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저 사람은 누구지?
이 년 전부터 야홍릉은 한옥금과의 사이가 점점 좋아지더니 3황자의 편에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육연지는 호국 공주와 적이 될 생각이 없었다.
육연지가 가지고 있는 병권도 혹할 만한 것이었지만, 그의 부왕이 공을 세워 받은 것이니 황제라 해도 정당한 이유 없이 그가 가진 병권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병권은 강한 힘이었다. 그래서 야모침과 야정연이 계속해서 그에게 호감을 보인 것이었다.
육연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야홍릉이 야소숙과 한씨 가문과 적이 될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야홍릉이 황제가 되는 것을 기대하기까지 했다.
‘정말 그렇게 되면 황족 종친과 제경 귀족들의 반응이 참 재미있을 텐데.’
* * *
“육 군왕(郡王)께서 내일이면 저택을 떠나시는데 저택의 일은 다 해결해 두었습니까?”
야홍릉은 진양왕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야홍릉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왕비께서는 문득 마음이 심란하다면 우리 저택에 자주 찾아와도 됩니다. 아니면 아예 한동안 제 저택에서 묵어도 되고요.”
진양왕비가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육연지가 말했다.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하시죠. 설군이 저택에 있기 심심하다면 공주부에 가 있어도 되니까요.”
봉서오가 말했다.
“육 군왕께서 떠나면 저도 여기에 계속 머무르기 무엇하니 저도 아예 공주부로 옮겨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자 육연지와 진설군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돌려 이상한 눈빛으로 봉서오를 바라보았다.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눈빛마저 똑같네.’
봉서오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야홍릉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의 없습니다. 내 저택의 측부들도 심심한 것 같던데, 봉 공자가 그들과 무예를 겨루거나 학식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도 좋을 듯하군.”
‘심심하다고?’
봉서오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그러고 보니 측부 중에 동제 황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뭐 어쨌단 거지?”
봉서오는 턱을 괴고 매혹적인 표정을 지었다.
“영 황자께서는 우리 폐하와 같은 핏줄일 텐데 제가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이 되어 하는 말입니다.”
야홍릉은 다시 말없이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렇게 따분한 질문에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
차를 다 마신 야홍릉은 일어나서 작별을 고하고 저택에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저녁 무렵, 궁에서 내관이 말을 전하러 왔다.
황제가 그녀더러 입궁하라는 말이었다.
야홍릉은 황제가 왜 그를 부르는지 뻔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궁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어서방에 들어서자마자 황제는 그녀에게 통혼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남성국의 병사는 아주 강합니다. 정예 기예병의 실력은 일당 십이지요. 만약 목국이 남성국과 척을 진다면 상황은 위험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남성국이 목국을 도와 금국을 친다면 상황이 위험해지는 것은 금국이 될 것입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황제는 침묵을 지켰다.
“그래서 통혼을 허락한다는 것이냐?”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평온하게 말하는 야홍릉에게서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상황은 틀림없이 나빠질 것입니다. 하지만 허락한다면 상황이 다르게 변할 수도 있지요. 부황께서는 어느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황제는 고민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홍릉도 덩달아 침묵했다.
그러나 이 침묵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황제가 곧 입을 열었다.
“네가 서운하게 되었구나.”
‘서운하냐고?’
야홍릉은 눈빛을 숨기며 미소를 지었다.
“전 서운할 게 없습니다.”
그녀는 서운하지 않았다. 서운함을 느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궁에서 나오니 날이 어두워졌다. 야홍릉은 하늘을 올려보다가 다시 시선을 손바닥으로 돌렸다. 이 손은 전쟁터에서 천군만마를 지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정의 상황도 뒤엎을 수 있었다.
꿍꿍이를 꾸미고 속마음을 감추지 않던 야홍릉도 어느덧 가면을 쓰게 되었으니 말이다.
* * *
고요한 밤이 지나갔다.
일부 사람들은 불안에 잠을 못 이루었겠지만 호국 공주부는 조용한 밤을 보냈다. 그리고 가장 떠들썩한 아침을 맞이했다.
구월 이십육 일, 측부 감진의 생일이었다.
떠들썩한 것을 싫어하던 호국 공주가 측부 한 명을 위해 저택에서 연회를 마련하고 제경의 귀족 적자와 소저 다수를 초대했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그것도 남성국 사신이 호국 공주를 남성국 황제와 통혼시키려고 찾아온 중요한 시점에 호국 공주가 기루 출신의 측부를 위해 연회를 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공주 전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거지? 이렇게 하는 게 남성국 사신의 체면을 무시하는 행위라는 것을 모르시나?’
“야홍릉이어서 이렇게 황당한 짓을 할 수 있지.”
야정연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며 초대장을 책상에 던져버렸다.
“몇 명이나 초대했는지 아시오?”
“아주 많아요.”
왕비 계완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안 가실 건가요? 여동생이잖아요…….”
“나더러 기루 출신의 남첩의 생일 연회에 가라고? 난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오.”
