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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89)화 (1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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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화 모르는 척 하다

야홍릉은 감진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고 물었다.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한경백은 고개를 돌리고 이상한 눈빛으로 간이 큰 감진을 바라보았다.

그도 감진의 반응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백성이든 공주부의 측부든, 황제가 화병이 나 쓰러졌다는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게 아닌가?

속상한 척 연기를 못하겠어도 즐거운 티를 내지 말아야 하는데 감진의 지금 모습을 보니 죽고 싶어 환장한 것 같았다.

그는 야홍릉의 질문을 듣고 감진이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조아릴 줄 알았는데 감진이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

“네, 좀 기쁩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싸늘한 어조로 물었다.

“왜 기쁜 것이냐?”

“폐하의 병이 심각하다면 정왕과 선왕이 그 핑계로 무슨 움직임을 보일 게 아닙니까? 그러면 공주 전하께서는 폐하를 지킨다는 명의로 황궁에 쳐들어가 황위에 앉으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황위를 노리던 선왕과 정왕은 그저 고개를 조아리는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

“…….”

야홍릉과 한경백 모두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3황자는 멀리 변방에 계시고 대황자는 남성국으로 가셨으니 앞으로 제경은 공주 전하의 것이 아니겠습니까?”

감진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병권도 가지고 계시니 조정 관리 중 누가 감히 공주 전하께 반기를 들겠습니까?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죽이면 그만입니다. 그러다 보면 그들도 조용해지겠지요.”

한경백은 입가에 경련이 일 것만 같았다.

‘이 인간…… 황위로 오르는 것과 대신을 죽이는 것을 소꿉장난처럼 우습게 여기네. 정말 그렇게 한다면 공주 전하는 폭군이 되는 거잖아?’

“밖에 나가 무릎을 꿇거라. 당분간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야홍릉이 말했다.

“제가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감진은 웃음을 멈추고 다시 유순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전하, 화를 푸십시오. 제가 속생각을 다 얘기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공주 전하, 용서해 주십시오.”

야홍릉은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감진은 더 이상 야홍릉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폐하께서는 지금 이성을 잃고 진실을 판단하실 수 없는 상황입니다. 궁에서는 황후와 8공주는 모두 자유를 잃은 상태이고 궁 밖으로는 한씨 가문이 여전히 직무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게다가 3황자의 일이 터진 뒤로 한씨 가문의 상황은 더욱 좋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씨 부자는 아직 3황자의 일을 모릅니다.

장양후는 3황자에게 경쟁력이 없다고 생각되어 정왕에게 도박을 건 것입니다. 지금 선왕과 가까이 지내는 것도 선왕을 끌어들여 약점을 잡자는 것이 목적입니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물었다.

“그러니 장양후는 지금 정왕의 사람이라는 말이냐?”

감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현명하십니다.”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힐끗 보더니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알겠으니 이만 나가 보아라.”

감진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밖에 나가서 무릎을 꿇을까요?”

야홍릉은 표정이 어두워지며 입을 열려고 했다.

이때, 감진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괜찮은 것 같군요.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한경백은 한참이나 말없이 서 있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감 공자는 오랫동안 공주 전하를 뵙지 못해 그리워서 이런 방식으로 전하의 시선을 끌려고 했나 봅니다.”

감진은 그 말을 듣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느긋하게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나를 아는 사람은 역시 한 공자밖에 없군요.”

감진이 간이 부은 건지, 아니면 야홍릉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고 웃기려고 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야홍릉의 분위기는 이미 아까처럼 어둡지 않았다.

기분이 조금 풀어진 듯했다.

물론, 그 이유는 아마도 네 장군이 당분간 생명의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일단 안심할 수 있었다.

감진은 부채를 흔들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폐하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십니다. 변방의 전쟁과 3황자의 일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공주 전하께서는 유일하게 3황자를 대신해 금국과의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장군입니다. 이미 절대적인 주도권을 가졌으니 당분간은 우위에 있는 거지요.”

말을 멈추었던 그는 예쁜 눈을 위로 뜨며 물었다.

“전하께서 오랜만에 돌아오셨습니다. 오늘 잠자리 시중을 제가 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말에 서각의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야홍릉과 한경백의 시선은 풍류스러운 인상을 풍기는 감진에게 떨어졌다.

감진은 여전히 고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후광이 비치는 것처럼 눈부셨다.

야홍릉이 싸늘하게 말했다.

“나가.”

감진은 침묵을 지키다 일어나서 우아하게 허리를 숙인 뒤,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한경백은 민망한 분위기에 침묵을 지키다 감진이 나간 뒤에야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좀 쉬었다 다시 궁에 들어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연속 며칠 밤낮없이 길을 갈 때는 피곤한 줄 모르겠더니 의자에 잠깐 앉아서 사건의 경과를 듣고 나니 긴장이 풀리며 피곤이 몰려들었다.

궁에는 당연히 들어가야 했다.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은 이미 제경 전체에 퍼졌을 테니 황제도 알고 있을 게 뻔했다. 그래서 궁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사건의 경과를 들어 보니 걱정할 것이 크게 없었다.

복수를 한다고 해도 그전에 네 장군의 안전을 확보해야 했다.

“육연지의 몸은 어떠냐?”

야홍릉이 시선을 들고 물었다.

