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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15)화 (21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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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화 역전을 노리다

야홍릉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꾸물거리지 말고 얼른 말하거라.”

소년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전하와 연관된 일이라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하겠습니다.”

‘나와 연관되어 있다고?’

순간 야홍릉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말해.”

“아버지가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들은 정보인데 황후의 심복이 자안궁에 갔을 때, 태후는 딱 한 마디만 했다고 합니다. 태후는 필요하다면 전하의 출신으로 역전을 노리겠다고 했답니다.”

‘출신?’

야홍릉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출신?”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자세한 건 모릅니다. 아버지도 모르는 듯했습니다.”

야홍릉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채, 앞을 바라보았다.

‘내 출신이 왜? 태후가 설마 내가 부황의 친딸이 아니다 이런 연극이라도 벌이려는 건가?’

“공주 전하, 팔자가 아주 좋아 보이네요.”

멀리서 준수한 남자가 다리를 건너오며 말했다.

하얀색 옷은 그의 귀티 나는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봉서오는 여유롭게 웃으며 부채를 흔들었다.

“저는 매일 여기서 답답해 죽을 지경인데 공주 전하는 미인과 함께 이곳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다니. 참으로 부럽고도 질투가 납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봉서오의 옷차림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목국에서 해야 할 일도 마친 것 같은데 남성국으로 돌아가셔도 됩니다.”

봉서오는 옷자락을 휙 들더니 야홍릉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짐짓 침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저야 빨리 돌아가고 싶지요. 제가 떠난 지금 저를 기다리는 여인들이 눈물을 얼마나 쏟고 있을까요?”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제가 언제 잡던가요?”

“공주 전하는 잡지 않으셨지만 주인님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지요.”

봉서오는 부채를 흔들었다.

시원한 바람의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자 그는 실눈을 뜨고 한껏 즐기는 표정을 지었다. 야홍릉의 차가운 시선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요즘 성과가 좋던데 공주 전하는 생각이 어떠신가요? 사실 전 아예 반역을 일으키라고 추천드리고 싶지만요.”

봉서오는 호수에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날씨에 대해 말을 하는 것처럼 평온하고 느긋한 말투였다.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병권도 가지고 있겠다, 신은전의 조력도 있겠다, 남성국과 혼인도 할 수 있겠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저희 폐하도 흔쾌히 병사들을 데리고 와 전하를 황위에 앉힐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변방에 있는 육연지도 전하의 편인데 뭐가 걱정이신 것입니까?”

걱정할 것은 없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오늘 아침 조례에서 황제가 했던 말과 같은 말을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때가 된다면 누구도 그녀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찻잔을 입가로 가져간 야홍릉은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눈동자는 평온하기만 하여 누구도 그녀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목국은 안정적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약간의 비바람도 감당할 수 없었다. 고귀해 보이는 황자들은 작은 어려움에 부딪혀도 크게 당황하며 우왕좌왕했다.

목국의 황위는 야홍릉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이 홍상이었나…….”

봉서오는 부채로 소년을 가리키더니 실눈을 뜨며 말했다.

“공주 전하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주인님이 돌아오셔서 네 가죽을 벗겨버릴 수도 있거든.”

그 말을 들은 단홍상은 입을 삐죽거리더니 순순히 야홍릉의 옆에서 떨어졌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 밖은 어둑어둑해졌다.

그러나 서재는 등불로 환했다. 야홍릉은 커다란 책상에 마주앉아 명부책을 읽고 있었다.

“어산서원의 산장 자리가 비어 있군. 정왕이 정직된 뒤, 병부 대권은 한기(韓驥)의 손에 들어갔고. 야소숙이 내통죄로 인정된 뒤, 그를 따르던 호부 상서 두 명이 파면되었지. 그리고 시랑 두 명, 어서방의 참정 두 명까지……”

여인의 청아한 목소리는 밤에 들으니 유독 더 듣기 좋았다.

한경백은 귀를 기울이고 듣다가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 염두에 두신 인물이 있으십니까?”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자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조정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야소숙 일만 해도 그와 연루된 사람이 수십 명이나 파면되며 빈자리가 생겼다.

야홍릉은 이 참에 믿을 만한 사람을 넣어야 했다.

‘중추 육부, 형부상서 정창, 병부상서 한기, 호부는 현재 빈자리이고 사부상서 위종해(衞宗海)는 방금 전에 파면되어 상서자리가 비어 있지…….’

예부와 공부는 야홍릉에게 중요하지 않기에 당분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어서방의 참정은…….’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밤 허무준을 불러 들이거라.”

‘허무준을?’

한경백은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전하, 심한의가 추위에서 낙방한 일을 알아보셨습니까?”

“대충. 요즘 한기와 왕래를 했느냐?”

야홍릉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그와 친구 사이입니다. 어제도 함께 차를 마셨습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내리깔고 말했다.

“내일 밤 그를 저택에 초대하거라.”

한경백은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한(韓)씨 가문을 영입하고 싶으신 겁니까?”

“병부 대권은 예전에 정왕의 손에 있었지. 한 상서도 그의 말을 들었어야 했을 거야. 지금 야정연이 정직 상태이니 병부를 내 손으로 가져와야겠다.”

