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중독
“측부 여섯 명 말입니다…….”
봉서오는 커다란 정원을 둘러보며 말했다.
“왜 감진 공자의 생일 연회에 다른 측부들이 보이지 않는 건가요?”
‘사이가 안 좋나?’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다른 측부들은 어디 있느냐?”
“전하께 아룁니다.”
시위가 고개를 숙인 채, 보고를 올렸다.
“매 측부는 단 공자 두 분과 함께 비무장에 갔습니다. 오늘 밤 누가 잠자리 시중을 들지 승부를 본다고 합니다.”
그러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잠자리 시중?”
봉서오는 당황한 표정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정말 측부가 공주 전하의 잠자리 시중을 든다는 말입니까?”
‘그 측부들은 그저 보여주기식이 아니었다고?’
야홍릉은 말없이 서 있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들 세 명에게 알리거라. 승패가 결정 나기 전까지 절대 멈추지 말라고. 살아남은 자는 오늘 밤에 부를 것이고 죽은 자는 개 먹이가 될 것이다.”
봉서오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다.
‘참으로 매정한 여인이야. 하지만 매씨 가문에서 일이 터졌을 때, 매현근이 비무장에 끌려갔다는 말인데. 단씨 형제와 감진은 손발이 척척 맞네.’
초유는 정원에서 한참 기다렸지만 야홍릉이 오지 않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정자에 기대앉은 감진을 보더니 망설이던 끝에 술잔을 들고 걸어갔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감 공자.”
감진은 시선을 들고 초유를 바라보았다.
“초 공자.”
“감 공자는 자태가 뛰어난 것이 전혀 기루 출신 같지 않습니다.”
초유의 온화한 미소는 봄바람처럼 따뜻했다.
“감 공자는 어렸을 때부터 빙란각에서 자란 건가요?”
감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심드렁하게 물었다.
“초 공자, 무슨 볼일이라도?”
“볼일은 없고요. 그저 감 공자가 어떻게 공주 전하의 측부가 되었는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감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우리가 함께 공주부에 들어왔던 것 같은데 제 기억이 잘못된 겁니까?”
“같이 들어온 것은 맞지요.”
초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술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하지만 공주 전하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돌려보내셨지요.”
감진이 미소를 지었다.
“감 공자, 제 질문의 의미를 아시지 않습니까?”
초유는 평온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눈치였다.
“감 공자가 공주부에 들어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유?’
감진은 고개를 돌려 정원을 바라보았다. 공자와 소저들은 흩어져서 국화원을 노닐고 있었다. 느긋하게 산책하며 꽃구경을 하는 공자들은 아까 있었던 실랑이를 잊은 듯했다. 소녀 몇 명이 가끔씩 그들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게 다였다.
감진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조정 대신 중에 빙란각의 단골손님이 있는데 그가 폐하께 저를 추천한 것입니다.”
황제는 야홍릉에게 측부를 보냈고 야홍릉은 거절하지 않았다.
측부는 부마와 달리 남자 노리개일 뿐이었다.
얼굴만 잘생기면 가문이나 배경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매일 궁에 있으니 만나는 사람들이 죄다 비빈, 시녀, 내관, 시위와 조정 대신일 뿐이었다.
그가 어떻게 꽃다운 미소년을 알 수 있겠는가?
조정 대신이 추천한 게 분명했다.
야홍릉이 직접 들인 한경백을 제외하고 다른 다섯 명은 모두 대신들의 추천을 받아 들어온 것이었다. 조정 대신은 황제가 왜 공주부에 측부를 보내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측부를 고를 때, 얼굴이 잘생긴 것은 물론이고 똑똑하고 말을 잘 듣는 자들만 골라서 보냈다.
초유가 공주부의 측부로 들어오려고 했던 것은 스스로가 원해서였다. 결국 측부가 되지 못했지만 그도 황제의 속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감진의 신분이었다.
‘누가 감진을 보냈을까? 감진이 화난 어조로 매 대인의 비밀을 까발린 것은 단순히 화가 나서일까? 아니면 누구의 지시를 받은 건가? 지시를 받은 거라면 누구의 지시를 받은 거지?’
초유는 생각에 잠겼다.
대충 짐작 가는 사람이 있었지만, 확답을 듣기 전까지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똑똑한 만큼 감진도 멍청하지 않았다.
감진이 그에게 진실을 말해줄 리 없었다.
초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주 전하는 오늘 바쁘신가 봅니다?”
“왜 그러시죠?”
감진이 흥미진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초 공자, 얼마 전에 육 소저와 혼인하고 싶다고 했다가 거절당했다고 들었는데 혹시 다시 생각해 보시니 역시 공주 전하에게 빌붙는 게 낫다 싶던가요?”
그 말을 들은 초유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곧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아둔해서 공주 전하의 눈에 들기 어렵습니다.”
