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하늘과 땅 차이
연청의의 부친은 사부를 맡은 조정 3품 상서였다.
당정주의 부친은 막 어사 자리에 오른 사람이으로, 당 어사는 왕씨 성을 가진 사람과 함께 한 어사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 예전의 한 어사처럼 권력이 강하지 않아도 관리들을 감시하는 업무를 맡은 어사는 무시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분홍색 치마를 입은 소녀는 초 각로의 손녀 초유의 여동생인 초하(楚瑕)였다.
세 소녀는 정자에 앉아 한담을 나누었다.
초하는 턱을 괸 채, 우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방금 그 공자는 이름이 뭘까요? 그렇게 잘생겼는데 제가 호국 공주라면 다른 측부를 죄다 내보내고 그 공자만 총애하겠어요.”
“정말 미남들을 저택에 들이게 된다면 그런 생각은 안 할 거예요.”
당정주가 웃으며 말했다.
“호국 공주가 그 측부들이 마음에 들어서 저택에 들인 게 아닐 수도 있잖아요?”
초하는 흠칫 놀라더니 곧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러네요.”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호국 공주가 측부 여섯 명을 들인 것을 두고 황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귀족 세가 출신인 그들은 겉보기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아무리 호국 공주라도 멋대로 할 수 없었다.
“방금 그 공자 말이에요……. 아마도 빙란각 출신인 감진 공자 같아요. 오늘 생일의 주인공 말이죠. 듣자 하니 아름다운 용모에 풍류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고 했어요.”
연청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감진?’
당정주와 초하는 눈을 마주치더니 침묵에 잠겼다.
그들 같은 양가 소저와 기루 출신의 감진은 신분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감진이 아무리 잘생겨도 그들과는 엮일 일이 없었다.
오늘 호국 공주부에 초대를 받고 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평생 감진의 얼굴도 몰랐을 것이다.
소관, 노리개, 남첩……
소녀들이 그를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감진에게 그런 신분을 부여했다.
평소 감진에게 쩔쩔매며 큰돈을 쥐여주는 관리들도 사실 그를 그저 아름다운 노리개로 여길 뿐이었다.
놀라움이 사라지자 세 소녀는 생각을 거둔 채, 차를 마셨다.
당정주가 제안했다.
“앉아 있지만 말고 정원에 가서 꽃 구경이나 해요. 공주부의 국화꽃은 우리 집 꽃보다 더 예쁘네요.”
연청의와 초하는 그녀를 따라 정원으로 걸어갔다.
장양후 숭준도 도착했다.
초대장을 받은 숭준은 원래 오기 싫었으나, 야홍릉이 그더러 사흘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를 맴돌았다.
그는 호국 공주부에 발을 들일 용기가 없었으나 가지 않으면 겁을 먹었다는 게 티 날 게 아닌가?
그리고 그는 감진이 공주부에서 얼마나 잘 지내는지 보고 싶었다.
‘설마 나보다 더 잘 지내겠어?’
그래서 감진이 정원에 나타난 순간, 장양후가 들고 있던 술잔이 쨍그랑 바닥에 떨어졌다. 주변 남자들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매혹적이고 준수한 꽃미남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어졌다.
감진은 실눈을 뜨고 숭준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장양후께서 제 미모에 반하기라도 하셨습니까?”
“감진.”
숭준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숭준의 태연한 인사에 주변이 술렁였다.
‘감진? 저자가 바로 호국 공주가 총애하는 측부이자 이번 연회의 주인공인 빙란각 출신 감진 공자라고? 역시 소문대로 경국지색이군.’
“네, 오랜만입니다.”
감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찻잔을 나르고 있는 시녀에게 손을 저었다. 그리고 우아하게 접시에서 술이 담긴 잔을 들고 물었다.
“오늘 시간이 났나 봅니다?”
“난 매일 시간이 넘치지.”
숭준은 미소를 지으며 부담스럽게 뜨거운 눈빛으로 감진을 바라보았다.
“감진 공자, 시간 나면 내 저택에 놀러 오시게.”
“좋지요.”
감진이 흔쾌히 대답했다.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했다.
“영광입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대화를 듣자 기분이 이상해졌다.
‘한 명은 태후의 노리개이고, 다른 한 명은 공주의 노리개……. 아니지, 감진은 측부이지. 하지만 노리개와 다를 게 없잖아? 모두 얼굴 하나로 여인에게 빌붙은 사내들이지. 아주 남자들의 수치야. 저렇게 둘이 신나게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니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맞나 보군.’
“감진 공자는 참으로 아름다우십니다.”
옆에서 한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의 말투는 칭찬인지, 조롱인지 알 수 없었다.
“공주 전하가 감진 공자를 참으로 아끼나 봅니다. 생일이라고 연회를 이렇게 크게 열어 주다니요. 감진 공자께 술 한 잔 권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술잔을 천천히 들었다.
“감진 공자가 항상 오늘처럼 기쁜 날과 같기를 바랍니다.”
“항상 오늘 같으라고요?”
감진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초(肖) 공자의 뜻은 저더러 매일 전하의 총애를 독차지하라는 말씀입니까?”
“역시 천한 남첩답군. 외모가 좀 반반하나 멍청하여 비꼬는 말도 못 알아들으니 말이야.”
옆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중얼거리는 것처럼 작았으나 대놓고 들으라는 듯이 또렷했다.
“참 뻔뻔스러워.”
