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예물은 금국이다
육연지가 다친 것은 맞으나 상처가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황제는 몸에 좋은 진귀한 약재를 하사하고 푹 쉬라고 했다.
구월 이십 일 아침.
변방에 갔던 신은전의 영위는 나심과 봉양을 데려와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둘은 천뢰에 들어가 나신, 봉우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넷이 동시에 천뢰에 갇힌 일에 대해 야홍릉은 더 이상 물어보지도 않고 초조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녀는 매일 궁에 들어가 황제와 전쟁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을 제외하고 다른 시간에는 공주부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꽃구경을 했다.
한편 측부들을 불러 함께 차를 마시는 등 여유로운 나날을 즐겼다.
사정을 모르는 대신들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고민에 빠졌다.
구월 이십삼 일 아침.
황제는 어두운 얼굴로 조례에 올랐다. 폭풍우가 휘몰아치기 전의 징조였다.
조정 대신들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서신을 던지며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다들 보시게. 이게 짐의 아들이 한 짓이네! 짐이 대단한 아들을 키웠더이다. 이 황위를 탐내는 거로도 모자라 적국과 내통까지 하다니. 안중에 이 황제가, 이 아비가 있기나 한가? 불효막심한 이 녀석을 어찌하라는 말인가?!”
황제는 화가 나 황금 의자의 손잡이를 내리쳤다.
그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조정 대신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제야 황제가 그동안 왜 매일 우울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다급히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신들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신들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노여움을 푸십시오!”
대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사죄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평소 위엄을 부리던 대신들은 제왕에게서 뿜어 나오는 한기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적국과 내통한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였다.
아무리 황자라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적국과 내통한 것은 예로부터 큰 죄였다. 연루되는 사람도 수천, 수만 명에 달할 것이다.
그들의 눈앞에는 피로 물든 사형장이 떠올랐다.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야정연과 야모침은 대신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도 겁을 잔뜩 먹었다.
이 결과는 그들이 예상하던 것이었으나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일이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불안감이 몸을 감싸자 그들은 소름이 돋았다.
황제는 화를 한참이나 낸 뒤에야 싸늘하게 지시를 내렸다.
“육연지더러 궁에 들어오라고 하여라! 조례는 이만 마칠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라졌다.
대신들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육연지가 궁으로 들어왔다.
이 말에 야정연과 야모침은 왜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알게 되었다.
육연지.
이는 그들의 예상에 없던 이름이었다.
그에게 병사가 있었지만 황제는 줄곧 진양왕부가 서서히 몰락의 길로 가기를 바랐다. 작위도 삼 대까지 이어지다 사라질 것이고 진양왕도 제경의 귀족에서 이름이 지워질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야소숙의 죄명을 밝힌 다음 육연지를 궁으로 들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게 무슨 뜻이지?’
어쩌면 육연지가 변방으로 가서 야소숙의 수장 자리를 대체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야홍릉이 변방으로 갈 것이라는 그들의 예상과 완전히 다른 결과였다.
이 또한 야홍릉이 벌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홍릉이는 무슨 생각이지? 왜 육연지를 추천한 거야? 현갑군의 병권을 다시 가지고 싶지 않은가? 아니면 그녀의 목적은 제경에 남아 제경의 상황을 통제하려는 건가?’
야정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야홍릉의 생각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일은 정말 야정연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육연지가 궁에 들어와 황제를 만난 다음 날 조례에 육연지는 야홍릉과 함께 대전에 나타났다.
황제는 육연지를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이틀 뒤에 변방으로 가라고 명했다.
그리고 신은전의 영위를 시켜 금군과 함께 변방으로 가서 야소숙을 잡아 오라고 했다.
황후와 8공주 야자릉은 전날에 이미 감금당해 자유를 잃었다. 육연지를 대장군으로 임명한 뒤, 황제는 또 한씨 가문의 사람들을 잡아들이라고 했다. 한경백을 제외한 한씨 가문의 사람들을 모두 조력 혐의로 천뢰에 넣으라고 명했다.
제왕이 한 번 화를 내면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다치는 법이다.
한씨 가문의 결말에 대신들은 놀랍지도 않았다.
3황자가 적국과 내통한 것에 비하면 이것은 충격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일이 잠잠해지기도 전에 또 다른 일이 터졌다.
조례가 한창 시작되고 있는데 다른 소식이 황궁에 전해진 것이다.
조정 대신들의 시선은 그 사건에 쏠리게 되었다.
“아룁니다.”
대전 밖에서 어림위(禦林衛)가 뛰어오더니 무릎을 꿇었다.
“남성국의 사신이 공문서를 보내며 폐하를 뵙겠다고 청하고 있습니다!”
‘남성국의 사신이?’
대전 안은 즉시 침울한 분위기가 드리워졌다.
대신들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할 말을 잃고 서로 눈치를 살폈다.
황제도 경악한 듯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내관 손평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남성국 사신이 왜 지금 목국에 왔을까? 뭘 의미하는 것 같으냐?”
이 질문은 손평에게 하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 물어도 그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황제는 여강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남성국의 기예병들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다.
남성국의 사신이 갑작스레 찾아왔다는 말에 그는 당황했지만 지체하지 않고 어림위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바로 궁으로 들이거라.”
말을 마친 그는 시선을 돌렸다.