“주제 파악을 하시니 다행이군요. 공주 전하는 한 명인데 저택에 이미 측부는 여섯 명이나 있습니다. 공주 전하가 공평하게 대해 주신다고 해도 저는 총애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주의 총애를 나눌 사람이 더 늘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초 공자는 출신이 고귀한 사람인데 어찌 공주부에 측부로 들어오겠습니까? 공자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초유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감진은 도대체 정왕과 어떻게 되는 사이이지? 좋은 마음으로 날 설득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총애를 다투려는 마음 때문에 이러는 건가?’
“감 공자…….”
“초 공자! 초 공자, 왜 그러십니까?”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자 정원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큰일 났습니다! 여봐라, 여봐라! 초 공자가 중독되었습니다. 초 공자가 중독되었습니다! 어서 의원을 불러 주십시오!”
감진과 초유는 동시에 벌떡 일어나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황금빛으로 물든 국화원에 들어서자 바닥에 누워 있는 초운하가 보였다.
위걸과 시녀 한 명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방금 들은 비명은 시녀가 지른 소리였다.
“초 공자, 초 공자, 일어나 봐요! 초 공자……!”
정원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였다.
감진은 사람들 틈을 헤치고 다가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감진!”
위걸이 고개를 돌리더니 화난 얼굴로 쏘아붙였다.
“초운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책임질 것입니까?”
감진은 쓰러져 있는 초운하를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가 왜 책임을 져야 합니까? 어떻게 된 일인지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저에게 그리 급히 살인 누명을 씌우려는 겁니까?”
“사실이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오늘 다들 호국 공주 때문에 왔는데 초 공자가 공주부에서 차를 마시고 중독되었으니 이번 일은 공주부의 책임이지요!”
위걸이 차갑게 말했다.
감진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죽는다면 공주부의 책임이겠지만 아직 사람이 죽지도 않았으니 장터 아낙네처럼 소란스럽게 굴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감진은 시위 한 명을 불렀다.
“저택 의원을 모셔오거라.”
시위가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높은 소리가 들렸다.
“공주 전하 납시오!”
‘기막힌 순간에 나타나셨군.’
감진은 다른 사람들이 야홍릉 쪽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국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 만수무강 하십시오!”
야홍릉과 함께 걸어오던 봉서오는 이 광경을 보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목국에서의 야홍릉 지위는 정왕이나 선왕보다도 높군.’
“공주 전하.”
감진도 걸어와 허리를 굽히고 예를 올렸다.
“전하를 뵙습니다.”
야홍릉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덤덤하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공주 전하. 감 공자가 준비한 차를 마시고 초운하가 중독되어 쓰러졌습니다.”
위걸이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중독되었다고?’
야홍릉과 봉서오는 말없이 시선을 사람들의 뒤에서 누워 있는 초운하에게 돌렸다.
그의 얼굴은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는데 입술도 원래의 색깔을 잃고 창백했다.
봉서오는 다가가 말없이 초운하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 그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공주 전하, 정원을 봉하고 누가 독약을 소지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당신은 또 누구요? 공주 전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뭐라고 떠드는 것이오?”
위걸이 화난 얼굴로 물었다.
봉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저는 남성국 사신 봉서오이자, 호국 공주의 손님입니다. 당신네 황제도 저를 대할 때는 예의를 갖추던데 이렇게 절 무례하게 대하는 걸 보니 제가 폐하께 일러도 된다는 말입니까?”
‘뭐라고? 남성국에서 온 사신이라고?’
사람들은 놀란 시선으로 봉서오를 바라보았다.
몇몇 소녀들은 수줍은 얼굴로 그를 훔쳐보았다.
‘젊은 나이에 황제를 대신해 목국에 사신으로 오다니. 남성국에서도 신분이 높겠지?’
그 말에 위걸은 당황한 듯, 안색이 시퍼레졌지만 여전히 뿌루퉁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공주부의 손님이라고 해도 공주부의 일에 간섭할 권리는 없습니다.”
봉서오는 코웃음을 쳤다.
“제가 뭘 하든, 그쪽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위걸은 표정이 굳어졌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그러자 힘찬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호원들이 국화원을 겹겹이 둘러쌌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공자와 소저들은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당황하거나 겁을 먹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귀족 가문에서 자란 그들은 이런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중독된 게 아닌가?
한씨 가문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천뢰에 갇힌 것에 비교하면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털썩!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빨간색 치마를 입은 소녀가 눈을 감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의 안색도 초운하처럼 검푸른색을 띠었는데 입가에 핏기가 보이기까지 했다.
“소저, 소저!”
시녀는 황급히 꿇어앉아 창백한 얼굴로 소녀를 흔들었다.
“소저, 왜 그러세요? 소저! 소저! 일어나 보세요…….”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야홍릉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홍릉은 그저 미간을 찌푸렸을 뿐,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약 초운하 한 명만 독에 당했다면 사람들은 누군가 초운하를 겨냥해 벌인 짓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소녀는 초운하와 그저 얼굴만 아는 사이였다.
“소저, 왜 그러세요? 소저…….”
“조용.”
봉서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 소저는 생명의 위험이 없을 거네.”
말을 마친 그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그의 시선에 흠칫 놀랐다. 그는 곧 부채를 촤악 펼치더니 맞은편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당신, 이리 나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