에는 누구도 그녀가 물러서도록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황족의 핏줄이 아니면 뭐 어떤가?

이 비밀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앞으로 무언가를 할 때, 더욱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핑계가 되었다.

“야홍릉!”

황후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야홍릉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궁을 나서려고 하자 황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지금 장난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냐! 이 사실을 폐하가 아시면 어떻게 될지 아느냐?”

‘어떻게 된다고?’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부황이 믿으시는지 어디 한 번 보자고요.”

야홍릉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황후는 그녀가 떠나는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며 오래도록 말을 잇지 못했다.

* * *

봉의궁을 떠난 뒤, 야홍릉은 바로 궁을 나서지 않고 후궁을 산책했다.

그리고 어렸을 때,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감천궁(甘泉宮)에 도착했다.

그녀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탓에 그녀에게는 어미와의 특별한 기억이 없었다.

오랫동안 비어진 궁전은 밤이 되자 더욱 스산했다.

야홍릉은 궁을 나가서 공주부에 묵은 뒤로 이곳에 발길을 돌린 적이 아주 적었다.

그러나 이날 밤, 그녀는 텅 빈 궁전에 들어갔다. 등불도, 시녀도 없는 어두컴컴한 궁전에서 야홍릉은 홀로 서 있었다. 그녀는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도록 한참 기다렸다가 희미한 달빛을 빌어 궁전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십칠 년 전, 어머니에게 일어난 이야기를 떠올렸다.

궁에 들어온 여인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한편, 자유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궁에 처박혀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따분하고 지겹게 보내야 했다.

예전에도 규칙을 어기고 다른 사내와 밀회를 저지른 비빈이 있었지만 야홍릉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황후의 말 한마디 때문에 이런 죄명을 어머니에게 뒤집어씌우고 싶지 않았다.

꽁꽁 숨겨둔 비밀이라고 해도 좋고 황당한 거짓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녀는 이것을 신경 쓰지 않지만 그래도 진실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다만 그녀가 진실을 알아보는 방식은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를 예정이었다.

밤바람이 비스듬히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 들어왔다.

미세한 발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창가 앞으로 가서 섰다. 그리고 창문으로 먼 곳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번화하기 그지없는 궁이었다.

그녀는 가장 어두운 곳에 서서 눈부시게 화려하지만 온기가 전혀 없이 차가운 궁을 바라보았다.

“전하.”

야홍릉이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황후는 내가 폐하의 딸이 아니라고 하더구나.”

어둠 속에서 남자는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믿으십니까?”

“믿고 말고 할 게 없지.”

차분하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진실을 알고 싶다.”

“만약 전하가 폐하의 딸이 아니라고 한다면 속상해하실 겁니까?”

“속상해?”

야홍릉은 그의 말을 반복하다가 말을 이었다.

“난 속상한 게 어떤 느낌인지 모른다.”

그 말을 들은 중년 남자는 또 침묵을 지키다 평온하게 말했다.

“전하는 폐하의 핏줄이 맞습니다. 이건 의심할 필요도 없는 사실입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 묻힌 그녀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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