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마음을 정하다
보고 된 내용을 보아하니, 야천란은 봉왕부에 묵고 있는 듯했다.
등극 대전이 끝난 뒤, 여러 번이나 목국에 돌아가겠다고 했으나 동제의 황제 영린이 열정적으로 말려서 난처한 상황에 직면했다.
영린은 목국의 대황자를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고,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친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영린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야천란은 고민했지만 헌원용수도 그를 적극 잡으며 살뜰하게 대접하자 그도 매정하게 남성국을 떠날 수 없었다.
야천란은 당분간 목국에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헌원용수가 그를 쉽게 보낼 리 없기 때문이었다.
남성국의 상황을 제외하고도 용수는 그리움을 표하는 말들을 했다. 강하고 힘찬 필체에서 다정하고 애교스러운 말이 가득 적혀 있었다. 야홍릉은 그의 서신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편,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애틋한 기분?’
야홍릉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이런 강아지 같은 녀석에게 적응이 되었나 보군. 며칠이나 떨어져 있다고 벌써 보고 싶지?’
서신을 다 읽은 야홍릉은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용수의 필체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글씨에 담긴 난폭한 소유욕과 다정함을 느껴 보았다. 날카롭고 힘찬 글자를 보자 용수가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서신을 쓰는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는 잘생긴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 진지하나 서운한 듯 입을 삐죽 내밀고 있을 것 같았다.
야홍릉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풀어지며 마음이 간질거렸다.
‘이런 것을 그리움이라고 하나?’
야홍릉은 서신을 천천히 접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움의 느낌은 시큰하고 떫은 것 같기도 했지만 달콤한 것 같기도 했다.
* * *
구월 동안 제경은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신경이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
시월이 다가오자 이런 분위기는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강렬해졌다.
3황자가 제경에 끌려왔던 것이다.
적국과 내통한 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조정까지 끌려온 그는 문무 백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황제의 날카로운 질문과 대면했다.
야소숙이 직접 쓴 서신이 증거로 나오자 그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황제는 크게 화를 냈다. 야소숙은 겁을 먹은 나머지 제대로 변명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조아렸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두려움과 절망이 담겨있었다.
그의 표정과 행동을 본 황제와 대신들은 모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더 물어서 무엇 하겠는가?
작위를 빼앗고 서민으로 강등하며 형부의 심문을 기다리라는 성지가 내려지자 3황자는 바로 천뢰에 갇혔다.
3황자 쪽의 관리들이 사정을 했으나 그들 또한 바로 관직을 빼앗겼다.
황제는 적과 내통한 일에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상대가 친아들이어도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내각 대신 한 명, 상서 한 명, 시랑 두 명과 어서방의 참정(參政) 두 명의 관직을 파면하자 다른 사람들은 감히 야소숙의 편을 들지 못했다.
하나같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기 바빴다.
야소숙은 사색이 된 채로 끌려갔다.
변방의 전쟁터에서 육 개월 만에 돌아온 그는 이런 결과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떠나기 전, 야소숙은 차가운 눈빛으로 조정에 있는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야모침의 모습을 본 그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야모침, 네가 날 음해한 거지? 내가 죽는다고 네가 무사히 태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꿈 깨라 그래! 넌 그럴 자격이 없어. 없다고…….”
“한묵!”
황제는 화를 내며 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어두운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끌어 내거라!”
금위군 통령 한묵은 안으로 들어와 직접 야소숙의 어깨를 잡고 끌어내기 시작했다.
“한묵?”
야소숙은 시선을 돌리고 금군 통령복을 입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이 날카로워지더니 코웃음을 쳤다.
“한령의 직위도 잘린 것이냐? 좋아, 아주 좋아…… 정말 좋은 수를 뒀군…… 하하하…….”
‘내가 제경을 떠난 동안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난 거야? 난 왜 전혀 몰랐지? 부황이 이렇게 매정할 줄 알았다면 이렇게 순순히 잡혀오지 않는 건데.
아주…… 좋아. 부황은 날 대할 때도 이렇게 매정하구나.
이십 년 넘게 이어진 부자의 정이 결국에는 황권에 패하다니. 부부의 정이고 부자의 정이고 절대적인 권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정말…… 오랫동안 해왔던 계획의 끝이 초라하게 투옥되는 거라니. 어이가 없군.’
대전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야모침은 안색이 퍼레졌다. 그는 몇 번이나 말을 하려고 했지만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말았다.
몇 번이고 야모침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야소숙에게 그를 사지로 몬 사람은 야홍릉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사실 황제의 손에 들어간 비밀 서신 중 반수 이상은 야홍릉이 바친 것이었다.
‘야소숙, 원망하고 싶으면 제대로 해. 야홍릉과 야정연이 조례에 오지 않았다고 모든 화를 나한테 풀지 말라고.’
하지만 야모침은 이 말을 하지 못하고 꾹꾹 삼켰다.
황제의 안색이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때 괜히 말을 잘못한다면 부황이 그에게 화를 풀 게 분명했다.
쓸데없이 지금 화살을 자기가 받을 필요는 없었다.
