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죽음을 예고하다
야홍릉은 딱히 봉서오에게 말을 건네지도, 그와 육연지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지도 않았다.
그녀는 금세 궁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그녀는 때마침 궁에 들어와 태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려던 장양후 숭준과 마주쳐버렸다.
숭준은 보라색 비단 장포를 입어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건장한 몸집과 달리 그의 얼굴은 중성적인 준수함이 돋보였다.
그가 야홍릉을 본 순간, 눈빛이 뜨겁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곧 표정을 거두고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호국 공주 전하.”
숭준은 허리를 굽히고 예를 올렸다.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공주 전하, 만수무강 하십시오.”
야홍릉은 평소에는 그를 본 척도 하지 않고 싸늘한 얼굴로 스쳐 지나가 태후의 노리개인 숭준을 화나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 바로 떠나지 않고 서서 말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숭준은 내심 당황했다.
차가운 야홍릉의 시선에 숭준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체면 때문에 겁먹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주 전하?”
야홍릉은 시선을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장양후 숭준.”
짧은 말 한마디에는 봉호와 이름이 함께 담겨 있었다.
숭준은 흠칫 놀랐지만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공주 전하,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네가 살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
야홍릉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사흘 뒤 자시에 잠들지 말고 네 모가지를 잘 지키고 있는 게 좋을 것이다.”
말을 마친 그녀는 돌아서서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에는 날카로운 기운이 담겨 있었다.
숭준은 굳은 얼굴로 멀어져가는 여인의 마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이 점차 차가워지더니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차가 천천히 다가오자 귓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양후?”
숭준은 고개를 돌리는 순간, 표정이 어두워졌다.
육연지의 옆에서 준수한 공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 입꼬리를 올리고 씩 웃었다.
“진양왕.”
“장양후, 왜 그러십니까? 기분이 좋지 않으십니까?”
육연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숭준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너그러운 사람이라도 ‘사흘밖에 못 산다’는 협박을 듣는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숭준은 육 개월 전, 장양후부에 쳐들어왔던 야홍릉이 떠올랐다. 그녀는 사신처럼 온몸에 음산한 살기를 휘감은 채 그의 앞에 나타났었다.
그날 이후 그는 손목이 꺾인 극심한 고통에 보름이 넘도록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지금 다시 떠올려도 그때의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숭준은 숨을 들이쉬며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억눌렀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봉서오에게 향했다. 그러더니 의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분은…….”
봉서오는 그를 힐끗 훑어보더니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온몸에 분내가 진동하는 것을 보니 여인의 치마폭에 싸여 사는 오입쟁이거나 여자 덕을 보는 남첩일 듯한데, 어느 쪽입니까?”
그 말에 숭준의 안색이 확 바뀌었다.
미소가 굳어진 채로 그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죽고 싶은가 보구나?”
‘죽고 싶냐고? 죽을 때가 되었으면서 모르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
봉서오는 담담하게 미소를 지으며 육연지를 바라보았다.
“제가 잘못 얘기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육연지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제 저택에 가서 중요한 얘기를 계속하지요.”
봉서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변방의 일이 더 중요하지요.”
육연지는 멀지 않은 곳의 마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봉 공자, 제 마차를 타시겠습니까? 아니면 말을 타시겠습니까?”
“다 좋습니다.”
봉서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육연지도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함께 마차를 타시지요. 다른 사신들더러 뒤따르라고 하고 우리는 마차에서 전쟁 얘기를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둘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떠났다.
숭준이 그들에게는 하찮은 존재인 듯,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숭준은 음침한 얼굴로 말없이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멀리서 말을 끌고 있는 일행에게 옮겨졌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무늬가 좀 색다른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자 이런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낯설었다.
방금 육연지와 함께 궁에서 걸어 나온 ‘봉 공자’도 마찬가지였다.
‘저들은 누구지?’
숭준은 방금 육연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변방? 전쟁 얘기? 육연지가 전쟁에 나가려는 건가? 그러면 야홍릉은?’
숭준은 야홍릉이 했던 협박이 떠오르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의 눈빛은 한결 어두워졌다.
‘사흘 뒤 자시?’
숭준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궁으로 들어가면서 오늘 밤 저택에 방어진을 어떻게 쳐야 야홍릉의 침입을 막을 수 있을지 생각했다.
‘오늘부터 아예 태후마마의 궁에 머무를까? 설마 궁에 들어와서까지 날 죽이겠어?’
* * *
구월 이십사 일.
