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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98)화 (199/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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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화 추위의 부정행위

야홍릉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검은색 옷을 입고 그녀의 앞에서 공손하게 굴던 어영위의 모습이 가득했다. 그러다 화면이 바뀌더니 천하를 정복하는 패기 어린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곧 이어 곤륜산 아래에서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길을 가고 있는 모습까지 나타났다.

‘애비, 애비, 애비…….’

그녀의 귓가에는 부드러운 청년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야홍릉의 싸늘하던 눈길이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정려가 밖에서 들어오더니 공손하게 보고했다.

“전하, 한 측군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돌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거라.”

“네.”

정려는 대답하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잠시 뒤, 한경백이 침전 밖에서 걸어 들어오며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거라. 무슨 일이냐?”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 드릴 얘기가 있습니다.”

야홍릉은 정려와 시녀들을 내보내고 담담하게 물었다.

“말해 보아라.”

“오늘 서원에서 추위(秋闈, 시험 일종) 부정행위로 의심 갈 만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서원에 허무준(許茂俊)이라는 학생이 있는데 고향은 제경입니다. 작년에 외출했다가 길에서 어려움을 만나는 바람에 한 소년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소년은 상인 가문 출신인데 신분으로는 허무준과 차이가 났으나, 허무준은 그 소년의 품행과 학식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와 친구가 되었지요.

소년의 이름은 심한의(沈寒衣)로, 올해 열여덟 살이 되며 기주(冀州) 상인의 아들입니다. 심한의는 올해 팔월 말에 추위를 보았는데 구월에 나온 합격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허무준이 이 일로 길길이 화를 내며 시험 결과가 잘못됐다고 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가 친구의 낙방으로 화난 줄 알고 달래 주었습니다. 그는 심한의의 실력으로는 시험에 얼마든지 합격할 거라고 했지만 전 그래도 실수할 때가 있다고 위로를 해주었지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밤에 절 찾아왔습니다. 그는 심한의 같은 사람이 향시도 못 넘을 리 없다고 하면서 저더러 혹시 지방 관리 중 다른 짓을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지 알아 봐 달라고 하더군요. 만약 그가 오해한 거라면 달갑게 벌을 받겠다고도 했습니다.”

한경백은 말을 마친 뒤,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그가 이렇게 확신하자 사람을 시켜 올해 기주에서 시험 감독을 맡은 감독관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조사를 해도 특별한 게 없었습니다. 전하께서는 기주 포정사(布政使)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야홍릉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기주의 포정사 말이냐?”

“네.”

야홍릉은 생각에 잠겼다가 실눈을 뜨며 말했다.

“정왕의 장인이자 정왕비의 부친인 계한우(季瀚宇)지.”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맞습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어두워졌다.

팔월 말의 시험은 구월에 결과가 나온다.

오늘은 구월 이십사 일이었다.

기주는 제경과 이천 리나 넘게 떨어져 있어 허무준이 소식을 며칠 늦게 받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심한의가 그렇게 학식이 뛰어나다면 어떻게 고작 추위에 떨어지겠는가?

‘기주 상인의 자제 심한의라…….’

야홍릉은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한참이나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다. 허무준에게 먼저 떠들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고 하거라. 이번 일은 내가 알아보겠다.”

한경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전하도 일찍 쉬십시오.”

야홍릉은 알겠다고 했다.

한경백이 밖으로 나가자 야홍릉의 침전은 다시 정적을 되찾았다.

야홍릉은 홀로 앉아 있다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영영.”

검은색 옷을 입은 그림자가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전하.”

“궁의 상황은 어떠하냐?”

“전하께서 저녁에 궁을 나가신 뒤, 태후는 크게 화를 냈습니다. 장양후는 목숨을 지키느라 사실을 낱낱이 고했고, 정왕과 선왕이 한 짓 모두 들통났습니다. 태후는 화가 나 장양후를 두들겨 팼습니다. 하지만 그저 곤장 몇 대로 끝났지요. 태후궁의 사람들은 태후가 장양후를 아끼는 것을 알기에 모질게 때리지 않고 때리는 시늉만 했습니다.”

야홍릉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태후가 야소숙을 지지하긴 하지만 지금 야소숙의 상황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기에 장양후를 죽여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숭준의 행위도 기껏해야 자신의 앞날을 걱정해 살길을 마련한 것이었다. 태후에게는 그게 그렇게 큰 죄가 아니었다.

태후는 이 이유로 잘생기고 다정한 남첩을 죽이기 아까울 것이다.

태후는 오히려 숭준을 이용해 야소숙을 해치려고 한 야모침과 야정연에게 미움의 화살을 돌렸을 것이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영일을 기주에 보내 향시 내막과 심한의라는 자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거라. 자세할수록 좋다.”

“네, 알겠습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기주 관리와 심씨 가문 사이에 무슨 갈등이 없었는지도 알아보라고 하라.”

“네, 알겠습니다.”

“가 보아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미풍이 불어오자 침전은 또다시 조용해졌다.

오늘 당직은 정란과 첨향이었다.

정려는 야홍릉에게 차를 따라준 뒤, 공손하게 물러났다.

“전하, 일찍 쉬십시오.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 생각해야 할 일이 많아 그녀는 자시가 되어서야 피곤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잠이 들기도 전에 야홍릉은 어둠 속에서 눈을 번쩍 떴다.

