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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208)화 (20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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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화 증거가 명확하다

황자가 태후의 남첩 따위와 사이가 좋다는 말에 사람들은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상한 말이었다.

야정연은 표정이 변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가 장양후와 사이가 좋다고요? 둘째 형님 스스로를 두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까?”

야모침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형으로서 네가 장양후를 죽였을 리 없다고 말하는 건데 잘못된 것이냐?”

야정연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고항. 다른 단서는 나온 게 없느냐?”

황제가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양후부에는 다른 이상이 없었습니다. 장양후는 침실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제가 사람들과 함께 조사하러 갔을 때, 바닥에 쓰러진 시녀 몇 명만 있을 뿐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후부의 시위에게 물어본 결과, 어젯밤 후부에 온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시위가 증언하길, 장양후가 요즘…… 부쩍 정왕과 가깝게 지낸다고 했습니다.”

그는 망설이며 입을 열었지만 그가 한 말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었다.

야정연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황제는 곧 폭발할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창.”

정창이 앞으로 나오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폐하.”

“장양후가 살해당한 사건은 형부가 전담하도록. 대리시는 형부에 협조하여 조사하라.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면 그 누구라도 반드시 수사에 협조하거라. 넷째야.”

황제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네.”

야정연은 고개를 숙였다.

“숭준은 네가 죽였느냐?”

“저는 그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야정연이 말했다.

“난 그저 ‘네’, ‘아니오’로만 듣고 싶구나.”

“……아닙니다.”

“하지만 장양후가 네 옥패를 들고 있지 않느냐? 증거가 명확한데 나더러 어찌 네 결백을 믿으라는 것이냐?”

야정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가 방법을 대서 결백을 입증하겠습니다.”

“네게 기회를 주마. 오늘부터 넌 책임진 일을 모두 내려놓고 정 상서의 수사에 협조하여라. 날 설득할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진실이 밝혀지는 대로 조정 업무에 복귀하거라.”

황제의 말을 들은 야정연은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 실권을 앗아가겠다는 건가?’

야모침은 입꼬리를 올렸다. 매씨 가문의 일로 우울하던 기분이 드디어 풀렸던 것이다.

황제는 손에 옥패를 든 채, 밖으로 나갔다.

“다들 이만 나가 보아라!”

대신들은 무릎을 꿇고 황제가 떠나기를 기다렸다.

고개를 숙인 그들은 표정이 모두 어두웠다.

며칠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졌다. 어제는 누군가 호국 공주부에서 독을 탔다. 독을 탄 사람을 잡지도 못했는데 장양후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또한 3황자가 적국과 내통한 것을 포함하여 나 장군과 봉 장군을 포함한 장군 네 명이 천뢰에 갇힌 일, 황후가 총애를 잃고 한씨 가문이 몰락한 일까지 떠올리자 사람들은 마음이 가벼울 수가 없었다.

‘이번 가을은 일이 많겠군.’

“전하.”

정왕 쪽의 신하가 다가오더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장양후의 죽음 말입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네. 누군가 날 음해하는 것이야.”

야정연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것도 아주 조잡한 방법으로 날 음해하려 들다니. 절대 성공하지 못할 것이네.”

신하는 그의 말을 듣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가 하신 게 아니라면 문제가 될 건 없을 것입니다.”

야정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에 잠겼다. 그의 표정은 아주 어두웠다.

‘내가 한 것만 아니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신하의 말은 곧 틀린 것으로 밝혀지고 말았다.

그가 저지른 일이 아니었지만 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숭준의 죽음을 전해 들은 태후가 이를 두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장양후는 태후의 총애를 오랫동안 받던 사람이었다. 제왕이자 아들인 황제는 태후가 남첩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감아 줄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다른 사람들보다 생각이 좀 열린 편이었다. 역대 황제들 중 딸에게 측부를 보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그래서 태후가 남첩을 곁에 두는 것도, 공주부에서 측부를 들이는 것도 그에게는 별일이 아니었다.

태후가 총애하는 남첩이 살해당했다는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황제는 장양후의 사망 소식을 숨기고 싶었다. 태후가 슬퍼할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숨길 수 없었다. 조례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안궁에 소식이 전해졌다. 태후는 화난 나머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태의 덕분에 태후는 곧 깨어날 수 있었다.

태후는 눈을 뜨자마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숭준을 죽인 것이냐? 선왕? 아니면 정왕?”

자안궁에 도착한 황제는 이 말을 듣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바로 태후의 침대 앞에 가서 앉았다.

“모후, 옥체를 보존하셔야지요. 너무 슬퍼하시면 안 됩니다.”

태후는 창백한 얼굴로 이를 악물고 말했다.

“도대체 누가 숭준을 죽였답니까?”

“모후, 고정하십시오. 제가 형부와 대리시를 시켜 알아보게 했으니 곧 진범이 잡힐 것입니다.”

황제는 말을 마친 뒤,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런데 모후는 왜 선왕 아니면 정왕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까?”

태후가 서슬 푸른 눈빛으로 말했다.

