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밤에 벌어진 일
봉서오는 흠칫 놀라더니 흥미진진한 얼굴로 야홍릉을 돌아보았다.
“역시 공주 전하다우십니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국화원을 떠났다.
생일 연회는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초대받은 손님들도 썩 좋지 않은 기분으로 떠나갔다. 하지만 이 일은 야홍릉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전혀 놀라지 않았다.
한묵은 감옥으로 가서 감진에게 상황을 물은 뒤, 야홍릉과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황제에게 보고하러 궁으로 돌아갔다.
점심 무렵, 야홍릉은 침전에서 낮잠을 잤다.
이때, 영영이 들어와 바깥 상황을 보고했다.
지금 밖은 매씨 가문의 일로 떠들썩하다는 소식이었다. 매현령은 공주부에서 나간 뒤, 오동 골목에서 모자 세 명을 찾았다. 그들의 신분을 확인한 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그들을 죽여 입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 저택에 숨어 있는 호원들이 나서서 모자를 보호했고 그 과정에서 실수로 매현령을 다치게 했다.
매씨 가문의 유일한 적자가 다쳤으니 사건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다.
상황은 곧 매 부인의 귀에 들어갔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사람들에게 퍼졌다. 구경꾼들이 점점 많아지자 매 부인은 이 일을 덮을 수가 없었다.
어산서원의 산장이 밖에서 외실을 두었다는 추문이 제경 전체에 쫙 퍼지며 사람들은 하나같이 분노했다.
당정주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했다. 어사는 원래도 관리들을 감독 감찰하는 게 직무였다. 게다가 갓 임직하여 열정이 넘치는 당 어사는 딸의 진술을 듣고 바로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했다.
그러나 알아볼 필요도 없이 소문이 이미 쫙 퍼져있었다.
당 어사는 망설이지 않고 궁에 들어가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가뜩이나 요즘 기분이 나쁜 황제는 이 얘기를 듣더니 화를 내며 바로 매 대인을 궁에 불러들이라고 했다.
매 대인을 궁에 들이라고 지시한 뒤, 황제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에 잠겼다.
관리의 사생활에 대해 신은전 영위가 가장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이 든 황제는 또 대교습을 불러 매 대인에 대해 물었다. 대교습은 소문이 사실이라고 했다. 매 대인은 밖에서 외실을 두고 아들딸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니 황제가 화를 안 낼 리 있겠는가?
매 대인이 큰 벌을 받으리라 짐작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바깥의 상황을 다 들은 뒤에도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겠으니 나가 보아라.”
영영이 나갔다.
야홍릉은 저택에서 두 시진 동안 낮잠을 자고 저녁 무렵에야 세수하러 일어났다. 그리고 감옥으로 가서 반 시진 동안 있었다.
그녀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진 뒤였다.
홍릉원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한 야홍릉은 정려와 정란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색 야행복이 그녀의 마른 몸매를 감싸 주었다. 그녀는 한기가 흐르는 얼굴만 밖에 드러낸 채, 검은 옷으로 무장했다. 환한 등불에 그녀의 피부는 유독 백옥처럼 눈부시게 빛을 발했지만 그 때문에 무표정한 얼굴이 더욱 매정해 보이기도 했다.
야홍릉은 거울을 보며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거울 속에서 날카로운 그녀의 눈빛이 섬뜩한 빛을 뿜었다.
* * *
어두운 밤.
미인을 품에 안은 장양후는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는 반짝이는 등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타닥타닥 타는 등불이 그의 눈에는 음산하고 무섭게 보였다.
야홍릉이 예고한 사망 날짜가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그 말인즉 내일 밤 자시에 그는 죽을 거라는 말이었다. 그는 야홍릉이 혼자의 힘으로 저택에 쳐들어와 그의 목숨을 앗아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불안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전에도 야홍릉이 쳐들어오지 않았던가? 오기만 한 게 아니라 그의 손목을 자를 뻔하기까지 했다. 그 뒤로 그는 저택의 호원을 기존 인원의 배에 가깝게 늘였다.
그가 묵는 주원 밖만 해도 수비가 엄해 여인이 절대 들어올 수 없었다.
하지만 야홍릉의 말은 그의 마음속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그는 야홍릉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야홍릉이 큰소리나 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말하면 말한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숭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는 야홍릉의 옆에 붙어 있던 복면의 어영위가 떠올랐다.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밤에 늘 있는 일이었지만 숭준은 불안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창문을 닫아라.”
그가 지시를 내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긴장이 담겨 있었다.
시녀는 순순히 돌아서 창문을 닫았다.
장양후는 조용히 침대 머리맡에 기댔다.
‘내일은 태후 궁에서 하룻밤 잘까? 창피한 게 죽는 것보다 낫잖아? 야홍릉을 무시하면 안 돼.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야지.’
이렇게 생각한 장양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오늘 밤은 무사하겠지.’
그러나 또 바람이 불어왔다.
서늘한 한기를 느낀 그는 정말로 추위를 타서인지, 아니면 겁에 질려서인지 몸서리를 치게 되었다. 그는 버럭 화를 냈다.