야홍릉이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백지에 이름을 하나하나 써넣었다. 그녀의 붓끝은 바둑판의 바둑이 된 것처럼 치밀하게 수를 두었다. 판이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전하. 궁에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고 집사가 밖에 서서 보고했다.

야홍릉은 고개를 들고 눈을 가늘게 떴다.

한경백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폐하께서 부르시는 걸까요?”

“아니. 태후나 황후가 보낸 사람일 거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태후나 황후?’

한경백은 미간을 찌푸렸다.

“3황자와 한씨 가문은 이미 망한 것과 다름이 없고 황후도 궁에 감금당해 황후 자리에서 쫓겨난 것과 나름이 없는데 사람을 보내다니요?”

“이상할 건 없지. 조금이라도 방법이 있다면 절대 이렇게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야홍릉이 말했다.

한경백은 눈빛이 흔들렸다.

“방법이요?”

‘황후에게 무슨 방법이 있겠어?’

“있을지도 모르지. 그게 착각일 수도 있지만.”

야홍릉은 말하며 붓을 내려놓고 명부책을 거두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궁에 다녀올 테니 볼일을 보거라.”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나 그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전하, 조심하십시오. 쥐도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황후가 이성을 잃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쥐도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야홍릉은 그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네 고모다.”

한경백은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는 저를 천뢰에 보내 한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지내게 하려는 것입니까?”

그는 한씨였지만 자신을 한씨 가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후도 그에게는 남과 마찬가지였다.

야홍릉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서재로 걸어갔다.

시월의 날씨는 좀 쌀쌀했다.

아직 겨울에 들어서지 않았지만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컸다. 한기를 담은 밤바람이 불어오자 야홍릉은 몸이 살짝 떨렸다.

홍릉원을 나선 그녀는 하얀색 옷을 입은 남자가 걸어오자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봉 공자, 바람을 쐬려고 나온 건가요?”

봉서오는 부채를 흔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 날씨는 바람을 쐬기엔 춥죠.”

봉서오의 목소리는 느긋하고 부드러워 듣기 좋았다.

“전 전하께 작별을 고하려고 온 것입니다.”

‘작별?’

야홍릉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남성국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아까까지 그런 말이 없다가 저녁이 되자 갑자기 남성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게 이상했다.

야홍릉은 남성국에서 긴급 소식이 전해온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일이 생기긴 했죠. 그래서 바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봉서오가 말했다.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세한 상황을 말해주기 기다리는 눈치였다.

하지만 봉서오는 일부로 그녀를 감질나게 하는 건지, 아니면 국가 기밀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인지, 야홍릉의 눈을 피하며 옅게 웃었다.

“전하, 지금 궁으로 들어가시는 겁니까? 저도 함께 가지요.”

야홍릉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가 그래도 손님인데 떠나기 전에 폐하께 인사를 드려야 하지요.”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저택을 나섰다.

봉서오는 그녀와 나란히 걷다가 고개를 돌렸다.

“공주 전하, 남성국에 무슨 긴급한 일이 생겼나 궁금하지 않습니까?”

야홍릉이 대답했다.

“얘기하고 싶으면 하세요.”

“방금 전에 등극한 새 황제가 사라졌습니다.”

봉서오는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가 무공이 뛰어나다는 것을 몰랐다면 전 폐하가 납치라도 당한 줄 알았을 것입니다.”

야홍릉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라졌다고요?”

“네.”

“언제요?”

“모릅니다. 보름 전일 수도 있고 방금 전일 수도 있고요.”

야홍릉은 봉서오의 아리송한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남성국은 목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이렇게 빨리 알 수 있다고요? 천리안이에요, 아니면 귀가 좋은 거예요?”

봉서오는 부채로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 육감이 뛰어납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주인님이 사라지셨으니 제가 얼른 돌아가 남성국의 강산을 지켜야지요. 그리고 이 틈에 제 세력을 키울 것입니다. 육 개월 안에 큰 권력을 독차지하면 더욱 좋고요.”

야홍릉이 물었다.

“권신이 되고 싶은 건가요?”

봉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인생의 목표는 남성국 제일의 권신이 되는 것입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꿈이 크네요.”

“저는 공주 전하께서 권신이 되면 죽임을 당할까 두렵지 않냐고 물으실 줄 알았습니다.”

야홍릉이 대답했다.

“권신이라고 다들 간신이 되는 건 아니지요. 종묘사직에 충성하고 황제에게 충성한다면 용수는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예요.”

“권신은 간신이 아니지만 권신이 된 뒤에 초심을 잃는다면 언젠가 간신이 될 게 아닙니까?”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니 알아서 가야지요.”

봉서오는 가볍게 웃었다.

“공주 전하는 역시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는 야홍릉이 ‘난 봉 공자가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거나 ‘헌원용수의 안목을 믿어요’라는 말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야홍릉은 그의 예상과 다른 말을 했다.

야홍릉이 말했다.

“인생은 한 치 앞날을 알 수 없고 사람 마음 또한 쉽게 변하지요. 저도 제가 어떤 사람이 될지도 모르는데 어찌 다른 사람이 평생 변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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