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그때까지 살아있을까?
야홍릉의 말이 끝나자 시녀 한 명이 그녀의 지시대로 찻잔을 가져왔다.
정원에 사람이 많아서 시녀는 줄곧 정원에 있었기에 어느 찻잔이 중독된 사람의 찻잔인지 알고 있었다.
봉서오는 찻잔을 힐끗 훑어보더니 말했다.
“찻잔에 독을 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바닥에 떨어진 계화고(桂花糕)를 바라보았다.
봉서오는 한 입 베어 문 계화고를 줍더니 도 의원에게 가져갔다.
“검사해 보시죠.”
도 의원은 계화고를 코에 대고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맞습니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의 안색도 변하기 시작했다.
“나도 방금 계화고를 먹었는데?”
“나도 먹었어.”
“나……. 나는 두 개나 먹었는데.”
“잠시만요, 진정하세요.”
봉서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었다.
“독을 탄 사람은 공주 전하에게 누명을 씌우는 게 목적이니 모든 이들에게 독을 타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독된 사람은 세 명이면 족합니다.”
말을 마친 그는 부채로 먼 곳을 가리켰다.
“국화원에는 탁자가 여러 대 있는데 모두 다과와 술이 있지요. 아마 그중 한 접시에만 독을 탔을 터이니 지금까지 이상이 없는 사람은 괜찮을 것입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태후마마께서 저더러 점심에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공주 전하, 저는 먼저 가봐도 되겠습니까?”
숭준이 야홍릉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태후를 들먹이긴 했지만 내심 야홍릉이 순순히 보내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야홍릉이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야홍릉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도 아직 계신데 장양후도 기다려 보지 그런가. 태후 쪽에는 내가 사람을 보내 상황을 설명하지.”
숭준이 냉소를 하며 말했다.
“사건이 공주부에서 터진 것이니 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태후마마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제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야홍릉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이미 내 뜻을 분명하게 전했네.”
숭준은 안색이 퍼렇게 변했다.
“공주 전하, 정녕 태후와 맞설 것입니까?”
그 말에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
그들은 장양후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명문가 귀족 자제들이라 평소 장양후와 왕래가 거의 없었다.
가끔씩 마주쳐도 인사를 하는 게 다였다. 장양후가 태후의 총애를 등에 업고 기고만장하다는 것은 말로만 들었지, 이렇게 직접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는 태후를 들먹이며 호국 공주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야홍릉은 태후라는 말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긴장하던 분위기는 더욱 팽팽해졌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제가 꼭 가야 하겠다면요?”
장양후는 어두운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러자 정원에 흩어져 있던 호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족히 서른 명은 되어 보였다.
장양후가 연회에 참석하면서 이렇게 많은 고수를 데리고 왔을 때, 사람들은 그저 그가 잘난 척한다고만 생각했다. 오직 야홍릉만이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오지 않으려니 창피하고 오려니 또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데리고 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서른 명의 고수들은 다른 곳에서나 대단한 수준이지 고수가 가득한 호국 공주부에서는 턱없이 부족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영영.”
그러자 검은 그림자가 휙 하고 스쳐 지나더니 영영이 나타났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대답했다.
“전하.”
“이곳은 잠시 너에게 맡기마. 손님들을 잘 모시거라.”
야홍릉은 숭준의 어두워진 안색을 무시하고 말했다.
“부용향의 해독약을 구할 수 있는지 궁에 들어가 보겠다.”
“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봉서오를 바라보았다.
“봉 공자, 뭔가를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알아내지 못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제가 궁에 들어가 있을 때, 조사를 해주셨으면 하는데.”
봉서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한 번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린 채, 떠나갔다.
정려는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국화원을 나섰을 때,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강한 햇빛이 야홍릉의 얼굴에 비추자 고결한 느낌이 풍겼다.
선녀가 강림한 것 같은 아름다운 미모에 사람들은 눈이 부시면서도 겁이 났다.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숭준은 안색이 퍼렇게 변했다.
그의 주변에 있던 공자와 소저들은 불똥이 튈까 봐 그에게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 * *
야홍릉이 황제를 만나려고 어서방에 들어섰을 때, 야정연도 그 자리에 있었다.
황제는 조례가 끝난 뒤, 어서방에서 상주서를 읽는 버릇이 있었다.
야정연은 황제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것이었다. 아직 야정연과 정사를 논하지도 않았는데 호국 공주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황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홍릉이는 오늘 측부의 생일 연회로 바쁜 거 아니냐?”
야정연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공주 전하의 안색이 좋지 않았습니다.”
손평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들라 하라.”
“네.”
손평이 직접 야홍릉을 맞이했다.
“전하.”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어서방에 들어섰다.
그녀는 책상과 일여덟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말했다.
“부황께 도움을 청할 일이 있습니다.”
