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음모를 꾸미다
지적당한 남자는 안색이 바뀌었다.
“저 아닙니다. 저 아니라고요!”
오늘 공주부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명문가 출신의 공자와 소저였다.
독살은커녕 평소 말다툼을 해도 크게 보복을 당할 수 있는데 누가 감히 이들에게 독을 탔다는 말인가?
봉서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리 흥분하십니까? 당신이 독을 탔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그 말을 들은 남자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순간, 목구멍에서 뜨듯한 느낌이 전해지더니 가슴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입을 벌리고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쿵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사람들은 또다시 경악했다.
야홍릉은 매서운 눈빛으로 감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감진도 당황했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감 공자가 모른다고요?”
숭준이 입을 열었다.
“감 공자가 모를 리 없을 것 같은데?”
감진은 고개를 돌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숭준을 노려보았다.
“장양후,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 세 명은 당신 생일 연회에서 독에 당했어. 당신이 준비한 차를 마시고 말이야. 모른다는 말 한마디로 정말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 되나?”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다들 호국 공주부의 체면을 봐서 온 거긴 하지만 정원의 일은 모두 감진이 준비한 거야. 다른 측부들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당연히 감진이 책임져야지.’
“도 의원이 오셨어요! 얼른 비켜요!”
정려가 큰소리로 외치며 길을 막은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왔다. 도 의원을 데리고 나타난 그녀는 정원 안에서 쓰러진 소녀의 옆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으며 말했다.
“의원 선생님, 도대체 무슨 독에 당한 건가요? 살 수 있어요?”
“도 의원, 저희 공자 좀 먼저 봐주십시오.”
초운하 옆에 서 있던 하인이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
“초 공자가 먼저 쓰러졌습니다. 우리 초 공자는 정왕 전하의 사촌 형님 되시는데 만약 공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정왕 전하가…….”
“닥치거라.”
야홍릉이 시선을 돌리며 하인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한 번만 더 떠들면 곤장으로 쳐 죽일 것이다.”
초씨 가문의 하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하.”
도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소저가 당한 독은 부용향(芙蓉香)입니다.”
‘부용향? 그게 뭔데?’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부용향이라는 이름이 분이나 연지 이름과 더 어울렸던 것이다.
초유와 숭준은 안색이 확 변했다.
도 의원은 다른 두 명의 맥을 짚어 보더니 확신하며 말했다.
“셋이 당한 독은 모두 부용향이 맞습니다.”
“부용향이 뭔가? 위험한 것인가?”
“위험하지 않습니다. 중독자도 생명의 위험은 없습니다. 하지만…….”
도 의원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말을 이었다.
“이런 독성의 특징은 사람을 가사 상태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해독약이 없다면 보름 넘게 깨어나지 못하지요. 독성이 몸속으로 파고들지는 않으나 기절해 있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니 굶어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독성이 위험하지 않아 당분간 목숨을 잃을 일이 없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독 방법은 없느냐?”
야홍릉이 물었다.
초유는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표정에 초유는 입술을 꽉 다물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저에게는 해독약이 없습니다. 황제 폐하나 태의원에 여쭈시지요. 지난번에 폐하께서 부용향을 어떤 황자에게 하사했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정원은 또 정적에 잠겼다.
야홍릉은 생각에 잠겼다가 담담하게 물었다.
“부용향에 다른 효능이 있느냐?”
도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몸이 견딜 수 없는 통증을 느낄 때, 부용향을 사용하면 가사 상태에 들어가 통증을 완화할 수 있습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숭준과 초유는 물론, 방금까지만 해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던 위걸을 비롯하여 다른 공자와 소저들은 갑작스러운 압박감에 숨을 죽였다. 누구도 용기를 내어 말을 하지 못했다.
호국 공주는 오랫동안 변방에서 지내다가 돌아온 뒤에도 늘 저택에만 있어 제경의 귀족 자제들과 왕래하지 않았다.
오늘 공주부에 초대받고 온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처음으로 야홍릉을 가까이서 보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녀에게서 풍기는 차갑고 날카로운 분위기도 처음 느껴보았다.
몸집이 거대한 남자도 겁에 질릴만한 한기였다.
“여봐라.”
야홍릉이 무표정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쓰러진 세 명을 저택으로 돌려보내고 각 저택에 상황을 말해주어라. 그리고 내가 최대한 빨리 해독약을 찾아 보내주겠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거라.”
정원 밖에 서 있던 시위장은 바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시위 몇 명과 함께 중독된 사람들을 업고 밖으로 나갔다.
“죄송하지만 여러분들은 이곳에 남아주셔야겠군요. 오늘 일은 제가 끝까지 조사해서 결과를 말씀드릴 겁니다. 결과가 밝혀질 때까지 감진에게 책임을 묻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돌리고 담담하게 물었다.
“중독 사건에 대해 할 말이 있느냐?”
“제가 독을 탄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야홍릉은 손을 들고 담담하게 지시를 내렸다.
“감진을 공주부의 감옥에 가두거라.”
감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시위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공주 전하!”
이때, 초하가 입을 열었다.
“감 공자는 독을 탈 이유가 없습니다…….”
