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불쌍하긴 하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담하게 되물었다.
“셋째 오라버니와 변방의 전쟁에 대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황제가 대답했다.
“난 너를 변방으로 보내 금국을 무찌르게 하고 싶구나.”
‘야소숙은…….’
변방에 대체할 수장이 생겼으니 당연히 야소숙을 불러들여 죄를 물어야 했다.
그 말을 들은 야홍릉은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차를 마셨다.
“왜 그러냐?”
황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싫으냐?”
야홍릉은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질문했다.
“부황께서는 육연지를 내보낼 생각은 하지 않으셨나요?”
황제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는 얼마 전에 자객을 만나 폐를 찔렸다. 당분간은 전쟁터에 나갈 수 없을 거야.”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어쩌면 부황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야홍릉이 시선을 들고 평온하게 말했다.
“하지만 목국의 존망에 연관된 일이니 말을 해야겠네요.”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냐? 해보아라.”
“육연지는 문무에 능하고 지혜로운 무장입니다. 그를 쓰지 않는 것은 너무 아깝습니다.”
말을 마친 야홍릉은 황제의 차가워진 표정을 보고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 병사들을 이끌고 변방으로 간다고 해도 목국이 무사해지는 건 아니지 않나요?”
그녀의 말에 근정전은 정적에 잠겼다.
황제는 그녀의 말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을 눈치채고 물었다.
“무슨 뜻이냐?”
“셋째 오라버니가 동제의 황제와 몰래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것은 오라버니가 야심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도 동제가 목국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요즘 남성국이 동제의 공주와 통혼한다고 떠들썩하던데 그 소식이 뭘 의미하는지 부황께서 잘 생각해 보시지요. 천하가 크게 혼란스러워질 테니 부황께서도 미리 준비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황제는 깜짝 놀랐다.
야홍릉의 말은 찬물처럼 그를 흠뻑 적셨다.
순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남성국과 동제가 통혼한다는 게 뭘 의미하겠어? 남성국이나 동제 중 한 나라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목국은 동시에 강적 둘을 상대해야 하는 거야.’
그는 방금까지만 해도 목국에 쓸만한 무장이 없는 사실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나 사실 목국에 쓸만한 무장이 없는 게 아니라 그가 걱정 없이 쓸 무장이 없는 것이었다.
육연지는 그의 부친의 친왕과 병권을 이어받았다.
황제는 그가 이렇게 조용히 지내기를 바랐다.
이렇게 삼 대째 이어지다 보면 제경의 귀족들 사이에서 묻히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야홍릉의 말을 들은 황제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에는 강한 군사도 필요하지만 그들을 이끌고 전쟁터에 나갈 수장이 더 필요했다. 무장 한 명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야홍릉이 제경을 떠난다면 황제는 다시 전쟁터에서 일어나는 변수를 상대할 수 없어 골머리를 잃을 것이다.
‘그러나 선택지가 하나 더 많아진다면?’
황제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나라를 안정시키려면 강한 무장이 꼭 필요합니다.”
야홍릉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진 않은 듯한 차분한 어조였다.
“평화로운 상황에도 병사들에 대한 훈련을 멈추지 말아야 하고요.”
강한 병사들을 키우려면 일단 무장을 믿어야 한다. 무장이 병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계속 경계만 한다면 제왕과 신하가 어떻게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겠는가? 신하들이 또 어찌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나라를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는가?
야홍릉은 뒤의 말을 하지 않았으나 뜻은 전달되었다.
황제의 안색은 좋지 못했다.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의 속생각이 들춰지자 그는 제왕의 존엄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는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지.”
야홍릉은 시선을 내리깔고 차를 마셨다. 입을 다물어야 할 때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황제의 역린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황위만 노리고 있는 황자들이 황제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을 쉽게 할 리 있겠는가?
야홍릉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성격이 원래 이런데다 또 지금 상황이 특별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적정선에서만 말을 하기에 황제는 기분이 좋지 않아도 그녀의 말이 맞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이렇게 제멋대로 할 말을 다 하기에 황제는 더욱 안심할 수 있었다. 그녀가 다른 황자들처럼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이유도 더 있었지만 야홍릉은 부황의 속마음을 아주 잘 꿰뚫어 보았다.
예전에 그녀가 이렇게 하지 않은 건 바라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바라는 게 생겼으니 그녀는 적당히 허리를 숙일 생각이었다.
황제의 속마음을 들여봐야 할 때는 도도함을 버려야 했다. 최후에 목적에 이를 수만 있다면 그녀는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 상관이 없었다.
근정전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굳어졌다. 정적이 한참이나 지속되었다.
“육연지는 다쳤다. 그래서 내가 그를 변방으로 보낸다고 해도 갈 수 없을 것이야.”
황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부황, 그가 다쳤다고 하는 걸 정말 믿으시는 건가요? 전 그가 존재감을 낮추려고 애쓰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야홍릉이 대답했다.
‘이게 부황이 원하는 거잖아요?’
황제는 할 말을 잃었다. 잠시 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따 내가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겠다. 만약 그가 괜찮으면 네 제안도 생각해 보겠다.”