“넷째야, 승상과 함께 궁을 나가 남성국 사신을 모시거라.”
야정연과 승상은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어림위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밖에 나갔다.
대신들은 정무를 논할 기분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남성국 사신이 찾아온 목적을 추측하기 바빴다.
야모침은 고개를 돌려 육연지를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형님이 남성국에 축하하러 가지 않았습니까? 남성국의 신임 황제가 이제 막 등극했는데 왜 이런 시기에 사신을 보낸 거지요? 무슨 의미일까요?”
육연지는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야홍릉을 돌아보았다.
야홍릉은 모르는 척, 침묵을 지켰다.
반 시진 뒤, 야정연과 승상은 남성국의 사신을 데리고 대전에 돌아왔다. 대신들은 고개를 돌리고 각자 다른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첫인상은 모두 남성국의 사신 공자가 참 잘생겼다는 것이었다.
빛나는 아름다운 눈과 잘생긴 이목구비를 가진 그는 하얀색 장포를 입었다.
그는 사신보다 소녀들의 마음을 빼앗는 풍류스러운 귀공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백의 공자는 대전으로 들어가더니 대신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우아하게 예를 올렸다.
“남성국 대신 봉서오가 목국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저희 폐하께서 목국 호국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싶어 하시니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양국 동맹을 맺으려고 찾아왔습니다.”
말을 마치자 대전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대신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시선을 준수한 공자에게서 돌릴 줄 몰랐다.
그들은 복잡한 눈빛으로 오늘 처음 조례에 참가하러 온 야홍릉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뒤, 또 시선을 황제에게 돌렸다.
‘남성국의 사신이 그의 황제가 호국 공주를 황후로 맞아들이고 싶다고 얘기했다고? 이게 무슨 소리야?’
황제도 잘못 들은 줄 알고 한참 망설이다가 물었다.
“사신의 뜻은 남성국의 신임 황제가 짐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는 말이오?”
봉서오는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러합니다.”
“짐에게는 여식이 둘이 있소. 남성국 황제가 맞이하고 싶은 여인은 짐의 일곱째 딸인 호국 공주 야홍릉이 맞소?”
황제가 물었다.
봉서오는 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호국 공주가 맞습니다. 전에 전쟁터에 나가셨던 분이지요.”
그러자 대신들은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호국 공주는 차가운 여인인데 왜 이런 여인을 후궁에 들이려는 거지?’
“그러나…….”
황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재차 확인했다.
“얼마 전에 남성국과 동제가 통혼한다는 소식이 천하에 전해지지 않았소? 짐이 잘못 안 것이오?”
“폐하께서 잘못 아신 게 아닙니다.”
봉서오가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성국과 동제가 통혼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희 폐하가 목국 공주를 맞아들이는 것은 별개이지요.”
그 말에 공기가 또 조용하게 변했다.
황제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폐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목국과 금국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시기라서 남성국은 성의를 표시하기 위해 목국의 전쟁을 돕겠다고요. 금국의 강산을 호국 공주를 맞이하는 예물로 드리면 어떠냐고 물으셨습니다.”
봉서오는 한결같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폐하의 뜻은 어떠하신가요?”
그 말에 황제와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금국을 예물로 준다고? 허풍이 너무 심하…… 아니지, 예물이 너무 대단한 게 아닌가? 금국을 이겨버리겠다고도 아니고 금국의 강산을 예물로 준다고? 그 말은…… 금국을 멸해버려서 앞으로 목국과 싸울 일이 없게 만들겠다는 건가?’
남성국은 병력과 국력 모두 강했다.
그들은 남성국이 이를 못 해낼까 걱정된 게 아니라 왜 이렇게 큰 예물을 주는지 그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절대 이익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되겠군.’
“하지만 남성국은 이미 동제와 통혼하지 않았소?”
황제는 침묵에 잠겼다가 말했다.
“동제의 공주는 남성국 황제의 후궁에서 어떤 자리요?”
봉서오가 대답했다.
“폐하께서 황후로 맞이하셨습니다.”
‘그럼 호국 공주는 남성국에 정실로 들어갈 수 없는 거야?’
대신들은 야홍릉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홍릉은 이 모든 일이 자신과 상관이 없는 일인 듯, 무표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야홍릉을 힐끗 본 뒤, 시선을 봉서오의 준수한 얼굴에 돌렸다.
“그럼 남성국의 황제는 짐의 여식에게 어떤 자리를 주겠다고 했소?”
“공주 전하의 자리 말입니까?”
봉서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께서 이제 막 등극하셔서 후궁의 자리는 모두 비어 있는 상태입니다. 재인, 미인, 소의(昭儀), 첩여(婕妤)… 다 비어 있습니다. 공주 전하께서 마음대로 고르시면 될 것입니다.”
그 말에 대신들의 안색이 구겨지고 말았다.
목국은 남성국보다 병력이 약하나 그래도 대국인데 어찌 공주를 소의, 미인, 첩여, 재인 자리에 보낸다는 말인가?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비빈 자리도 모두 비어 있으니 마음대로 고르시면 됩니다.”
봉서오가 이어서 말했다.
“만약 공주 전하께서 황후의 자리를 원하신다면 폐하께서도 최대한 만족스럽게 대하실 것입니다.”
신하들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