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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10)화 (21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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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화 살인 동기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고 새하얀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전생에 그녀는 말고삐와 검을 들고 나라를 지키던 손으로 이번 생에는 조정을 뒤엎고 황위에 오르려고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누가 나를 막든 반드시 죽일 거야.’

“전하.”

고 집사가 다가와 보고했다.

“정왕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봉서오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화청으로 모시고 차를 올리거라.”

“네.”

“정왕이 찾아온 것을 보니 뭔가를 눈치챈 듯합니다.”

봉서오는 난간에 기댄 채, 야홍릉을 돌아보며 말했다.

“공주 전하, 대응할 방법이 있습니까?”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봉 공자, 많이 심심한가 봅니다?”

봉서오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남성국에서 온 사신이 궁에 들어가 폐하와 양국 통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지 않고 왜 제 저택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양국 통혼이 무슨 대수입니까? 떠나기 전, 저희 폐하께서 공주 전하가 털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저와 9황자는 돌아가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통혼보다 공주 전하의 머리카락 하나가 더 중요합니다.”

봉서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공주 전하.”

밖에서 시위가 급히 뛰어왔다. 그는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네 장군이 천뢰에서 풀러나셨습니다. 지금 공주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들어오라고 할까요?”

봉서오는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폐하가 너무 멍청하지는 않네요.”

야홍릉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시위에게 말했다.

“그들더러 먼저 집으로 돌아가 씻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하거라. 저녁에 저택에서 연회를 열겠으니 그때 다시 오라고 하고.”

“네, 알겠습니다.”

시위가 말을 전하러 자리를 떴다.

야홍릉은 회랑에서 내려왔다. 네 장군이 풀려난 일에 대해 그녀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그들이 억울하다는 것을 안 이상, 가두어둘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목국의 상황은 아주 혼란스러웠다. 황제는 능력이 있는 야홍릉의 조력이 아주 필요했다. 남성국과의 통혼에서도 문제가 생기면 안 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금국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남성국에게 밉보인다면 목국의 처지가 더욱 어려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는데 공주 전하는 여인이면서 왜 황위에 오르고 싶으신 겁니까?”

봉서오는 그녀의 뒤를 따르며 한담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폐하의 목적은 역대 최초의 여황제가 되어 남자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관례를 깨뜨리고 남녀평등을 이루려는 것입니까?”

“그렇게 위대한 생각을 가진 적은 없어요. 그저 제가 사내들이 하는 일과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죠. 황실에서 태어났고 저도 같은 황제의 자식이니 그들이 꿈꾸는 걸 저도 꿈꿔도 되지 않을까요? 어쩌면 전 그들보다 더 잘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자신을 사내로 생각한 건가?’

봉서오는 경악했다.

‘그래서 남자들이 첩실을 들이는 것을 보고 공주도 측부를 여러 명 들인 건가?’

“공주 전하가 스스로를 사내라고 생각하신다면 저희 폐하는 어떡합니까?”

야홍릉이 평온하게 대답했다.

“헌원용수는 저와 뜨겁게 단수의 정을 나누는 것도 좋다고 했습니다.”

“…….”

‘뜨, 뜨거운 단수의 정? 헌신도 짝이 있다더니. 그래, 야홍릉 같은 여인을 좋아하는 남자가 어찌 일반인이겠어? 혹시 폐하는 남성국 세가의 여식들이 너무 똑같다고 생각하셔서 야홍릉처럼 특별한 여인에게 마음을 둔 것인가?’

그들은 곧 화청에 도착했다.

봉서오는 하던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화청에서 차를 마시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야정연은 인물도 멀끔하고 키도 훤칠하며 귀티를 풍기는 데다 차분하고 똑똑했다.

하늘이 선택한 자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자였다.

미인들만 놓고 보면 각자 다른 매력을 풍기기에 보는 눈에 따라 선호하는 미인이 다른 법이다.

그러나 남자들은 달랐다. 신분이 높을수록, 기세가 강할수록, 능력이 뛰어날수록 제왕의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눈이 멀지 않은 한, 누가 더 훌륭한지는 충분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헌원용수만 해도 그랬다.

남성국의 새 황제는 태자 자리를 다투는 야정연과 천지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외모도 더욱 잘생겼고 기세도 더 강하고 문무 실력 또한 더 뛰어났다.

글을 쓰는 능력이나 무공 책략 모든 면에서 헌원용수는 야정연보다 훨씬 강했다.

야홍릉이 지금처럼 실력이 강한 여인이 아니라 연약한 여인이라고 해도 용수는 얼마든지 그녀를 목국 여 황제의 자리에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야정연과 헌원용수는 비교할 가치가 없었다.

봉서오는 이런 생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매가 하는 대화에 외부인인 그는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심심한 나머지 속으로 용수와 야정연을 비교한 것이다.

야정연은 야홍릉을 본 순간, 직설적으로 물었다.

“네 옆에는 항상 소년 영위가 따라다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 아이는 왜 보이지 않느냐?”

봉서오는 흠칫 놀랐다.

‘소년 영위?’

그는 용수가 남성국을 떠난 십 년 동안 뭘 했는지 잘 알지 못했지만 야정연이 말한 소년 영위가 헌원용수일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영위이니 사람들 앞에 모습을 잘 드러낼 일이 없지요.”

야홍릉은 담담하게 대꾸하며 야정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야정연이 말했다.

