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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16)화 (217/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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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화 솔직히 말하세요

봉서오는 잠자코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힘들게 글을 읽던 학자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참한 관리가 되려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벼슬길에 오른 뒤에 명예와 이득에 눈이 멀어 초심을 잃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궁문으로 들어간 뒤, 야홍릉과 봉서오는 각자 다른 길로 갔다.

한 명은 황제를 만나러 근정전으로 갔고 다른 한 명은 황후를 만나러 후궁으로 갔기 때문이었다.

“공주 전하.”

봉서오는 길을 가고 있는 야홍릉을 불러세웠다.

“저희 폐하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야홍릉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 뒤, 그를 바라보았다.

“전 호기심이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봉서오는 입가를 실룩거리며 야홍릉의 마르고 꼿꼿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생각에 잠겼다.

‘공주는 정말 폐하가 어디로 가셨는지 궁금하지 않은 건가?’

고개를 저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용수가 냉대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닌지 그의 취향에 의심이 들었다.

야홍릉은 인정미라고는 없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머리도 총명하고 무공 실력도 뛰어나 함께 전쟁에 나서기에는 좋으나 여인다운 구석도 없고 애교를 부릴 줄도 모르며 잘 웃지도 않았다.

봉서오는 목국에 온 뒤로 야홍릉이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는 이렇게 차가운 여인을 모시면서 평생 살려는 건가?’

그는 그런 광경이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근정전 밖으로 걸어간 그는 시위를 시켜 황제에게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위가 돌아왔다.

“폐하께서 봉 공자더러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봉서오는 감사하다고 한 뒤, 근정전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그에게 자리를 내어준 뒤, 차를 올리게 했다.

그는 침울하던 얼굴에 미소를 띠고 물었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오?”

봉서오는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폐하께 작별을 고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작별?’

황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렇게 갑자기 돌아가려는 것이오?”

“원래 목국에서 더 오랫동안 있을 생각이었으나 저희 폐하는 등극한지 얼마 안 되어 한창 바쁠 때입니다. 또 다른 나라의 황자와 사신들도 접대하느라…… 최근 금국과의 전쟁 때문에 병부와 호부는 비상사태이니 폐하께서 저한테 돌아오라고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저는 지금 돌아가 폐하를 도와 정무도 보고 통혼에 대해 자세하게 얘기를 나누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침묵에 잠겼다.

황제가 바뀔 때마다 신하도 바뀌는 법이다.

봉서오가 명확하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새 황제는 등극한 뒤로 아주 바쁠 것이다. 그가 말한 각국의 사신들을 접대하고 전쟁에 신경 쓰는 것을 제외하고도 심복들을 발탁해야 했다.

적대 세력이거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한 권신을 제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게다가 남성국은 동제와 통혼도 해야 하고 후궁 간택도 해야 하기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다. 주변에 믿음직한 사람이 있다면 황제도 한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봉 공자는 새 황제의 심복 중 한 사람이오?”

“심복이요?”

봉서오는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남성국 황제가 더 얘기한 것은 없소?”

“저희 폐하께서 내년 봄에 직접 목국에 오셔서 폐하와 양국의 통혼에 대해 얘기를 나눠 볼 거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폐하께서는 남성국과 목국이 연을 맺었기에 황제의 자리에 있는 한, 평생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목국과 영원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황제는 흠칫 놀랐다.

이 말은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충분했다. 황제는 남성국이 목국과 통혼한 뒤, 또다시 목국을 공격할까 두려웠다. 금국과 오랫동안 전쟁을 이어온 목국은 국고도 축나고 병사들도 적어 다른 나라와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었다.

그런데 남성국이 이렇게 호감을 표시해 온다면 다른 나라도 감히 목국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황제는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확 피어 있었다.

“짐도 같은 생각이었소. 짐과 남성국 황제는 마음이 통하나 보오.”

봉서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희 폐하께서 무리한 부탁을 하셨는데 들어주실 수 있는지요?”

황제가 말했다.

“봉 공자, 말해 보시오.”

“호국 공주는 나라의 기둥이라서 저희 폐하는 그녀가 남성국에 가기 전에 정무를 보는 법을 배우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나중에 남성국으로 가서 저희 폐하를 도와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니까요. 저희 폐하는 호국 공주를 다른 여인과 다르게 생각하십니다. 공주 전하를 친구이자 함께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동료로 보시는 거지요. 그러니 폐하께서 저희 폐하의 제안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무 보는 법을 배우라고?’

황제는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홍릉이는 병사를 이끄는 것에 능하긴 하지만 조정의 업무에 관심이 별로 없소.”

봉서오가 말했다.

“병사를 이끌 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나 앞으로 양국이 사이좋게 지낸다면 목국은 전쟁 치를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호국 공주의 능력도 썩히게 되는 거지요. 차라리 호국 공주가 조정에서 재능을 펼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부부가 함께 세상을 다스리는 셈이 되지요.”

‘함께 세상을 다스린다고?’

아주 혹할 만한 조건이었다.

황제는 기분이 좋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좋다, 싫다 대답할 수 없었다.

“폐하께서 난감하시다면 못 들은 거로 하시지요.”