야정연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계완월의 온화한 얼굴에 대뜸 불쾌한 표정이 어렸다.
“전하는 동생 때문에 가는 거지, 남첩 때문에 가는 게 아니잖아요. 야홍릉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을까 걱정되지도 않아요? 이번 기회에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보면 좋잖아요.”
야정연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선왕은 갔나?”
계완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들은 거 없어요.”
“선왕도 가지 않았는데 내가 남첩 생일 축하 연회에 참가했다는 말이 부황에게 전해지면 어떡하겠소?”
야정연은 의자에 털썩 앉더니 화난 얼굴로 말했다.
“홍릉이는 점점 버릇이 없어지는군. 점점 더 심해져.”
계완월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야홍릉은 항상 이랬잖아요? 이러는 거 처음 봐요? 버릇이 없어졌다고요? 세상에 그녀처럼 아무 걱정 없이 제멋대로 굴 수 있는 여인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선왕부의 상황도 똑같았다.
정왕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선왕은 냉소를 하며 말했다.
“홍릉이가 제멋대로 남첩을 총애하는데 나와 무슨 상관이야? 난 남첩 따위와 엮이고 싶지 않아.”
그러나 정왕과 선왕이 잊은 게 있었다.
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태후의 남첩과 손잡은 적이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들은 누구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허리를 굽히고 감진의 생일 연회에 갈 이익을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야모침과 야정연은 야홍릉이 연회를 연 목적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알았다면 남첩의 생일 연회에 참석했을 것이다.
두 황자가 오지 않았지만 공주부는 떠들썩하기만 했다.
연회석은 국화원에 마련되었다. 정원에는 국화가 탐스럽게 피어 있어 장양후부의 국화원보다 못하지 않았다. 비단 장포를 입은 공자들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정원에서 여유를 만끽했고 여인들은 정자나 회랑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었다.
“남성국 사신이 호국 공주를 남성국 황제의 후궁으로 맞이하려고 찾아왔는데 공주 전하는 저택에서 측부의 생일 연회나 주최하다니…….”
정자 안에서 분홍색 긴 치마를 입은 소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얘기가 남성국에 전해지면 남성국 황제가 크게 화를 내지 않을까요?”
맞은편에 있던 두 소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도 마음속으로 야홍릉의 행위가 예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예전에 했던 행위는 기껏해야 제멋대로 구는 것에 그쳤으나, 지금 남성국 사신이 찾아온 상황에서 이러는 것은 남성국을 무시하는 행위로 비춰질 수 있었다.
“제 생각에는……. 어? 저 사람은 누구지?”
말을 하던 소녀는 회랑의 방향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아름다운 공자야.”
다른 두 소녀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더니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푸른색 장포를 입은 공자가 회랑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너른 소매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은 마치 그림 속의 사람이 튀어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별을 머금은 것 같은 그의 눈은 풍류스러움이 흘렀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얼굴에 소녀들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정자에 앉아 있던 세 소녀는 회랑의 공자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공자, 너무 잘생겼네요.”
당(唐) 어사 가문의 당정주(唐靜殊)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웃음이 나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다.
“성함이 뭐죠? 어느 가문의 공자인가요? 다들 아는 사람이에요?”
“첫눈에 반했나 보네요.”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소녀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러나 곧 한숨을 내쉬었다.
“잘생기긴 했는데 아쉽게도 임자가 있는 몸이에요.”
“네?”
당정주와 분홍색 옷을 입은 여인은 고개를 돌리고 말을 하는 연청의(燕淸漪)를 바라보았다.
“임자가 있다고요?”
연청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 공자가 제경 세가 출신이었다면 우리가 여태까지 보지 못했을 리 없잖아요. 그렇다면 공주부의 사람이라는 건데…….”
호국 공주부에서 측부들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한경백과 영정, 매현근은 그들도 모두 아는 얼굴이었다. 그저 자주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감진과 단씨 형제들은 귀족 연회에 잘 참석하지 않아 얼굴을 잘 몰랐다.
오늘 초대받은 사람들은 대다수가 세가 귀족들 사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잘 알지 못해도 눈에 익기 마련인데 이런 장소에 완전히 낯선 얼굴이 나타났다는 것은 신분을 의심해볼 만하다는 말이기도 했다.
당정주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파란색 장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무 아쉽네요.”
정자 안에는 또 정적이 흘렀다.
당정주는 그 공자가 멀어져간 뒤에야 아쉬운 표정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주 전하께서는 우리더러 꽃 구경을 하라고 불렀을까요?”
고개를 들고 둘러보니 사람들이 자유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정원에는 시녀가 누비며 정자와 회랑, 정원의 탁자에 다과상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공주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거야 모르죠.”
열여섯 살의 연청의가 찻잔을 들더니 국화원의 경치를 바라보며 말했다.
“7공주께서는 원래도 알 수 없는 행동을 하잖아요. 저희는 오라면 오고, 앉으라면 앉으면 그만이에요. 다른 것은 묻지 말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