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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92)화 (19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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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화 고육계를 쓰다

“정란과 첨향은 이만 가서 쉬어라.”

야홍릉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려는 오늘 여기서 당직을 서고.”

정란과 첨향은 예를 올렸다.

“네, 이만 가보겠습니다.”

둘은 공손하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침전 밖에서 지키고 있는 시녀들과 함께 사라졌다.

정려는 창가로 가서 조용히 물었다.

“공주 전하, 물 드실래요?”

“아니.”

“그럼.”

정려는 창밖을 힐끗 보며 말했다.

“다리 위에 있는 저 공자는…….”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거라.”

“……네.”

“너도 탑에서 좀 쉬거라. 이따 필요하면 부를 테니.”

야홍릉이 눈을 뜨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부르지 않는 한, 무슨 일이 생겨도 신경 쓰지 말아라.”

정려가 대답했다.

“네.”

말을 마친 그녀는 병풍 가까이에 놓인 비단탑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야홍릉이 말한 것이 밖에서 무릎 꿇고 있는 공자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 목국으로 온 정려는 낮에 여섯 명의 측부를 본 것만으로도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한옥금의 일도 그녀에게 궁금증으로 남아 정려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침전 안은 등불로 환했다.

창밖에서 환한 달빛이 들어오자 방안이 은빛으로 가득해졌다.

깊은 밤.

조용한 침전에 미풍이 살짝 불었다. 무공을 연마한 정려는 경계심이 들며 일어나서 수비하려고 했다. 하지만 내전에서 야홍릉의 익숙하고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구나.”

정려는 당황했다.

‘누가 왔다는 거지?’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곧이어 차분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밤에 잠을 깨워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다.”

야홍릉이 침대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며 담담하게 말했다.

“일어나거라.”

“감사합니다, 공주 전하.”

정려는 놀랍고 당황했다.

‘이 남자는 누구지? 야심한 시각에 공주의 침전에 쳐들어왔는데 공주 전하는 놀라지도 않았어. 올 거라고 예상한 것처럼…….’

“여강 남쪽의 기예병은 전하를 호송해 온 자들입니까?”

야홍릉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신은전의 정보가 꽤 빠르구나.”

남자가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빨라야 할 때는 빠르고 늦어야 할 때는 느립니다.”

그 말에 내전은 잠깐 정적에 잠겼다.

야홍릉이 물었다.

“나심과 봉양의 상황은 어떠하냐?”

“두 장군은 모레쯤이면 제경에 도착할 듯합니다.”

“야소숙 옆에도 감시하는 영위가 있느냐?”

“네.”

남자가 대답했다.

“3황자의 움직임을 모두 감시하고 있으니 전하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야홍릉은 걱정하지 않았다.

전생에서 그녀의 부황은 그녀에 대한 의심 하나만으로 그녀를 죽이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지금 야소숙이 동제의 황제와 서신을 주고받고 음모를 꾸민 증거가 떡하니 있는데 황제가 어찌 죽이지 않을 리 있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야소숙과 한씨 가문의 결말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었다.

“황후와 한씨 가문은 요즘 어떠하더냐?”

“그들은 지금 꼼짝하지도 못합니다.”

중년 남자의 목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한씨 가문과 황후는 모두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한옥금은 제경 세가의 공자들과 자주 왕래하고 있으나 별 쓸모가 없습니다. 한옥금보다 한경백의 명망이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제경의 수많은 귀족 공자들도 그와 왕래하고 있습니다.”

한경백은 서자이나 어산서원에 들어간 뒤로 스승이 되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를 무시했으나 그의 넓은 학식과 인품을 알게 되면서 차차 그에 대한 편견을 접게 되었다.

스승을 존경하는 것이 어산서원의 규칙이었다. 편견이 사라지자 호국 공주의 측부라는 신분도 약간의 작용을 일으켰다. 학생들의 스승인데다 호국 공주부가 뒤를 지켜주니 감히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어산서원에 다니는 아들이나 동생이 있는 세가에서는 높은 직의 관리나 고귀한 적자를 막론하고 한경백을 보면 예를 갖추어야 했다. 한경백이 자식이나 동생의 스승인데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한경백의 학식에 감탄하는 한편, 호국 공주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귀족 세가의 대인과 공자들은 멍청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상황 파악을 할 수 있기에 기분대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경백이 귀족들 사이에 차차 스며들 것이라고 야홍릉은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한옥금이 밖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데 공주 전하의 뜻입니까?”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혹시 공주께서는 아직도…….”

“난 그에게 마음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가 죽기 직전에 고통을 좀 더 느꼈으면 할 뿐이지.”

야홍릉이 싸늘하게 말했다.

한옥금이 찾아오지 않으면 그녀도 굳이 찾아가 그를 괴롭힐 생각이 없었다. 한씨 가문 사람들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옥금이 아직도 말도 안 되는 희망을 품고 찾아온 이상, 야홍릉도 기꺼이 그를 괴롭혀줄 생각이었다.

황족 귀족들은 말 몇 마디로 사람을 사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야홍릉은 툭하면 권력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사람을 괴롭힐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중년 남자는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공주 전하, 예전과 좀 달라지신 듯합니다.”