황제는 두 황자와 내각 대신을 어서방으로 불러 남성국 황제가 호국 공주를 맞이하고 싶은 일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이번 일의 당사자인 야홍릉은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저택에서 초대장을 보내며 세가 공자와 귀족 여인들이 이틀 뒤, 측부 감진의 생일 연회에 참가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런 행위에 제경의 귀족 세가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야홍릉은 제경의 귀족들을 초대했다. 진양왕도 초대를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연회에 올지 말지는 진양왕이 알아서 할 일이었으나, 오지 않더라도 초대장을 보내는 게 맞았다.
그래서 진양왕부에 들어간 봉서오도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순간, 그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벙찐 그는 멍하니 육연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호국 공주의 측부요?”
‘내가 뭘 놓치고 있었나?’
육연지는 초대장을 만지작거리며 봉서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모르셨습니까?”
봉서오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대답했다.
“호국 공주의 측부에 대해서 말입니까?”
‘그러니까 폐하가 지금 유부녀를 좋아한다는 말이야? 측부가 남편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부녀인 건 맞지 않을까?’
육연지는 호국 공주에게 측부가 여섯 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어야 하나 망설였다.
‘그래도 남성국 황제가 미리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중에 호국 공주를 맞이하고 나서 자신을 속였다고 난리를 칠지도 모르니.’
감진의 생일 연회까지 이틀의 시간이 있기에 야홍릉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저택에서 쉬면서 봉서오와 변방의 일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이 되자 궁에서 내관이 찾아왔다.
“태후마마께서 공주 전하를 오랫동안 보지 못하여 그리우셨다며 궁에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심부름을 온 내관은 어린아이였다.
겁을 먹은 것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웠다고?’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싸늘하게 거절하지 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
이 말을 들은 내관은 아주 기뻐했다. 그는 야홍릉이 이처럼 협조적으로 나올 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허리를 굽신거리며 말했다.
“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녀오십시오.”
그는 이번 심부름이 아주 어렵다고 생각했다.
목국 전체에서 호국 공주의 성격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야홍릉은 태후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다.
황후가 감금당하고 한씨 가문에 큰 화가 닥친 것도 야홍릉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황제는 당분간 한씨 가문에게 죄를 물을 생각이 없었다. 3황자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도 있었고 지금 중요한 것은 변방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전쟁의 일에 마음이 쏠려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전쟁과 연관된 일이라면 태후와 황후는 물론이고 황제도 싸늘하기 그지없는 호국 공주의 기분을 맞춰 주어야 했다.
그런데 누가 감히 호국 공주를 건드리겠는가?
그래서 내관은 야홍릉을 궁으로 모셔가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총관의 지시인데 그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내관은 오늘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각오도 했다. 공주를 모셔오지 못했다고 태후가 화나 그를 때려죽이라고 지시하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호국 공주가 순순히 가겠다고 할 줄이야!
야홍릉은 침전으로 돌아가 검은색 장포로 갈아입었다. 조금 넓은 암홍색 허리띠가 그녀의 가는 허리를 더욱 부각시켰다.
정려는 야홍릉의 옆에 서서 옷매무시를 다듬어 주었다.
야홍릉은 한참이나 거울을 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궁에 다녀올 테니 따라올 것 없다.”
그 말을 들은 정려는 망설이다 말했다.
“전하…….”
야홍릉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침전을 나가버렸다.
정려는 야홍릉의 뒷모습을 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성국에 있을 때, 그녀는 호국 공주가 과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목국으로 돌아온 다음에야 그녀의 성격이 얼마나 강하고 딱딱한지 알게 되었다.
이런 성격의 여인은 절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미모의 측부를 여섯 명이나 데리고 있으면서 미색에 빠지지 않다니… 아니지, 절세미인을 눈앞에 가져다 놓아도 공주 전하는 꿈쩍도 하지 않을 거야.’
야홍릉은 진지한 얘기를 하는 경우가 아니면 측부를 아예 무시했다.
정려는 야홍릉이 남성국 봉왕부에 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야홍릉은 성미를 죽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남성국이 그녀의 영역이 아닌 이유도 있었고 용수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함인 것도 있었다.
정려는 야홍릉이 남성국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야홍릉은 남자에게 기대어 사는 여인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는 규정이나 세속의 속박에 갇혀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실 종친들이 자꾸 찾아와서 귀찮게 구니 공주 전하가 짜증을 낸 거구나. 봉왕 전하더러 달래달라고 투정을 부린 게 아니고. 공주 전하는 차갑고 딱딱한 분이야. 애교는 물론이고 투정을 부리지도 않지. 봉왕 전하는 앞으로 이분과 잘 살 수 있을까?’
야홍릉은 궁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입구에서 마침 궁에서 나오던 야모침과 야정연을 만나게 되었다. 둘은 어서방에서 얘기를 마치고 나오던 중이었다.
야홍릉을 본 그들은 깜짝 놀랐다. 야모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궁에 들어가려고?”
야홍릉은 싸늘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