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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09)화 (21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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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화 일석이조

황제는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허, 내가 참 훌륭한 아들을 뒀군. 하나같이 속 차리기만 바쁘고. 내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까 봐? 다들 황위가 탐나서 그러는 거잖아? 선왕은 그렇다 치자. 겉보기엔 똑똑해 보여도 사실 멍청하기 짝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면서도 모를 정도니.’

황제는 원래 야정연이 똑똑하고 침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숭준과 손을 잡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황위에 오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군. 대신들을 꼬드겨 조정에서 선왕을 태자 자리에 추천하고 뒤에서는 숭준을 이용해 선왕을 음해하려고 하고. 그리고 홍릉이 휘하의 두 장군까지 단번에 제거할 생각을 하다니…… 아주 일석이조로 좋은 방법이군.’

“폐하, 어제 손평을 보내 부용향의 해독약을 가져간 일 말이에요.”

황제는 정신을 차리고 태후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제 홍릉이의 저택에서 측부 생일 연회가 열렸는데 손님 중 세 명이 부용향의 독에 당했습니다. 아직 독을 탄 사람은 밝혀지지 않았고요.”

“그게 누군지 알 것 같네요.”

황제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어마마마, 알고 계십니까?”

“네. 독을 탄 사람은 숭준일 겁니다. 하지만 지시한 사람은 정왕이 틀림없어요. 야홍릉을 해치려는 목적이지요. 그리고 숭준이 이 비밀을 누설할까 두려워 죽인 거고요.”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모든 게 어마마마의 추측 아닙니까?”

“물론 아니지요. 부용향은 정왕과 숭준에게만 있는데 다른 사람이라면 어디서 부용향을 구해 왔겠어요?”

태후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머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왕의 손에 부용향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삼 년 전 정왕과 정왕비가 혼인할 때 정왕부에는 아리따운 통방 하녀가 있었는데, 당시 계완월이 왕비가 되는 것을 질투해 그녀에게 독을 탔다.

그 독은 아주 강렬한 맹독이었어서 중독된 사람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해독하는 과정도 아주 힘들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정왕에게 부용향을 하사했다. 부용향은 사람을 가사 상태에 이르게 만들어 잠깐동안 통증을 못 느끼게 할 수 있었다. 태의가 정왕비의 독을 다 치료한 뒤에 정왕비는 사흘을 내리 푹 자고 깨어날 수 있었다.

원체 몸이 약했던 그녀는 오랫동안 요양한 뒤에야 건강을 회복했다.

‘그러나 숭준은 왜…….’

“얼마 전에 숭준이 야홍릉에게 밉보여서 손목이 부러진 일이 있었잖아요? 나도 그게 안쓰러워서 부용향을 좀 주었지요. 저녁에 그걸 먹으면 통증 없이 잠을 푹 잘 수 있으니 말이에요. 이튿날 아침에는 해독약을 먹으면 깨어나니 진통제로 쓰라고요.”

황제는 잠깐 침묵을 지켰다.

“숭준이 어제 공주부에 간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정말 숭준이 독을 탔다는 말인가?’

“하지만 독을 타는 방식으로 홍릉이를 음해하려고 했다는 것은…… 넷째답지 않은 행위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니긴요? 독을 탄 사람은 찾아내기 어렵지 않나요? 그러면 결국 이 누명은 홍릉이가 쓰게 되어 있지요. 손님들이 공주부에서 독에 당했는데 홍릉이가 책임지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그러니 야정연이 숭준을 지시해 독을 타고 숭준이 비밀을 누설할까 두려워 죽였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럴듯하긴 했다. 게다가 부용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정왕과 숭준 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뭔가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억지스럽게 느껴져도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이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황제는 찻잔을 들고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한참 앉아 있다가 말했다.

“아무래도 이제는 태자를 세울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태자를 세워?’

태후는 멈칫하더니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후궁은 정무에 간섭하지 말아야지요. 이 어미도 예외는 아닙니다. 태자를 세우는 일은 폐하가 알아서 하세요.”

태후 입장에서 야소숙은 태자가 되기에 이미 물 건너갔으니 다른 황자들 중 누가 태자가 되든 상관이 없었다.

황제가 아직 한창이라 태자를 세운다고 해도 바로 자리를 물려줄 예정은 아닐 것이다.

새 황제가 등극할 때면 그녀는 이미 죽은 다음일 텐데, 그리 먼 일을 생각할 겨를이 있겠는가?

“천란이가 남성국에서 돌아오면 전 이 일을 발표하겠습니다.”

황제는 다 마신 찻잔을 옆으로 밀었다.

“전 이만 볼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모후도 심려하지 마시고 푹 쉬십시오.”

태후는 손을 내젓고 눈을 감았다.

“절 신경 쓰지 말고 가 보세요. 이 어미는 괜찮으니.”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담담하게 지시를 내렸다.

“모후께서 슬퍼하시지 않도록 잘 모시거라.”

궁인들을 고개를 숙이고 대답한 뒤, 황제가 떠날 때까지 배웅했다.

그리고 다시 태후의 궁으로 돌아왔다.

자안궁을 나선 황제는 손평에게 무덤덤한 말투로 물었다.

“손평,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손평은 태후와 황제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지만 하는 얘기를 다 듣고 있었다.

황제의 질문을 들은 그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말하라.”

“네.”

손평이 입을 열었다.

“태후께서는 3황자를 좋아하시기는 했지만 선왕과 정왕 전하도 똑같이 아끼셨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누명을 씌울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태후의 생각이 정확하다는 것이냐?”