초 공자는 안색이 변하더니 고개를 돌리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현령, 조용히 하시오.”
감진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말하고 있는 젊은 남자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매 공자는 저더러 뻔뻔스럽다고 했으나, 당신 형님도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을 무시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제가 형님보다 공주 전하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는 것 같아 질투하시는 겁니까?”
매현령(梅玄嶺)은 싸늘한 눈빛으로 감진을 바라보았다.
“여인에게 빌붙는 게 아주 자랑스러운가 봅니다?”
“현령, 그만하시오!”
초 공자의 어조는 더욱 차가워졌다.
“초 공자, 화내지 마십시오. 저도 화를 내지 않는데 초 공자가 왜 화를 내십니까?”
말을 마친 감진은 고개를 돌리고 매현근을 바라보았다.
“저는 원래 기루 출신이라 어렸을 때부터 신분이 천했지요. 그래서 웃음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이런 제가 공주의 총애를 받는 게 어찌 자랑이 아니겠습니까?”
매현령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매 공자의 형님은 명문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공주부에 들어와 저와 같은 천한 신분이 되셨지요? 차이점이라면 제가 공주 전하의 총애를 더 받는다는 것입니다. 매 공자가 무슨 이유로 절 비웃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진이 냉소를 하였다.
“너! 입 닥치지 못할까!”
매현령은 화를 버럭 냈다.
초운하(肖雲夏)는 얼굴이 시퍼레졌다.
“현령…….”
“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감진은 가볍게 말을 떼더니 정원을 둘러보며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 먼저 저더러 여러분들과 인사를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여러분들은 저를 반기지 않는 것 같군요.”
그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출신이 비천하니 여러분들과 비교할 가치가 없지요. 여러분들이 저를 무시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감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저는 비천한 것을 인정하고 당당하게 공주 전하의 총애와 보호를 받습니다. 자칭 고귀하다고 하는 공자들은 정말 저보다 더 고귀할까요?”
‘이게 무슨 말이지?’
초운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매현근은 매씨 가문의 서자이고 매현령은 적자입니다. 다른 가문에서는 적자와 서자의 계급이 뚜렷하지만 매씨 가문에서는 형제의 사이가 좋아 동생은 형님을 깍듯하게 모신다지요. 다른 사람들은 매씨 가문의 가주 부인이 너그럽고 칭찬하고 매씨 가문의 적자도 선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던데.”
감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아닙니까?”
옆에서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사실입니다.”
감진은 질문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보지도 않고 온화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매씨 가문의 가주 매 대인께서 밖에서 외실(外室)을 두고 있는 줄은 모를 것입니다. 슬하에 아들딸도 한 명씩 두었는데, 이 사실을 매 공자는 아십니까?”
‘뭐라고?’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매현령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아버지의 명성을 너 같은 소관 따위가 더럽히다니? 감진, 지금 바로 해명하는 게 좋을 것이야!”
감진은 혀를 찼다.
그러나 그가 말한 ‘소관 따위’라는 말을 못 들은 척, 우아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진정한 귀공자보다 더 우아했다.
“매 공자, 믿을 수 없다면 직접 알아보십시오. 매씨 저택과 멀지 않은 오동 골목에 소박한 저택이 있습니다. 저택 대문에는 백 년 된 오동나무가 있고요. 그 저택에 누가 사는지 알아보시면 될 게 아닙니까?”
감진은 말을 멈추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 말이 틀렸다면 얼마든지 저를 죽여도 됩니다. 증인도 이렇게 많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주변은 정적에 잠겼다.
그가 단호한 어조로 자신을 죽여도 된다고 하자 사람들은 반박할 수 없었다.
매현령은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 아버지는 조정 대신이다. 너 따위가 감히 능멸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복잡하게 변했다.
“매 대인은 조정 내각의 대신이고 부인과 사이가 좋다던데 이런 일이 날 리는 없지 않을까?”
“그걸 누가 알겠어?”
청색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사람은 연기를 잘하지 않나? 겉보기에 정직한 사람 같다고 진짜 그런 사람이라는 법이 없지.”
이 말에 매현령은 고개를 돌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선기(善祺),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선기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있는 대로 말했을 뿐이지, 당신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라고 한 것은 아닌데 왜 그리 흥분하는 것이오?”
“선기.”
초유는 미간을 찌푸리고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자네까지 보태지 마시오.”
‘보태지 말라고?’
선기는 입을 삐죽거렸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언제 말하라고?’
매 대인은 황제의 신임을 받는 내각 대신이기도 하고 어산서원의 산장(山長)이기도 했다. 만약 이 일이 사실이라면 그의 명성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은 물론이고 매씨 가문의 입장도 난처해질 것이다.
매 대인과 부인은 서로 사이가 좋았다. 서자 매현근이 있기는 했지만 그 또한 매 부인이 시집온 지 삼 년이 지나도록 임신을 하지 못하니 먼저 자신의 측근 시녀를 남편의 통방 하녀로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매현근이 태어난 뒤, 그 시녀는 첩실이 되었고 매 부인도 곧 임신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매 부인이 착해서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이라고 칭찬했다.
매 대인과 부인은 이십 년 동안 서로 존중하고 아꼈기에 사람들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았다. 매씨 가문의 가풍과 교양 역시 흠잡을 데 없었다.
매 대인은 초 숙비의 사촌 오라버니라서 황족 친척인 셈이기에 매씨 가문은 더없이 고귀하다고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