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딱딱 맞아떨어지다
야정연은 침묵을 지키다 싸늘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오.”
말을 마친 그는 정원 밖으로 나섰다.
계완월이 뒤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인생은 원래 좋은 일이 있나 하면 나쁜 일도 있는 법이잖아요?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야정연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것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하! 정왕 전하! 궁에서 금위군이 왔습니다!”
시위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했다.
‘금위군?’
야정연은 긴장한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금위군 옷을 입은 남자 몇 명이 걸어오더니 그에게 예를 올렸다.
야정연은 미간을 찌푸린 채,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또 무슨 일이냐?”
“폐하의 명으로 전하의 서재를 살펴보러 왔습니다.”
‘서재?’
야정연은 흠칫 놀라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서재를 살피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
“저희는 그저 명을 따를 뿐입니다.”
계완월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진정하며 미소를 지었다.
“부황께서 뭘 찾아보라고 했느냐?”
야정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수색만 하러 온 것이라면 괜찮았다.
그의 서재에 이상한 물건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가는데다가, 야정연은 이미 쥐도 새도 모르게 야홍릉에게 호되게 당하는 바람에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명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야정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담담하게 말했다.
“부황의 뜻이니 따라야지.”
금위군이 허리를 숙이고 ‘실례합니다’라고 말한 뒤,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서재로 들어섰다.
야정연은 그들을 따라서 서재까지 간 뒤,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 서 있었다.
금위군들도 서재를 함부로 뒤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재와 병풍 뒤를 살펴보고 이것저것 두드려 보았다. 뭔가를 찾는 듯했다.
야정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대체 뭘 찾는 것이냐?”
금위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재를 곳곳마다 살펴보았다.
이때, 금위군 수령이 서재에 튀어나온 어떤 부분을 누르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야정연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얼음처럼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금위군들은 서로 얼굴을 보면서 시선을 주고받았다. 금위군 수령은 몸을 돌려 야정연에게 허리를 숙였다.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야정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있었다.
금위군들은 더 이상 서재를 수색하지 않고 곧 떠나갔다.
야정연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는 금위군들이 왜 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커다란 책장 앞으로 온 야정연은 세 번째 층의 책을 모두 옮기고 책장을 바라보았다. 비싼 홍목으로 짠 책장은 무늬 하나하나가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야정연은 한참 바라보다 손을 내밀어 책장을 쓰다듬었다.
책장은 돌출된 부분 없이 매끈하기만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불안한 느낌이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방금 전의 그 소리는 뭐였지? 내 서재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숨어 있는 건가?’
“대인.”
계완월이 걸어오더니 책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책장이 왜요?”
야정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책장을 한참이나 바라본 뒤, 다시 책을 올려놓았다.
“이제 나도 몸을 사려야 할 것 같소.”
“대인? 방금 전의 금위군들은…….”
계완월은 깜짝 놀랐다.
야정연은 책을 책장에 올려놓은 뒤, 돌아서서 창가에 섰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함정에 빠진 기분이 드오. 앞길도 막혀 있고 돌아갈 길도 잃은 채, 알 수 없는 위험에 빠져 허덕이고 있소. 그러니 당분간은 몸을 사리면서 상황을 파악하는 게 좋을 것 같구려.”
계완월은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집에서 남편을 섬길 줄이나 알지 조정의 권모술수에 대해 알 리 없었다. 하지만 야정연의 말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야정연에게 지금 어려움이 생겼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챌 수 있었다.
이 어려움은 금방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야정연이 아무리 똑똑하고 총명해도 당분간은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계완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요즘 정무를 보느라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잖아요? 이참에 휴가 받았다 생각하시고 푹 쉬시는 게 어때요? 시간이 지나면 다 좋아질 거예요.”
‘다 좋아진다고?’
야정연은 코웃음을 쳤다. 그도 앞날을 확신할 수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는 곧 그 생각을 지웠다.
눈을 감은 야정연은 창밖의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았다.
‘난 반드시 황위에 오를 것이다. 누구라도 내 앞길을 막지 못해! 그게 야홍릉이라 할지라도!’
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야정연만이 아니었다.
* * *
선왕부.
야모침은 비단 장포를 입은 채 회랑 앞에 앉아 호수에 물고기 먹이를 뿌리고 있었다. 비단 잉어들이 먹이를 먹으려고 모여드는 모습을 보는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람과 동물은 다 같아. 본능적으로 이익을 따르게 되어 있거든. 원하는 것을 가지려고 몰려들지.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동물은 그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아도 강한 자가 왕이 되지. 그러나 사람은 온갖 수를 쓰고 머리를 굴려가며 그 자리에 오르려고 애를 쓰지.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
그의 옆에 서 있던 초운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지금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야모침이 말했다.
“내가 누구를 얘기하는지 모르겠느냐?”
“제가 아둔하여…….”
“나도 내가 누구를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나도 너처럼 아둔한 거지.”
“…….”
야모침은 한숨을 내쉬고 또 물고기 먹이를 던졌다.
“매씨 가문의 일로 기세가 한풀 꺾였지만 정왕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최악은 아닌 편이야. 그런데도 기분이 찜찜하단 말이지.”