‘내가 달라졌다고?’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담담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다 변하기 마련이지.”

중년 남자는 그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화제를 끝냈다. 잠시 뒤, 그가 말했다.

“폐하께서 마음에 두신 태자 후보가 누구인지 전하께서도 눈치채셨겠지요?”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야천란.”

야천란은 듬직하고 조용하며 열심히 일에 몰두할 뿐, 사람들을 모아 정치질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는 황제가 걱정할 만한 병권도 없었고 또 신하들과 사이도 좋았으나 너무 친밀하지도 않았다.

황제의 첩자가 곳곳에 있는데 그것을 어찌 모르겠는가?

야소숙은 황후의 적자에 한씨 가문까지 등에 업어 가장 유력한 태자 후보였다.

하지만 적국과 내통한 일이 드러나자 태자는커녕 목숨을 지키기도 힘들게 되었다.

야정연은 속이 깊어 보이나 총명하지 않았다. 그는 장양후 숭준과 왕래하며 야모침을 이용해 야소숙을 상대하려고 했다. 그리고 또 숭준을 이용해서 야모침을 상대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똑똑한 사냥꾼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도 남에게 놀아나는 멍청한 사냥감에 불과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는 게 야정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황자들 중 태자 후보는 야천란, 야소숙, 야모침과 야정연뿐이었다.

그들의 평소 행실이 어떤지 황제는 뻔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황제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야홍릉은 실눈을 뜨고 말했다.

“내 어머니와 어떤 사이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그동안 도와줘서 고맙다. 능묵을 내 곁에 보낸 일도…….”

중년 남자는 이 말을 듣고 옛날 생각이 나는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능묵의 일은 제 공로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그의 계획에 따른 것뿐이지요. 그야말로 전하를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입니다. 전하,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십시오.”

말을 마친 뒤, 그는 고개를 돌려 창밖의 달빛을 바라보았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날이 밝자면 아직 시간이 있으니 전하도 좀 더 쉬십시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침전은 곧 조용해졌다.

정려는 일어나 내전으로 들어가 침대에 기대앉은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전하.”

야홍릉은 시선을 거두고 생각에 잠겼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등불을 밝히거라.”

“네.”

한옥금은 밤까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다리가 심하게 아프더니 이제는 굳어버렸는지 다리의 감각이 사라졌다.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 공주의 침전이 갑자기 밝아졌다.

그는 바짝 긴장하며 다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기대 어린 시선으로 공주의 침전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참 기다려도 그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한옥금은 화가 났다. 그는 속으로 야홍릉이 모질다고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침전 안의 사람이 창문으로 그를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아 그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무릎이 아파서 견디기 힘들었다.

등불을 밝힌 뒤에도 야홍릉은 일어서지 않았다. 정려가 그녀에게 물을 따라주자 물을 마신 야홍릉은 다시 눈을 감았다.

정려는 찻잔을 받아 든 뒤, 공손하게 물었다.

“전하, 불을 끌까요?”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다.”

“네.”

정려는 비단 탑으로 돌아가다가 무심결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환해서 무릎 꿇은 남자의 표정이 잘 보였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표정을 보니 움직이고 싶어도 꾹 참는 듯했다.

정려는 야홍릉의 의도를 파악하고 속으로 흠칫 놀랐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아침까지 푹 잤다.

한옥금은 밖에서 밤새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하얀색 경포를 입은 감진이 홍릉원에 들어오다가 다리 위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을 보더니 흠칫 놀랐다.

그리고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측부, 어쩌다 공주 전하의 심기를 건드…….”

그러나 가까이에 와서 한옥금의 얼굴을 본 감진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말투를 바꾸었다.

“아, 그쪽이었군요.”

그의 표정은 비웃음으로 변했다.

그리고 고혹스러운 자세로 한옥금의 옆을 지났다.

한씨 가문의 적자인 한옥금은 이런 무시와 냉대를 처음 받아보았다. 게다가 상대는 평소 그가 거들떠보지도 않던 기루의 소관이었다. 순간 그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직 겨울은 아니었지만 밤이 되면 꽤 쌀쌀했다. 밤새 무릎을 꿇고 있었더니 다리가 아프고 저렸고 얼굴이 얼어서 퍼렇게 변했다. 온몸이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고 심지어 몇 군데는 감각도 없었다.

오랫동안 참았던 화가 곧 폭발할 것 같았지만 그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야홍릉이 그에 대한 시험이기를 바랐다.

그에게 내린 벌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 또한 그에게 화난 야홍릉의 화풀이라고 생각했다.

야홍릉이 화풀이를 하고 난 뒤 다시 화해할 수만 있다면 이 정도 고통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아직도 한옥금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는 것입니까?”

감진이 병풍에 기댄 채, 야홍릉이 옷을 입은 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자가 고육계를 쓰는 듯합니다. 얼굴이 퍼렇게 얼어서는…… 저 귀하게 자란 몸이 밤새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무릎도 다 부었겠지요. 쯧쯧, 참 가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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