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그녀답지 않은 행동
어린 내관은 당황한 얼굴로 두 황자에게 예를 올렸다.
야정연은 내관이 어느 궁의 사람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너는 어디에서 일을 하느냐?”
“정왕 전하께 아룁니다. 저는 자안궁의 사람입니다.”
‘자안궁?’
야정연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야모침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야홍릉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장군이 천뢰에 들어가서 네가 걱정이 많겠구나. 부황은 영명하신 분이니 아무나 쉽게 죽이지 않으실 거란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라.”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고 야모침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둘째 오라버니.”
야모침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야정연도 시선을 야홍릉에게 돌렸다.
“변방은 전쟁 때문에 혼란스러우나 국고는 아직도 여유가 있습니다. 태의원에도 귀한 약재들이 넘쳐나지요.”
야홍릉은 옷소매를 툭툭 털며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오라버니도 아끼라 하지 마시고 머리에 좋은 약을 팍팍 쓰세요. 병이 심각해진 뒤에야 후회하지 말고요.”
말을 마친 그녀는 야모침의 퍼레진 안색을 무시하고 궁 문을 나섰다.
야정연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태후가 야홍릉을 궁으로 부른 의도를 짐작하기 시작했다.
‘야소숙의 일 때문일까? 아니면 한씨 가문의 일 때문일까?’
야소숙과 한씨 가문은 한배를 탄 셈이었다.
야소숙이 사고를 쳤으니 한씨 가문도 연루될 게 분명했다.
그러니 태후가 야홍릉을 불러들여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야소숙이 적국과 내통한 것은 야모침이 먼저 고발했으나 명확한 증거를 내놓은 사람은 없었다. 야홍릉은 숨기지도 않고 이 일을 황제에게 일러바쳤다.
이 점에서 보면 야모침은 야홍릉보다 용기가 부족했다.
물론, 그건 야정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방금 전, 야홍릉이 야모침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면 야정연은 자꾸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일이 그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만 같아 초조하지만 그것이 뭔지 파악할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야모침은 굳은 얼굴로 한참이나 궁문 입구에 서 있었다. 야홍릉이 한 말을 머릿속으로 생각해 본 그는 야홍릉의 말이 단순한 조롱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야홍릉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한 거지?’
야모침은 의아한 기분으로 왕부에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집사가 뛰어와 호국 공주부에서 초대장이 왔다고 했다.
야모침은 흠칫 놀랐다.
“공주부에서 생일 연회를 연다고?”
집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호국 공주의 측부 생일이라고 합니다.”
야모침은 고개를 끄덕였다.
‘홍릉이는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네 장군이 아직 감옥에서 풀려나지도 않았는데 측부의 생일 연회를 연다고? 그리고 황자들까지 불러?지금이 그럴 때인가?’
전혀 그녀답지 않은 행위였다. 육 개월 만에 돌아온 야홍릉은 점점 그가 알던 여동생이 아닌 것 같았다.
* * *
후궁은 겁에 질려 있었다.
비빈들 사이에서도 암투가 존재하고 황제의 총애를 다투려고 싸움도 많이 일어나지만 작은 다툼에 불과할 뿐이었다.
가끔씩 음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긴 해도 기껏해야 사람 한 명이 죽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황후와 한씨 가문의 세력이 무너지고 3황자가 적국과 내통했다는 죄명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아무리 자애로워도 이번 일로 수많은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고 또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화를 낸다면 조정과 후궁의 사람들 모두 위험한 상황에 놓일 것이다.
줄곧 황후와 3황자를 지지하던 태후는 요즈음 연속된 재앙에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정성 들여 한 화장도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는 못했다.
야홍릉이 자안궁으로 들어오자 양쪽에 있던 시녀와 내관들은 예를 올렸다. 대전 안에서 태후가 널따란 평상복 차림으로 상석에 앉아 있고 숭준이 태후의 뒤에서 관자놀이를 주물러 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야홍릉이 무릎을 굽히고 예를 올리자 태후가 자애로운 목소리로 의자를 내오라고 했다. 야홍릉을 날카로운 목소리로 호되게 꾸짖던 예전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야홍릉은 말없이 의자에 앉았다. 옆에서 시녀가 다과상을 내어 왔지만 그녀는 보는 척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태후마마께서 어쩐 일로 절 부르셨나요?”
태후는 염주를 만지작거리다가 온화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홍릉아, 잘 놀다 왔느냐?”
“나쁘지 않았어요.”
숭준은 눈을 내리깔고 있으면서도 곁눈질로 야홍릉을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그러다 그녀의 대답을 듣더니 웃으며 말했다.
“공주 전하는 기분 전환을 하겠다고 제경을 떠난 첫 번째 행운아십니다. 다른 황자와 공주들이 꿈이나 꿀 수 있겠습니까? 폐하와 태후마마가 7공주 전하를 가장 아끼시는 게 티가 납니다. 태후마마, 안 그러십니까?”