“전 그 뜻이 아닙니다. 태후마마께서 현장에 계시지 않으셨으니 그 추론이 꼭 정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평은 목소리를 깔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왕과 선왕은 그전까지 7공주를 끌어들이려고 애썼는데 지금은 동시에 7공주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 착각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당연히 착각이 아니지. 예전에 잘 보이려고 애썼던 것은 홍릉이에게 병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홍릉이를 제거하려는 건 홍릉이가 같은 편이 되어주지 않으니 그런 것이지. 그리고…….”

황제는 수심이 드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자릉이의 말도 어느 정도 작용을 일으켰을 수도 있고.”

‘야홍릉이 반역을 꾀한다는 말을 둘째와 넷째가 진지하게 받아들였나? 그래서 둘이 홍릉이를 제거하려고 한 건가?’

손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제의 뒤를 따랐다.

“신은전 대교습을 어서방으로 부르거라. 형부나 대리시보다 신은전의 정보가 더 믿음직하지.”

그리고 숭준이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 알아본다 쳐도 신은전에 물어보는 게 빨랐다.

* * *

야정연은 왕부로 돌아가는 마차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서리가 낀 것처럼 표정이 좋지 못했다. 장양후의 일은 생각할수록 이상하기만 했다.

‘도대체 누가 나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운 거지? 나도 눈치채지 못하게 내 허리춤의 옥패를 가져가고 장양후부에 몰래 잠입해 흔적 없이 사람을 죽였다고?’

옥패를 제외하고 증거로 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실력의 사람은 제경에서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순간 누군가 떠오른 야정연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외실 한 명으로 매씨 가문을 끌어내고 야모침의 날개 한쪽을 꺾은 뒤, 부용향으로 숭준에게 누명을 씌워 야정연의 발목을 잡았구나…….”

* * *

봉서오는 부채를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감탄 어린 눈빛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감 공자의 생일 연회로 멋진 반격을 하셨네요.”

야홍릉은 회랑 앞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차분하기만 했다.

“이 정도로 야정연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요? 이번 계획은 완벽해 보이나 잘 살펴보면 허점이 많습니다.”

봉서오가 말했다.

“야정연을 이렇게 빨리 보내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독을 탄 사건과 숭준의 죽음은 부용향과 옥패만으로는 그를 범인으로 몰기 힘듭니다. 그러나 시간을 끌 수 있지요. 부황이 오늘 조례에서 직접 명령하셨어요.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정왕은 조정 업무에 복귀할 수 없다고요.”

숭준은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야홍릉을 해치려 했으니 죽음의 결말을 맞이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야정연은 이렇게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야홍릉도 그를 빨리 제거할 생각이 없었다.

신은전 대교습이 도와주고 있으니 야정연을 제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야소숙은 이제 막 힘을 잃은 데다 야정연까지 끌어내린다면 조정 상황이 또 어지러울 게 분명했다.

황제에게 아들이 몇 없는데 하나같이 세력을 잃고 무너진다면 결국 황자는 한두 명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누가 차기 태자가 될지 뻔한 일인데 조정 대신들도 다 빌붙을 게 아닌가? 그렇게 되면 그녀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앞날에 비단을 깔아준 셈이 될 것이었다.

야홍릉은 입꼬리를 올리고 냉소를 띠며 말했다.

“야정연이 어젯밤 장양후부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고 해도 옥패를 잃어버린 것에는 뭐라고 말을 하지 못할 거예요. 게다가 그는 그 누구보다 숭준을 죽일 동기가 확실하죠. 태후는 분명 그가 숭준을 죽여서 입을 막으려고 했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러니 결과적으로 야정연의 결백이 밝혀질지 말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와 숭준이 거래했던 게 밝혀지면 황제는 야정연의 야심과 갖은 수단으로 여동생을 해치려고 했던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거야말로 야홍릉이 바라는 것이었다.

황자가 조정에서 책임진 정무는 그가 조정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근본이었다.

직무와 권력을 빼앗긴다면 다시 되찾기 어려웠다.

야홍릉 때문에 야정연은 지금 대권을 빼앗기게 되었다.

다시 직무를 회복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봉서오는 침묵을 지키다 옅게 미소를 지었다.

“확실한 살인 증거와 밝힐 수 없는 진실이 더해지면 아무리 허점투성이인 사건도 완벽해 보이는 거지요. 야정연은 황제가 가장 신경 쓰는 역린을 건드린 것입니다…… 공주 전하, 저도 전하의 깊은 생각에 겁이 나는데요.”

아무리 총애를 받던 황자도 황제의 미움을 받게 된다면 그 황자의 앞날은 끝이 나는 것이었다. 개인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소용없었다.

야소숙은 전까지 가장 눈에 띄는 황자이자 가장 유력한 태자 후보였다.

한씨 가문 역시 엄청난 권력을 가진 세가였으나 결말이 어떻게 되었던가?

야홍릉은 남을 음해할 줄 모르는 게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선한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선한 보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전생에 그녀는 칠 년 동안이나 변방에서 모래바람과 싸우며 수차례 부상을 당했지만 결국 다른 사람의 고마움이나 너그러운 포옹이 아닌 잔혹한 음해를 맞이했다.

야홍릉은 부처를 믿지 않았다. 또 원수를 사랑할 생각도 없었다. 전생의 교훈은 그녀에게 커다란 권력과 강대한 실력을 가져야만 못된 마음을 품은 자들을 모조리 짓밟을 수 있다는 이치를 가르쳐 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아무리 미워하고 증오하며 죽이고 싶어 해도 절대적인 실력과 강한 권력 앞에서는 고분고분하게 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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