“분명 둘 중 한 명이 저지른 일일 겁니다. 그들이 직접 한 게 아니라고 해도 다른 사람을 파견한 게 분명해요. 폐하, 부디 진범을 잡아 주세요.”

‘진범을 잡으라고?’

황제는 침묵에 잠겼다.

‘정말 둘째나 넷째가 저지른 일이라면 한낱 남첩 때문에 내 아들을 죽이기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그건 말도 안 돼.’

하지만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는 해야 했다. 누가 숭준을 죽인 것이든 살인의 이유를 알아내는 게 중요했다.

황제가 입을 열었다.

“모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진실을 알아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태의를 돌아보며 물었다.

“태후의 몸은 괜찮으시냐?”

태의가 대답했다.

“태후마마께서는 충격을 받으셨을 뿐입니다. 잘 쉬셔야 합니다. 제가 마음을 안정시키는 약을 지어 오겠으니 그걸 드시고 나면 괜찮으실 것입니다.”

“가 보아라.”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황제는 또 침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도 모두 물러나거라.”

궁녀들은 무릎을 꿇고 조용히 침전을 빠져나갔다.

결국 방 안에는 황제와 태후 두 명밖에 남지 않았다.

“모후.”

황제는 시선을 초췌한 얼굴의 태후에게 돌리며 베개를 그녀의 뒤에 받쳐 주었다.

“편히 기대십시오.”

태후는 침대 머리에 기댔다. 아침에 곱게 화장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요즘 야소숙과 한씨 가문의 일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옆에 숭준이 있어 그나마 위로가 되었는데 지금은 숭준마저 죽은 것이다.

“숭준의 죽음은 선왕이나 정왕과 연관되어 있을 겁니다.”

태후는 침대에 기대며 한 서린 얼굴로 말했다.

“다들 간이 부었어. 내 사람까지 건드리다니.”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제가 아둔하여 모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 장양후의 죽음이 둘째나 넷째와 연관이 있다고 하시는 거지요?”

태후는 멈칫하더니 곧이어 코웃음을 쳤다.

“숭준이 이미 죽었으니 말해도 되겠지요. 정왕과 선왕 모두 숭준과 왕래가 있었습니다…… 숭준이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지 내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저 눈감아 줬지요. 어차피 배후에 세력도 없으니 기껏해서 날 믿고 잘난 척 좀 하다 말겠거니 하면서요.”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숭준은 배경도, 세력도 없었다. 태후의 총애를 업고 부귀영화를 누린 게 다였다.

그러니 태후뿐만 아니라 황제도 그를 봐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지난번 가짜 증거를 조작하여 나심 장군과 봉양 장군을 음해했을 때, 그는 숭준의 목을 베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태후의 체면을 봐서 장양후를 내버려 두었다.

“원래 그 아이는 단순했어요. 그러나 야소숙이 적국과 내통했다는 게 밝혀지며 그는 야소숙과 황후는 이젠 믿을 바가 못 된다고 생각했나 보지요. 숭준은 젊은 나이이니 앞날을 걱정해서…… 전 이미 늙어서 얼마 살지도 못하니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선왕, 정왕과 왕래를 한 거라더군요.”

황제는 핵심을 잡아냈다.

“동시에 둘과 왕래했다는 말입니까?”

“겉으로는 선왕과 손잡은 듯하여도 사실은 정왕과 편을 이룬 거지요. 저도 얼마 전에야 알게 된 사실입니다.”

황제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숭준이 정말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숨겨야 마땅한데 왜 모후께 말씀드렸을까요?”

“이틀 전에 홍릉이를 불러 소숙이의 일을 묻다가 알게 된 일입니다.”

순간 태후의 표정이 또 어두워졌다.

“좋게 좋게 얘기를 해보려고 했는데 성질머리가 전과 똑같아서는…… 어휴, 말도 몇 마디 못 했는데 가려고 하지 뭡니까. 제가 화나서 뭐라고 하니까 숭준이 가짜 증거를 조작해 소숙과 두 장군을 음해한 일까지 얘기하더군요.”

황제는 태후가 야소숙을 얼마나 감싸는지 알고 있었다.

사실은 그녀가 얘기한 것처럼 이렇게 단순하지 않을 게 뻔했지만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했다.

“홍릉이가 원래 그런 아이지 않습니까?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태후는 야홍릉을 감싸는 황제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화가 나 숭준에게 물었지요. 그래서 숭준이 다 낱낱이 얘기한 거예요. 숭준은 선왕의 지시를 받고 소숙과 두 장군을 음해하는 증거를 조작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사실상 선왕을 이 판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고 실제로 손잡은 사람은 정왕이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 나심 장군과 봉양 장군은 억울한 게 맞았다.

그들은 야소숙과 함께 적국과 내통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선왕과 정왕은 왜 모두 그들을 사지로 내몬 것이지?’

황제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그들 두 장군은 둘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 왜 그들을 죽이려고 한 걸까? 그들이 모두 홍릉이의 사람이라서? 둘째와 넷째는 서로 다투면서도 홍릉이의 권력을 없애려고 애를 쓰는군. 홍릉이의 권력이 너무 강해서 겁난 건가? 앞으로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을까 봐?

아니면 홍릉이가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을까 두려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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