“예전에 왔을 때는 그 영위가 없었던 적이 없는데.”

처음에 그는 소년 영위가 신은전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소년 영위에게서 강한 무공 실력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귀족 가문에서는 실력이 뛰어난 암위를 데리고 있는 게 아주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숭준에게서 들은 뒤에야 그 소년이 신은전 출신 영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야정연은 지난번에 보았던 소년이 바로 그 영위일 거라 생각했다.

“그럼 지난번에 오셨을 때, 그 친구의 얼굴을 보셨나요?”

야홍릉이 물었다.

그러자 야정연은 말문이 막혔다.

얼굴을 본 적은 없으나 목소리는 들은 적이 있었다.

야홍릉과 꼭 닮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야정연은 차를 마시고 화제를 돌렸다.

“너에게 물어볼 게 있단다.”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고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말씀하세요.”

“숭준의 죽음이 너와 연관이 있느냐?”

야홍릉이 대답했다.

“오라버니, 지금 발을 빼려고 이러는 건가요?”

야정연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발을 뺄 게 뭐가 있겠느냐.”

“그렇다면 형부와 대리시가 알아서 할 일인 것을, 오라버니는 왜 갑자기 저한테 오셔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죠? 무슨 신분으로 이러시는 건가요?”

야홍릉이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부를 대신해 묻는 것입니까? 아니면 죄인의 신분으로 묻는 것입니까?”

야정연의 안색이 퍼렇게 변했다.

“내 말뜻을 알아들었을 텐데.”

봉서오는 새하얀 옷을 입은 채, 옆에 앉아 느긋한 얼굴로 차를 마시며 가끔씩 부채를 흔들었다. 한적한 귀공자 같은 그의 모습은 초조한 얼굴의 야정연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네, 알아들었어요. 그러나 오라버니도 뭘 했는지 알고 계시잖아요.”

야홍릉이 말했다.

“다른 사람을 해치려던 사람은 결국 당하게 되어 있어요. 오라버니도 멍청한 사람이 아니니 제 말을 알아들었을 거라고 믿어요.”

야정연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지금 네가 한 짓이라는 걸 인정한 것이냐?”

야홍릉이 대답했다.

“그런 적은 없어요.”

야정연은 야홍릉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야홍릉은 변함없는 얼굴로 찻잔을 두드렸다. 한결같이 담담한 표정이었다.

“원하는 게 뭐지?”

야홍릉이 대답했다.

“제가 뭘 원하든 오라버니가 신경 쓸 일은 아니죠.”

야정연은 계속해서 캐물었다.

“황위를 원해?”

“그러면 안되나요?”

짧은 한마디에 야정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문 채,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서 자릉이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니다?”

야홍릉은 입꼬리를 올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도 똑똑하지는 않네요.”

야정연은 실눈을 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야자릉은 한옥금에게서 들었잖아요. 한옥금이 제 속마음을 어떻게 알겠어요? 제가 얘기해 줬으니 아는 거겠죠.”

야홍릉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야정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야홍릉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홍릉이는 한옥금을 좋아했지. 그러니 속마음도 한옥금에게 알렸을 거야…… 아니, 아니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반역을 꿈꾼다는 얘기를 할 리가 없잖아. 한씨 가문은 야소숙을 지지하고 한옥금 역시 야소숙 때문에 야홍릉에게 접근한 거였고.’

야정연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릉이는 도화산에서 야홍릉이 황위를 노린다고 했어. 그런데 그때 홍릉이는 이미 한옥금과 사이가 틀어진 뒤였어. 야홍릉은 상처가 나은 뒤, 천뢰에 한 번 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천뢰에서 한옥금에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한 건가?

왜? 둘은 이미 사이가 틀어졌는데 그런 얘기를 왜 한 거지? 한옥금이 다른 사람에게 누설할까 두렵지 않았나?

아니지, 한옥금은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했지. 그게 아니라면 자릉이가 알고 있을 리 없잖아. 자릉이가 말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은 야홍릉이 이런 생각을 하는 줄 어떻게 알겠어?

그러나 그런 사달이 났는데도 부황은 야홍릉을 믿기로 하셨어. 오히려 자릉이가 감금되었고 한씨 가문도 야홍릉 때문에 벌을 받았지. 한 어사와 한령이 모두 파직되고…….’

야정연은 생각을 거듭할수록 경악했다.

‘그래서 이 모든 게 다 야홍릉의 계획이라고? 한옥금에게 자신의 야심을 얘기한 것은 한옥금이 다른 사람에게 말해 소문이 나도록 유도한 건가? 그래서 다들 한옥금이 야홍릉에게 말도 안 되는 죄명을 씌운다고 여기게? 여태까지 여자가 황위에 오른 적이 없으니 다른 사람들도 야홍릉이 그런 마음을 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지.

결국 모든 게 다 야홍릉 뜻대로 흘러갔잖아.

자릉이는 멍청하고 성질이 급해 이걸 알자마자 다 떠들어버렸어. 그날 도화산에 귀족 자제들이 모두 그녀가 야홍릉을 능멸하는 말을 들었고 이 일은 부황의 귀에까지 전해졌지. 그래서 결국 야자릉과 한씨 가문만 벌을 받았잖아.’

야정연은 입을 떡 벌린 채, 그의 앞에서 담담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십칠 년가량 봐온 동생이 낯설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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