봉서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공주 전하는 똑똑한 분이시니 남성국에 가신 뒤에 저희 폐하에게서 정무를 보는 법을 배우셔도 됩니다. 어쩌면 그러다 부부 사이의 감정이 더 좋아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봉서오는 야홍릉이 황후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부부’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렸다.

동제 공주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는 듯했다.

물론, 이곳은 목국이니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그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지만 그 말들은 황제의 가슴에 콕 박혀버렸다.

강하다고 소문난 남성국은 각 나라 황제들이 모두 동맹을 맺고 싶어 하는 나라였다.

황제는 찻잔을 들고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즘 조정에 사람이 부족하기도 하니 홍릉이가 당분간 날 도와 조정 정무를 봐도 되겠군.”

야소숙의 일로 조정의 중요 관리들이 몇 명 파면되었다.

이 자리는 오랫동안 비워둘 수 없기에 누군가 이어받아야 했다.

그 자리를 야홍릉이 맡는다면 그도 안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야홍릉이 남성국으로 시집가면 유능한 장군을 잃는 거지만 남성국 황제가 앞으로 목국과 사이좋게 지내겠다고 장담하자 한편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남성국과 목국이 동맹을 맺는다면 다른 나라들도 목국에 다른 마음을 먹지 않을 것이니 외부적으로 걱정할 것이 없었다.

내란이 일어난다고 해도 내부에서 해결하면 되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야천란이 돌아오면 모든 게 끝나기 때문이었다.

태자를 확정한 뒤, 태자의 세력을 서서히 길러주어 야천란이 대권을 움켜쥐게 하면서 다른 황자의 권력을 약화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면 다른 황자들도 괜한 마음을 먹지 않을 것이다.

봉서오는 이렇게 될 거라고 미리 예상한 것처럼 일어나 우아하게 예를 올렸다.

“전 더 이상 폐하를 방해하지 않고 가보겠습니다.”

“오늘 봉 공자가 떠날 줄 알았다면 송별 연회를 여는 것인데……”

봉서오는 고개를 저었다.

“폐하, 그러실 것 없습니다. 전 격식을 따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 * *

위엄이 넘치던 황후의 봉의궁은 지금 빈 궁전처럼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환한 불빛도 봉의궁의 쓸쓸한 분위기를 물리치지 못했다.

지금은 남들이 다 잠자리에 드는 야심한 시각이어서 궁전은 더욱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황후는 널따란 옷을 입고 내전의 비단 탑에 기대앉아 있었다. 검은 머리를 흐트러뜨린 그녀의 모습은 평소 단정하고 고귀하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그녀는 텅 빈 시선으로 앞을 바라보며 야홍릉이 오기를 기다렸다.

탁자 위의 차는 이미 차갑게 식은 상태였다.

짧은 한 달 동안 그녀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느낌을 맛보았다.

매일같이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모자가 상봉하기도 전에 야소숙이 천뢰에 갇힌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황후는 절망의 기분을 제대로 느꼈다.

시녀가 다가와 그녀의 찻잔에 뜨거운 차를 부었다.

호국 공주가 왔기에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야홍릉이 오지 않았다면 뜨거운 차 한 잔도 그녀에게는 사치였다.

궁의 궁인들은 강약약강이었다.

권력을 잃은 사람이라면 그게 황후라도 궁녀들의 무시를 받았다.

야홍릉은 황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싸늘하고 평온한 그녀의 눈빛은 황후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도 동정하는 티가 나지 않았다.

야홍릉은 탁자 위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차에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나는 방금 전에야 네가 소숙이의 내통 증거를 폐하께 바친 것을 알았다.”

황후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야홍릉, 대체 넌 소숙이와 무슨 원수를 졌다고 굳이 그를 사지로 모는 것이냐?”

‘무슨 원수를 졌냐고?’

야홍릉은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철천지원수요.”

황후는 흠칫 놀라더니 그녀를 노려보며 물었다.

“뭐라고?”

“저도 황후마마께 여쭈어볼 게 있습니다.”

야홍릉은 의자에 기대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한옥금이 연모를 핑계로 저에게 접근한 것은 제가 야소숙에게 도움이 되라고 이용한 거지요. 맞나요?”

황후는 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핑계를 대도 소용이 없지요. 황후마마, 쓸데없는 소리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진심을 터놓는 게 어떤가요?”

황후는 입술을 깨문 채, 침묵을 지키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누가 말해주더냐?”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직접 겪은 것이지요.”

황후는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옥금이가 너에게 접근한 것은 내가 시킨 게 맞다. 하지만 그 아이는 진심이었어.”

“그게 정말인가요?”

야홍릉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한옥금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제가 아닌 야자릉이지 않나요.”

황후는 또 흠칫 놀라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야홍릉이 다 알고 있으니 그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제가 정말 야소숙을 황위에 앉힌다면 최종적으로 한옥금과 혼인할 사람이 누구인가요?”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황후를 바라보았다.

“야자릉?”

황후는 안색이 변했다.

“옥금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라면 너와 혼인하겠…….”

“가설은 필요 없어요.”

야홍릉이 그녀의 말을 자르고 느긋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뼛속 깊이 파고드는 한기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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