황자들 중 현재 조정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며칠간 그는 조정에서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황제의 신경을 잘못 건드려 큰 화를 입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다른 대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숙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속으로 누가 최종적으로 태자가 될지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조정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 짐은 너무 힘들구려.”
황제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화를 억누르고 있는 듯 해보였다.
“짐이 많은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 이유가 다 태자자리 때문인 것 같더군. 그러니 아예 자네들의 소원대로 태자를 정하겠네.”
황제의 말에 대신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들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들은 무릎을 꿇었으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시선을 야모침에게 돌렸다.
‘대황자는 남성국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4황자는 요즘 상황이 좋지 않으며 3황자는 이제 막 서민으로 강등되어 천뢰로 갇혔지. 지금 무사히 조정에 서 있는 사람은 2황자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순간, 야모침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 같았다.
그는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웠지만 애써 침착한 척했다.
황제가 그의 기쁜 얼굴을 보고 생각을 바꿀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죽을죄?”
황제는 냉소를 하였다.
“경들은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걱정한 게 아닌가? 그건 목국 백성의 영광이요, 짐에 대한 관심인데 그게 어떻게 ‘죽을죄’겠나?”
대신들은 정신을 차리고 두려움에 떨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황제는 여전히 화난 얼굴로 대신들을 바라보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태자 후보를 정해 두었으니 때가 되면 세상에 알리겠노라.”
‘때가 되면? 언제 때가 되는 거지?’
대신들은 의아했지만 높게 외쳤다.
“폐하, 현명하십니다!”
“천란은 겸손하고 듬직하며 나랏일에 진심이었네. 이번에도 짐을 위해 남성국에 가서 걱정을 덜어주었지. 그는 분명 남성국과 좋은 관계를 맺을 것이네. 천란이 있다면 짐도 시름을 놓을 수 있지.”
고개를 숙인 야모침은 찬물을 맞은 것처럼 방금 전의 흥분이 확 가라앉은 기분이 들었다.
‘겸손하고 듬직하며 나랏일에 진심이라고? 그래서 부황의 마음속 태자는 야천란이라고?’
야모침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심장이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부황이 말씀하신 때가 언제지? 야천란이 남성국에서 돌아올 때?’
야모침은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같은 시각.
대신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좀 놀랍긴 했지만 그럴 만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대황자는 조정에 있을 때도 항상 듬직하고 조용하며 정무에만 힘썼다. 존재감은 크게 없었지만 대신들과 항상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정 대신들은 그가 권력에 큰 욕심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능력에 대한 찬사는 아까지 않았다. 또 그의 모친도 비 중 한 명으로 출신 또한 흠잡을 데 없었다.
사고만 치는 다른 세 황자와 비교했을 때, 우직한 대황자가 더욱 태자에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와 별개로 대전 안의 분위기는 아주 침울했다.
날카로운 공기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반대로 야홍릉의 공주부는 분위기가 홀가분하니 아주 좋았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정원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 있어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했다. 연못 중앙에 위치한 널따란 화청 안에서 야홍릉은 푹신한 탑에 기댄 채, 턱을 괴고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싸늘하던 그녀의 얼굴은 여유로움과 노곤함이 가득했다.
그녀는 졸고 있는 사자처럼 평소에 내뿜던 위험하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거두고 여유를 즐겼다.
그녀의 옆에는 빨간색 옷을 입은 소년이 붉은 탄자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술잔을 들고 야홍릉의 입가에 가져갔다. 유순한 얼굴의 소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술 좀 드세요.”
야홍릉은 술을 마시고 실눈을 떴다.
그녀의 얼굴은 미인의 아양을 즐기는 풍류스러운 공자 같았다.
“오늘 조례에서 폐하가 마음속으로 태자 후보를 정했다고 말씀하셨답니다. 대황자가 남성국에서 돌아오면 바로 태자를 임명하겠다고도 하셨고요.”
소년은 야홍릉에게 좀 더 다가들며 가는 손가락으로 백옥 술잔을 그녀의 입가로 가져갔다. 멀리서 보면 소년의 몸 전체가 야홍릉에게 기댄 것 같았다.
“폐하의 뜻은 명확했습니다. 대황자를 태자로 임명하겠다는 것이지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담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예상하던 결과이기에 놀랄 것이 없었다.
‘야천란이 돌아오면 태자로 임명한다고? 그럴 기회는 없을 거야. 야천란은 남성국에 아주 오래오래 있을 거니까.’
“3황자가 천뢰에 갇힌 뒤, 궁에 감금당한 황후가 몰래 궁인을 내보내 소식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8공주도 몰래 시녀를 태후궁에 보냈으나 태후는 요즘 장양후의 죽음으로 3황자와 한씨 가문의 일에 신경 쓸 기분이 없는 듯합니다.”
소년은 술잔을 내려놓더니 탁자 위의 과일 접시에 손을 뻗어 배 한 조각을 찍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야홍릉의 입가로 가져갔다.
“전하, 배 드십시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배를 먹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안에서 퍼지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태후가 아무 행동도 안 할 리가 없는데.”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참 침묵을 지킨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나…….”
소년은 입을 열기 어려운 듯, 한참이나 머뭇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