밤공기 속에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야홍릉은 누운 채로 베개 아래에서 비수를 꺼내고 고개를 돌렸다.

방에는 등불이 하나밖에 없어 어두웠고 정란과 첨향은 비단 탑에서 자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누워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얼마 뒤, 공기 속에서 흐르던 살기가 점점 사라지더니 피비린내가 풍겼다.

야홍릉은 정란과 첨향을 깨우지 않고 침전 밖으로 나갔다.

넓은 정원에 시체가 여섯 구나 널브러져 있었다.

검은색 옷차림을 보니 사사가 틀림없었다.

“전하.”

영영이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방금 싸우면서 느낀 것인데 이 사사들은 장양후부 출신인 것 같습니다.”

호국 공주부의 암위 수령인 영영인 제경 귀족 저택의 암위와 사사들에 대해 대략 알고 있었다. 야홍릉도 그가 어떤 방식으로 판단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그의 판단 결과를 의심하지 않았다.

말없이 지붕 아래에 서 있던 야홍릉은 공주부에 쳐들어와 암살을 시도하려고 했던 사사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발등이 불이 떨어졌나 보군.’

장양후가 겁을 먹은 것이 분명했다.

며칠간 야홍릉이 그의 예상과 다르게 움직이고 또 사망 예고까지 하자 그는 아주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자객을 보내는 멍청한 짓까지 벌인 것이었다.

야홍릉은 시선을 돌려 끝없이 펼쳐진 어둠을 바라보았다.

순간, 요새 벌어진 일들이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연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그녀는 그저 야정연과 야소숙이 서로 칼을 겨누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야정연은 장양후와 손을 잡고 야모침을 끌어들였다. 숭준과 야모침은 서신을 조작하여 야홍릉의 날개를 꺾으려 했으나 결국 야홍릉에게 반격당하고 말았다.

그들은 야홍릉에게 호되게 당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꿍꿍이까지 들통났고 야모침과 야정연의 음모까지 죄다 까발려지고 말았다.

열심히 머리를 굴려 가며 음모를 꾸몄지만 결국 다른 사람에게 놀아났을 뿐이었다.

사냥꾼인 줄 알았는데 사냥감인 셈이었다.

‘어쩌면 나도 그렇겠지. 내가 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나 역시 다른 사람에게 놀아나고 있는 게 아닐까?’

결국에는 누가 더 생각이 깊은지, 누구의 수완이 더 고명한지에 마지막 운명이 달린 것이었다.

야홍릉은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래도록 계획을 꾸미는 일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실눈을 뜨고 생각에 잠겼다.

‘뭐, 나에게 믿을 만한 조력자가 있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

야소숙이 적국과 내통한 것을 까발렸다는 것은 태후, 황후, 3황자의 이익과 연관된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돌렸다는 말이었다.

그녀에게는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없었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황후와 3황자, 그리고 한씨 가문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 장양후 숭준에게도 시간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야홍릉은 그 사흘의 시간 동안 숭준이 고통 속에서 허덕거리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진작 제거했어야 할 사람들을 제거한 뒤에 그녀는 원하던 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하나 계획할 것이다.

야홍릉은 침전으로 들어갔다.

야소숙과 장양후를 제거하는 것은 야정연과 야모침에게 무언의 경고를 보내는 것이기도 했다. 그들이 그녀를 해칠 음모를 꾸몄으니 그녀도 곧 반격할 생각이었다. 매정한 야홍릉은 마음이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앙심을 품은 일은 잘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짧은 시간 안에 피의 복수를 했다.

‘단단히 준비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나한테 당하고 나면 우아한 기품이고 뭐고 챙길 여유가 없을 테니.’

그렇게 밤이 지나고 새로운 날이 밝았다.

야홍릉은 자객의 일로 잠을 설치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반 시진이 더 많이 자서 진시 삼각에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은 뒤, 야홍릉은 진양왕부로 갔다.

그녀는 공주부의 마차를 타고 당당하게 가서 진양왕부 대문 앞에서 내렸다.

문지기더러 알리라고 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육연지 부부가 직접 나와서 그녀를 맞이했다. 그들은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이러실 것 없습니다. 전쟁 얘기를 나누러 왔을 뿐아라.”

야홍릉이 말했다.

육연지가 손을 들며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이고 진양왕부로 들어갔다.

“공주 전하, 안녕하십니까?”

느릿한 목소리가 하얀색 경포를 입은 봉서오의 입에서 나왔다.

남성국 사신인 그는 온몸이 새하얀 비둘기를 손등에 올려놓고 웃는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일찍 오시다니. 어젯밤 잘 주무셨습니까?”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 그를 훑어보았다.

“어젯밤에 여색을 과하게 즐긴 것 같군요?”

봉서오는 웃음기가 사라지더니 곧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공주 전하, 눈치가 이렇게 빠르시니, 저희 폐하가 앞으로 공주 전하의 눈을 피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을까 걱정입니다. 이것은 행운일까요? 아니면 불행일까요?”

“세상 만물은 상생상극(相生相克)이지요. 남성국의 황제가 멋지고 현명한 모습으로 공주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육연지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봉 공자, 참 아부를 잘 떠십니다. 저조차도 당신이 진심으로 얘기하는 것인지, 거짓을 말하는 것인지 헷갈리니 말입니다.”

하지만 ‘여색을 과하게 즐겼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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