“창문을 닫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아직도 바람이 들어오는 게냐? 너희들은 뭘 하는 것이냐?!”
시녀들은 당황하여 사죄하고는 급히 창문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창문이 모두 닫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시녀들은 더욱 긴장하며 몸을 조아렸다.
“대인, 화내지 마세요.”
하얗고 가는 손이 그의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위로하는 척하나 실은 그를 놀리는 것이었다.
“가을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밤바람도 그리 차지 않은데…….”
마음이 불안한 숭준은 미인과 장난칠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짜증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뭘 안다고!”
미인은 깜짝 놀라더니 입술을 삐죽이고 애교를 부렸다.
“대인, 정말 미워요…….”
장양후는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나가 보아라.”
“대인?”
“나가라고!”
“……네.”
미인은 그가 기분이 나빠 보이자 늘쩡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리고 숭준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대인, 화 푸세요. 제가 내일 다시 올게요.”
그녀는 장양후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인의 입맞춤이 남자의 기분을 풀어주는데 기가 막히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여인을 밝히는 남자에게는 더욱 잘 먹히는 법이었다.
숭준은 짜증이 났지만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인이 떠나기를 기다렸다가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일렁이는 촛불이 방 안 분위기를 더욱 무겁게 했다.
장양후는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방문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몰려들었다.
동시에 찬 바람이 불더니 등불이 꺼졌다.
방 안은 어둠 속에 잠겼다.
숭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서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어찌 된 일이냐? 불을 밝혀라! 어서!”
시녀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궁지에 몰린 장양후는 미칠 것처럼 불안한 마음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사람을 부르려고 입을 열었으나 그 순간, 미세한 바람 소리와 함께 검은색 그림자가 언뜻 지나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바로 강한 힘이 그의 목을 조이는 게 느껴졌다. 그는 숨이 막혀 꺽꺽 소리를 내며 헐떡였다.
등에서 식은땀이 쫙 흘렀다.
“끕….”
극심한 통증에 그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숭준은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목을 휘감은 채찍을 움켜쥐고 반항하려 했다.
그러나 무공이 뛰어난 숭준이었지만 목을 졸린 탓에 힘을 조금도 쓸 수 없었다.
목이 조인 고통과 숨이 막히는 느낌에 그는 죽음의 기운을 느꼈다.
방에 등불이 다시 밝혀졌다. 희미한 불빛이었지만 그는 눈앞의 사람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는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상대의 새카만 눈동자에는 얼어붙을 것 같은 한기뿐이었다.
숭준은 창백한 얼굴로 몸부림치며 겨우 세 글자를 내뱉었다. 목이 칼로 베듯 아팠다.
“야…… 홍릉…….”
방에서 당직을 서던 시녀들은 이미 바닥에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야홍릉은 검은 채찍으로 숭준의 목을 휘감고 그를 침대 앞까지 몰았다.
그녀는 한기뿐인 시선으로 물었다.
“숭준, 난 말하면 말한 대로 행한다.”
숭준은 얼굴이 자주색이 되었지만 눈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목구멍으로 말을 짜내려고 애를 썼다.
“사, 사흘이…… 아직…… 안, 됐…….”
“아직 안 되긴 했지. 그러나 난 궁에서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널 먼저 염라대왕에게 보내는 거야.”
야홍릉이 말했다.
야홍릉은 숭준에게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내일 밤에 그는 장양후부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궁에 들어가 사람을 죽이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아는 야홍릉은 굳이 내일까지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야홍릉은 숭준의 목을 채찍으로 휘감은 채, 그를 침대에 눕혔다. 야홍릉의 뒤에 촛불을 든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익숙한 느낌에 숭준은 온몸의 피가 굳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팔을 허우적거렸지만 무의미한 몸부림에 불과할 뿐이었다.
야홍릉은 그의 목적을 한눈에 파악하고 채찍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그의 몸이 허공으로 올라가며 침대에서 떨어졌다. 야홍릉은 서리가 낀 것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숭준을 바라보았다.
“난 너와 쓸데없는 얘기를 나눌 만큼 한가하지 않아. 내가 오늘 널 죽이는 이유는 단 하나다.”
숭준은 손을 뻗어 채찍을 잡은 채 눈을 부릅떴다.
“네가 야정연의 지시를 받은 것이든, 야모침과 손을 잡은 것이든 다 상관없다. 하지만 넌 적국과 내통했다는 죄명을 나심과 봉양에게 뒤집어씌우지 말았어야 했어. 넌 그것 때문에 죽는 것이다.”
숭준은 입을 벌리고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동공이 축소되고 얼굴이 허옇게 질린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변명하려고?”
야홍릉의 시선은 얼음보다도 차가웠다.
“변명하지 않아도 되니 걱정하지 말거라. 곧 야정연과 야모침도 가만두지 않고 하나하나 네 옆에 보내줄 테니.”
말을 마친 그녀는 채찍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채찍이 숭준의 목을 더욱 꽉 조였다. 숭준은 동공이 풀리더니 마침내 숨이 끊어졌다.
뒤에서 초를 들고 있던 남자가 걸어와 숭준의 손을 풀고 옥패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옥패에 달린 술이 그의 손가락 틈 사이로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