“요즘 본 적이 있느냐?”

한경백은 고개를 저었다.

“육 군왕은 얼마 전에 저택에서 자객의 칼에 폐를 찔렸습니다. 그때가 선왕이 3황자가 적국과 내통한 증거를 바친 날로부터 이틀 뒤였습니다. 폐하는 그때 육 군왕을 전쟁터로 보내고 3황자를 데려올 생각이었으나 그가 다친 데다가 대신들도 전쟁 직전에 장군을 바꾸는 행위를 반대해서 폐하께서 그 생각을 지운 것입니다.”

그러나 황제는 이미 3황자에게 살심을 품었다.

그래서 신은전에 지시를 내려 야홍릉의 행적을 알아보라고 한 것이었다.

하루빨리 호국 공주를 찾아서 금국을 물리치자는 생각이었다.

야홍릉은 의자에 기대앉아 그녀가 제경을 떠나기 전에 진양왕비가 찾아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앞으로 폐하께서 저희 대인을 쓰겠다고 부르신다면 응해야 하는지 거절해야 하는지 여쭈어보라고 하셨어요.”

거절하려면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했다.

크게 다쳤다거나 큰 병에 걸렸다거나.

그런 걸 따져보면 육연지가 자객에게 당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야홍릉은 부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부황은 고집이 세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람을 잘못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을 놔두지 않았다.

전생에는 그 희생양이 그녀였으나 이번 생에는 희생양이 야소숙과 그녀의 장군이 되었다.

증거가 있거나 그가 위협을 느낄 정도로 상대가 강해지면 그는 반드시 살심을 품었다.

그러니 야소숙의 결말은 정해진 것이었다.

나심과 봉우는…… 야홍릉은 그들의 결백을 입증할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잘 생각을 해볼 예정이었다.

나심과 봉양의 안전을 확보한 뒤, 어떻게 야정연, 숭준과 야모침에게 복수할지 말이다.

한경백에게서 어산서원의 상황과 영영에게서 또 이것저것 알아본 뒤, 야홍릉은 서각을 나서서 침전으로 향했다. 정려는 그녀의 옆을 계속 지키고 있었다.

야홍릉은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들어가 눈을 감고 기대앉아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다.

옆에 서 있던 정려는 한참이나 망설이다 끝내 입을 열었다.

“낭…… 공주 전하.”

야홍릉은 너무 피곤하여 그녀의 부름을 듣고도 눈을 뜨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응’이라고 대답했다.

“저택에 있는 잘생긴 남자들 말입니다…….”

정려는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모두 전하의 남첩입니까?”

야홍릉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 측부이다.”

‘측부라고?’

정려는 깜짝 놀랐다.

‘그게 남첩이라는 거잖아? 남첩보다 신분이 조금 더 높긴 하지만. 그런데 낭자는 공주잖아. 어느 공주가 당당하게 측부를 들인단 말이야? 그 측부들이 하나같이 잘생기긴 했지만 우리 전하가 이걸 아시나?’

정려는 또 머뭇거리다 말했다.

“봉왕 전하께서 이걸 아십니까?”

‘저택 한가득 아름다운 측부를 들인 것 말이에요.’

야홍릉은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여전히 싸늘한 시선으로 정려를 흘겨보며 말했다.

“알고 있단다.”

‘네?’

정려는 당황했다.

‘알고 있다고? 하, 하지만 이런 일은 너무…… 너무……. 봉왕 전하는 이런 일도 개의치 않을 만큼 너그러우신 건가?’

야홍릉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길에서 묻은 먼지를 씻어낸 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했다. 그리고 저녁 무렵에 궁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마차가 궁 문 밖에 멈춰 섰을 때, 그녀는 궁에 문안 인사를 하러 온 야정연을 만날 수 있었다.

“홍릉이 왔구나.”

친왕의 옥포를 입은 야정연은 담담한 시선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다.

“나신 장군과 봉우 장군의 얘기를…….”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싸늘하게 물었다.

“나신과 봉우가 왜요?”

야정연은 깜짝 놀랐다가 바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야홍릉이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신과 봉우가 천뢰에 갇힌 것을 진짜 모르는지 파악하는 듯했다.

“저는 방금 막 돌아왔어요. 부황께 말씀드릴 중요한 일이 있어요.”

야홍릉은 궁 문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야정연은 흠칫 놀랐다. 좋은 일이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도 부황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어.”

야정연은 야홍릉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들어갔다.

“부황께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 거냐?”

야홍릉이 대답했다.

“오라버니와 상관이 없는 일이에요.”

야정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화가 났는지 한참 뒤에야 담담하게 말했다.

“부황께서는 몸이 안 좋으시기에 자극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결같이 싸늘하기만 했다.

황제가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을 듣기만 했을 때는 몰랐으나 직접 얼굴을 보니 야홍릉은 황제의 상황이 정말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얼굴이 창백하고 초췌한 것이 그녀가 떠나기 전보다 적어도 십 년은 늙어 보였다.

그는 야홍릉을 본 순간, 눈빛이 반짝 빛났으나 곧 다시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홍릉아, 마침 잘 돌아왔다. 누가 네게 소식을 알린 것이냐?”

“소식이요? 무슨 소식 말씀인가요?”

야홍릉이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식을 받고 온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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