황제는 한참 있다가 시선을 들고 야홍릉을 바라보며 물었다.
“홍릉아, 그동안 네가 어디에 있었는지도 묻지 않았구나. 신은전에 지시해 네 행적을 알아보게 했는데 육 개월이 지나도록 알아낸 게 없었단다. 그리고 넌 그 증거들을 어디에서 얻은 것이냐?”
야홍릉이 대답했다.
“전 제경을 떠난 뒤, 편히 움직이려고 남장을 하고 다녔습니다…….”
“폐하.”
근정전 밖에서 시위가 들어오며 야홍릉의 말을 잘랐다.
“신은전 대교습이 뵙기를 청합니다.”
야홍릉은 하던 말을 멈추었다.
황제가 다급히 말했다.
“들라 하라.”
“네.”
황제는 시선을 야홍릉에게로 돌렸다.
“먼 길 왔으니 힘들지 않느냐?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 푹 쉬거라. 얘기는 내일 다시 하자꾸나.”
야홍릉은 일어서며 찻잔을 손평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녀가 돌아설 때, 검은색 옷을 입은 중년 남자를 보았다. 마른 몸매를 가진 그에게서는 날카로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야홍릉의 무표정한 얼굴과 마주친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주 전하.”
야홍릉도 목례를 건넨 뒤, 돌아서서 떠났다.
“폐하, 방금 영위가 가져온 소식인데 여강(麗江) 근처에 기예병들이 주둔하고 있답니다.”
“뭐라고?!”
황제는 안색이 급변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된 일이냐?”
“영위의 말로는 남성국 기예병인 것 같은데 아직은 그들이 온 목적을 모르겠답니다. 그러나 인원수가 대략 만 명쯤…….”
대전의 입구까지 걸어간 야홍릉은 대교습의 보고를 듣고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발걸음을 대전 밖으로 옮겼다.
“홍릉아.”
대전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야정연은 야홍릉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보자 담담하게 말했다.
“그동안 오느라고 힘들었을 텐데 내가 완월더러 음식을 준비하고 기다리라고 했단다. 우리 집으로 가서…….”
“피곤하네요. 저택으로 돌아가 쉬고 싶어요. 오라버니의 저택에 가서 밥을 먹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야홍릉이 말했다.
야정연은 그녀가 떠나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순간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 * *
야홍릉이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경의 귀족들은 호국 공주가 돌아왔다는 것을 다 알게 되었다.
나신과 봉우가 천뢰에 갇힌 일에 대해 황제는 사람들에게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으나 다른 경로를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권신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야홍릉이 뭔가를 하기를 기다리며 나신과 봉우를 빼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 기다렸지만 야홍릉이 저녁 무렵에 궁에 들어가서 황제와 반 시진 정도 얘기를 나누고 다시 공주부로 돌아갔다는 소식밖에 받지 못했다.
밤이 되어서야 야홍릉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침전의 푹신한 침대에 누워 쉴 수 있었다.
정려와 정란, 첨향 등 시녀들은 옆에 서서 조용히 있었다.
이때, 침전 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고 집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한 공자가 뵙기를 청하십니다.”
말을 멈춘 그는 다시 덧붙이며 말했다.
“한씨 가문의 2공자 한옥금입니다.”
야홍릉은 못 들은 척했다.
정려는 한씨 가문의 2공자를 모르고 있었지만 공주부에 한경백이라고 하는 측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옥금은 또 누구지?’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는 야홍릉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일깨웠다.
“전하, 집사가 한씨 가문 2공자가 만나 뵈러 찾아왔대요.”
그녀의 말에 침전에 있던 다른 두 시녀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려는 의아했다.
‘왜 그러지?’
야홍릉은 눈을 뜨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밖에서 무릎 꿇고 기다리라 하여라.”
고 집사도 그녀의 말에 조금 놀란 듯했으나 곧바로 지시를 따랐다.
“네, 알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기다리라고?’
정려는 그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한씨 가문의 2공자 신분이 궁금했다.
그녀는 창밖으로 멀어져가는 고 집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 고 집사는 다시 돌아왔다. 그의 옆에는 하얀색 장포를 입은 남자가 따르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본 정려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경백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다.
‘좀 다르긴 하네. 한경백보다 더 부드럽고 이목구비도 더 잘생겼으나 분위기가 좀, 좀…… 가식적인데?’
정려는 미간을 찌푸렸다. 고 집사는 홍릉원 바깥쪽 다리 위에서 멈추더니 고개를 돌리고 남자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그러자 남자의 안색이 변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침전 쪽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공주께서는 밤새 오시느라 피곤하셔서 지금 쉬고 계십니다. 한 공자더러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따 잠에서 깨면 다시 뵙겠다고요.”
고 집사는 야홍릉의 말 그대로 전해 주었다.
말을 마친 고 집사는 돌아서서 떠났다. 한옥금 홀로 다리 위에 서 있었다.
고 집사는 그가 무릎을 꿇을지 말지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정려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옥금을 지켜보았다. 그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한참 뒤에야 무릎을 꿇는 것을 보았다.
“쯧쯧.”
정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불쌍해 보이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