“독을 탈 이유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
이때, 다른 소녀가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돌리고 초하를 도발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초 낭자가 이렇게 역성을 드는 걸 보니 감 공자와 무슨 사이라도 되나요?”
초하는 말하는 소녀를 노려보았다.
“육소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말하든 말든 그게 그쪽과 무슨 상관이죠?”
육소주의 본명은 육경경(陸卿卿)이었다.
그녀는 초유가 청혼했던 육연지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저 얼굴이 반반한 사람을 보고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이 한심해서 그런 거예요.”
육경경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러자 초하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녀는 매서운 눈빛으로 육경경을 노려보았으나 귀족 소저의 우아한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억지로 화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옷자락을 살짝 들더니 말투를 바꾸어 육경경을 비꼬기 시작했다.
“오라버니가 전쟁터에 나갔다고 바로 이렇게 기고만장하게 굴어서 되겠어요? 육씨 가문은 곧 몰락할 텐데 언제까지 이렇게 잘난 척할 거예요?”
육경경은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몰락하면 뭐 어때요? 아무리 몰락해도 빌붙으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전 초 낭자와 달리 매일 선녀처럼 우아한 척, 고귀한 척, 속세에 물들지 않은 척하다가 잘생긴 남자만 보면 입을 헤벌쭉 벌리는 짓은 하지 않아요.”
초하는 얼굴이 벌게졌다.
“육경경!”
“지금 뭐라는 거예요? 육씨 가문의 여인은 원래도 이렇게 무례하고 교양이 없나요? 거울이나 좀 봐요! 초하의 발끝에도 따라오지 못할 게 어디…….”
당정주는 초하의 편을 들며 육경경과 맞섰다.
“그래요.”
연청의는 손톱을 후 불더니 느릿하게 덧붙였다.
“육씨 가문의 낭자는 무례하고 예법도 모르네요. 육씨 가문은 명문 세가인 듯하나 초하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저라면 창피해서 멀리 피해버리겠어요. 여기에 있어 봤자 망신이나 당하죠.”
“망신이요?”
육경경은 세 여인을 상대하면서도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초 공자가 저에게 구혼할 때만 해도, 제게 아름답고 분위기가 뛰어나다고 한 것 같은데. 며칠이나 지났다고 말을 바꾸는지 모르겠네요? 구혼을 거절당했다고 화나서 이런 건가요? 교양이 없는 게 누구인지 모르겠네요.”
초하는 안색이 퍼렇게 변했다.
“이런 뻔뻔한……”
“조용히 해!”
초유는 굳은 얼굴로 여동생과 당정주를 바라보았다.
“뭐 하는 거야? 공주 전하 앞에서 이렇게 큰 소란을 피우고 말이야. 예법을 잊어버린 것이냐?”
중독의 일로 마음이 무거웠던 사람들은 네 소녀가 다투자 흥미진진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구경은 싸움 구경이 가장 재밌었다.
초씨 가문 남매는 정왕의 사람이었고 중독된 초운하는 선왕의 친척이었다.
그래서 초운하가 중독된 일은 초씨 가문 남매에게 큰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육연지는 선왕과 정왕이 모두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하던 사람이었다. 얼마 전에 초유는 사람을 보내 육씨 가문에 구혼하기도 했다.
그 의도는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육연지는 초유의 구혼을 거절했다.
‘지금 초 낭자가 육 낭자와 다투는 것을 보니 초씨 가문은 선왕의 편을 들기로 했다는 건가?’
“오늘은 감 공자의 생일이고 연회의 술과 다과 모두 감 공자가 책임진 일이라고는 하나 제가 보기에는 누군가 감 공자에게 누명을 씌운 듯합니다.”
봉서오는 다시 부채를 펼치고 흔들며 말했다.
부채 바람에 양옆의 머리가 흩날리자 색다른 풍류스러움이 흘렀다.
“독을 탄 사람의 목적은 살인이 아니라 공주 전하를 겨냥한 것입니다.”
이 말에 다투던 소저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다시 중독 사건에 관심을 돌렸다.
이때, 다른 공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아닐 것입니다. 호국 공주는 목국의 영웅이고 나라를 지킨 전설인데 누가 감히 호국 공주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이런 짓을 했다는 말입니까? 목국 백성을 능멸하는 얘기입니다.”
“쯧쯧.”
봉서오는 고개를 젓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순진한 공자시군요. 전 공자의 순수한 마음에 상처를 내고 싶지 않으니 어디 조용한 데 가서 차나 마시며 꽃구경을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에게 면박당한 공자는 스무 살이 넘었으나 애티 나는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얼핏 보면 기껏해야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았다.
봉서오의 말에 담긴 조롱을 알아들은 그는 얼굴을 붉히며 콧방귀를 뀌었다.
다른 사람들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생일 연회에 참가하러 왔는데 독극물 사건에 연루되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독을 탔다고 의심받는 것 자체만으로 기분이 상하고 겁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호국 공주부였다. 호국 공주의 성격은 평소에도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기 족했다. 호국 공주가 조사하겠다고 한 말은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누구도 공주부를 떠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담담하게 지시를 내렸다.
“세 명이 마신 찻잔을 가져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