황제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야홍릉이 그에게 먼저 도움을 청한 적은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고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제 측부가 오늘 저택에서 생일 연회를 열었는데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부황께 부용향의 해독약이 있습니까?”
“부용향?”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야홍릉은 공주부에서 생긴 일을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지금 급선무는 해독약을 구해 셋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제가 천천히 알아보겠습니다.”
야정연은 안색이 변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황당한 일이!”
황제는 책상을 내리치며 화난 표정을 지었다.
“제경에서 어떻게 이토록 불미스러운 일이 자꾸만 일어난다는 말이냐? 이제는 호국 공주부에 독극물 사건이 일어나다니? 다들 반역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밝혀지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한묵!”
금군 통령 한묵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네, 폐하.”
“호국 공주부의 독극물 사건 말이다. 너에게 이틀의 시간을 줄 테니 홍릉이와 함께 진실을 파헤치거라.”
‘감히 호국 공주부에서 독을 탔다고?’
한묵은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네, 폐하.”
“폐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중독 사건은 작은 일이 아니나 공주 전하와 한 통령 모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니 곧 진실을 밝혀낼 것입니다. 다행히 부용향의 독은 치명적이지 않아 괜찮을 것입니다. 폐하, 심려하지 마십시오.”
승상이 황제를 다독여 주었다.
손평이 찻잔을 올렸다.
그제야 황제는 풀어진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입을 열었다.
“부용향의 해독약은 태후에게 있다. 자안궁으로 가서 태후께 인사를 올린 다음 상황을 설명하여라. 내가 손평을 시켜 너에게 보내주겠다.”
야홍릉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태후 말입니까?”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홍릉은 말없이 서 있었다.
표정을 보니 내키지 않는 눈치였다.
황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가 한씨 가문과 3황자의 현재 상황을 떠올렸다. 황제는 야홍릉의 기분을 눈치채고 말을 돌렸다.
“부용향은 치명적이지 않으니 먼저 돌아가 사건의 진실을 알아보거라. 짐이 이따 손평더러 자안궁으로 가 해독약을 받으라고 하겠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부황.”
그녀는 한묵과 함께 어서방에서 나갔다.
어서방에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그녀는 야정연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공주부에 돌아온 야홍릉은 곧바로 한묵을 데리고 국화원으로 갔다. 그리고 봉서오에게 조사 결과를 물었다. 한묵은 부하들과 함께 손님들의 상황을 물어보며 사건을 파악했다.
반 시진 뒤, 한묵이 걸어와서 말했다.
“감 공자에게 여쭤볼 말이 있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시위에게 지시를 내렸다.
“한 통령을 모시고 감옥으로 가거라.”
“네.”
한목이 시위와 함께 떠나자 야홍릉은 정원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즐거운 마음으로 오셨을 텐데 이런 일이 일어났네요. 여러분들을 잡아두지 않겠으니 이만 가 보세요.”
사람들은 야홍릉이 쉽게 자신들을 풀어주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계시는 분들은 모두 귀족 세가의 공자, 소저입니다. 저는 섣불리 여러분들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을 탄 사람이 있으니 저도 완벽하게 조사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을 돌려보낸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결백한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공주부의 사람이거나 한 통령의 사람이 저택에 가서 사건에 대해 물어 본다면 잘 협조해 주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아직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공주는 그들의 신분 때문에 저택에 남겨둘 수 없어서 돌려보낸다는 것이었다.
그들 역시 관리의 자제들이라 조사 과정에 뭐가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야홍릉의 말에 불만이 없었다.
누군가는 안도했고 누군가는 의아했다.
간이 작은 소저와 공자들이 먼저 예를 올리고 자리를 떴다. 순식간에 손님의 반수 이상이 가버렸다. 초하는 떠나기 전에 야홍릉에게 당부까지 했다.
“감 공자는 자신의 생일 연회에 이런 짓을 벌일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아닙니다. 공주 전하, 부디 잘 알아봐 주십시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난 무고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우지 않소.”
숭준은 음울한 표정으로 비꼬듯 말했다.
“공주 전하의 능력도 별것 아니군요.”
이 말을 들은 야홍릉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
“장양후, 천천히 가시게. 오늘 밤 푹 자고.”
그러자 숭준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야홍릉의 사망 예고가 떠올라 순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쫙 흐르는 것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른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루 빨리 진범을 찾아내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그는 시위들을 데리고 강한 기세로 공주부를 나갔다.
“얼굴 하나로 먹고 사는 남첩이 기세 하나는 끝내주는군요.”
봉서오가 부채를 흔들며 걸어와 야홍릉의 옆에 섰다.
“군자에게 밉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소인배의 미움을 사지는 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공주 전하는 저 인간이 추잡스러운 짓을 벌일까 두렵지 않습니까?”
야홍릉이 대답했다.
“그때까지 살아 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