옆에 서 있던 초운하가 물었다.
“매 대인을 구하고 싶으신 겁니까?”
“구한다고?”
야모침은 고개를 들고 그를 흘겨보았다.
“구하고 싶긴 하지. 하지만 어디 구할 수나 있겠느냐? 다들 집안 허물은 덮기 바쁘다던데 매현령 그 멍청이는 아주 동네방네 다 떠들어댔잖느냐. 그 녀석 때문에 목국에는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녀석의 아버지는 문관이라 이런 일이 한 번 터지면 명예가 크게 실추되지. 실추된 명예를 어떻게 돌이키겠느냐?”
초운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매현령이 저지른 사고를 떠올리자 그도 한숨이 나왔다.
명예 같은 것은 쌓아올리는 데는 평생의 시간이 들지만 무너지는 데는 한순간이면 족했다.
“이 일이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야모침은 물고기 먹이를 호수에 와르르 쏟아 넣고 손을 털었다.
“이 일이 야홍릉과는 연관 있지 않을까?”
초운하는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 호국 공주는 그곳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게 뭐가 중요하지?”
야모침은 그를 흘겨보더니 회랑 안을 천천히 걸었다.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공주가 측부를 위해 저택에서 생일 연회를 열었다? 걔가 언제 그렇게 한가한 걸 봤느냐? 언제 그렇게 측부를 아꼈다고.”
초운하는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처음에는 나도 이게 우연이라고 생각했지. 매현령이 공주부에서 쓸데없이 도발해서 감진과 다툰 거라고.”
야모침은 말을 하다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생일 연회가 끝난 뒤, 매씨 가문에 일이 생기고 연회의 손님은 독에 당했으며 숭준은 죽었다. 그리고 야정연은 범인으로 몰렸고…… 중독 사건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만 야홍릉은 정말 완벽한 수를 뒀어.”
한 번도 음모를 꾸며 사람을 해친 적 없던 야홍릉이었다.
이번 반격을 보며 그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생일 연회 한 번으로 몇 명을 해친 거야?’
“전하, 어찌하실 계획입니까?”
‘계획?’
“난 사실 황제가 될 만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권력이라는 게 너무나 혹할 만한 것이어서 포기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그들과 한번 겨루어 본 것이다.”
야모침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같은 황자로서 출신과 신분이 같으니,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지는 게 싫었다. 누가 자신의 형제에게 무릎 꿇는 것을 원하겠는가?
누군들 수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백성들의 생사를 움켜쥔 그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겠는가?
초운하는 한참이나 침묵에 잠겨 있었다.
야모침의 말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야홍릉의 계획이라는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만약 이번 일이 호국 공주께서 꾸민 일이라고 한다면 목적이 무엇일까요?”
“목적?”
야모침은 코웃음을 쳤다.
“목적이라고 할 게 뭐가 있겠느냐? 휘하의 장군 넷 때문에 보복을 하려는 거지. 이건 별로 놀라울 것이 못된다. 야홍릉은 꿍꿍이가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도 아니지. 자신의 사람이 억울하게 당했으니 반격을 하려는 거지.”
야모침은 야홍릉이 이런 방식으로 반격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이런 방식은 평소 야홍릉의 처사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호국 공주가 다른 목적으로 이렇게 행동했을 거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다른 목적?”
야모침은 고개를 돌리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초운하를 바라보았다.
“장군들의 복수를 해주는 것 말고 다른 목적이 뭐가 있겠어?”
초운하가 대답했다.
“생일 연회에서 매현령이 먼저 예의 없이 군 것은 맞지만 감진이 하는 말을 들으니 미리 준비한 것 같았습니다. 마치 매씨 가문의 추문을 떠들 기회를 노리고 있은 것처럼요.”
“그게 뭐? 감진은 빙란각의 제일 미인이자 사장인데 다른 사람의 치부를 많이 알고 있을 수도 있지. 그러게 누가 너희더러 그를 건드리래?”
야모침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초운하는 안색이 변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저희가 먼저 잘못한 게 맞습니다. 하지만 매현령이 그 얘기를 듣고 떠나려고 할 때에는 누구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으나 제가 쫓아가려고 하자 감진이 절 막았습니다. 공주부의 시위도 떠나지 못하게 막았고요. 만약 제가 쫓아 나갔다면 매현령이 충동적으로 가문의 치부를 떠드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야모침은 침묵에 잠겼다.
이러고 보니 감진이 일부러 매현령을 화나게 해서 매현령이 화난 나머지 부친의 외실을 찾아간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았다면 일이 이렇게 커졌을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공주부의 시위가 초운하를 막았다는 것을 보면 야홍릉도 이 일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감진이 어떻게 공주부의 시위를 움직일 수 있었겠는가?
매현령이 떠난 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부용향에 당해 기절했다.
그래서 그는 외부의 소식을 알고도 제때에 해결할 수 없었다. 또 때마침 정원에서 이 일이 일어났을 때, 공주부의 측부인 매현근은 다른 두 측부에게 끌려 비무장으로 갔다.
이 모든 것이 계획적인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