태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황자들은 가끔 정무 때문에 제경을 나갈 수 있다고 해도 공주는 다르지. 자릉이는 평생 제경을 나가지 못할 테니.”
야홍릉은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홍릉아.”
태후가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와 자릉이는 친자매지 않느냐? 황족에서 출가외인이 된 영락이를 제외하면 자매라고는 너희 둘밖에 없는데 사이좋게 지낼 생각은 없느냐?”
야홍릉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없습니다.”
태후는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염주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쓴웃음을 지었다.
“너와 옥금이 사이에 오해가 생기면서 자릉이와도 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단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모두 야씨 황족의 피가 흐르지 않느냐?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지.”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깐 채,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공주 전하는 차가워 보이시나 마음은 따뜻하신 분이시지요.”
숭준이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야홍릉은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7공주와 8공주 전하는 성격이 다르나 모두 야씨 황족의 공주이니 7공주 전하는 절대 8공주 전하가 힘든 모습을 보지 못할 것입…….”
“아니.”
야홍릉이 싸늘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난 야자릉이 힘든 게 좋아. 보지 못할 것도 없지.”
그러자 숭준의 안색이 변했다.
태후의 표정도 일그러졌지만 화를 참으며 말했다.
“홍릉아, 그래도 옥금이와 사랑했던 사이인데 이렇게 모질게 굴어야겠냐?”
‘모질다고?’
야홍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태후께서 오늘 저를 찾으신 이유를 알겠네요. 죄송하지만 전 한씨 가문도, 야소숙도, 황후도 돕지 않을 것이니 그럴 생각은 접는 게 좋으실 것입니다.”
태후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부드러운 척하던 것도 잠시였다. 지금은 그저 야홍릉을 죽일 듯이 노려볼 뿐이었다.
“너…….”
“태후께서 야소숙이 적국과 내통한 것은 제가 일러바친 일이라는 것을 이미 들어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 증거들은 조작된 게 아닌 진짜 증거입니다. 그러나 마마도 아직 모르는 게 있습니다.”
야홍릉은 시선을 돌려 숭준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마마의 저 남첩이 제가 돌아오기 전에 야소숙과 제 휘하의 두 장군이 적국과 내통했다는 증거를 조작했습니다. 그 증거는 지금 부황의 손에 있고요. 물론, 부황은 이미 그 증거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미 결정 난 야소숙의 판결을 뒤엎으려고 하지 마시고 장양후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나 생각해 보시지요.”
말을 마친 야홍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그녀의 말에 숭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무릎을 꿇고 기어서 태후 앞으로 다가갔다.
“태…… 태후마마, 억울합니다. 정말 억울합니다! 신은 태후마마께 죄송한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태후는 어두운 얼굴로 말없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염주를 움켜쥐고 말했다.
“숭준, 어디 한번 해명해 보아라.”
숭준은 창백한 얼굴을 숙이며 말했다.
“저도 핍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 * *
야홍릉은 자안궁에 얼마 앉아 있지도 않은 뒤 바로 황궁을 떠났다.
숭준은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패기 같은 것이 없었지만 똑똑하여 자신의 몸을 지킬 줄 알고 있었다. 그는 위급한 상황에 놓이면 납작 엎드려 피해를 최소화하고 이익을 최대로 늘였다.
그는 이런 강점으로 태후의 총애를 받고 장양후로 책봉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은 의리가 없어 자칫하면 다른 사람을 배신할 수 있었다.
야홍릉은 태후가 그를 어찌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주모자인 황자에 비교했을 때, 숭준은 그저 보잘것없는 인물일 뿐이었다.
그리고 숭준은 최종적으로 야소숙을 사지로 몬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태후는 아무리 화가 나도 자신의 기분을 맞춰주는 숭준을 쉽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몰린 숭준이 야정연이나 야모침을 감싸줄 리 없었다.
그가 둘 중 한 명만 불거나 아니면 둘 다 불거나, 어쨌든 숭준이 불어버린 쪽은 태후의 화풀이 상대가 될 것이다.
남의 손을 빌려 살인하는 수법은 야정연 뿐만 아니라 종종 병사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는 야홍릉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야홍릉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정란과 첨향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책을 펼쳤다.
그러나 오늘따라 책의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남성국에 있는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등극 대전은 이미 끝났을 테고 그는 지금 남성국의 제왕이 되었겠지. 이 시간이면 아직 어서방에서 상주서를 읽고 있을 텐데…’
야홍릉은 책을 내려놓고 침대 머리에 기대어 둘의 사이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목국에 돌아오기 전에 야홍릉은 둘 사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목국에 돌아온 뒤, 그녀는 바쁘게 황궁을 드나들고 적을 상대할 방법에 대해 생각하느라 용수의 생각을 많이 하지 못했다.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른 모습이 검은색 옷을 입고 조용히 서 있는 어영위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과묵하나 그녀의 앞에서는 한없이 공손하던 소년의 모습이 고귀한 남성국 황제의 모습보다 그녀에게 더욱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