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여전히 싸늘하다
그 순간, 그는 야홍릉이 정말 그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느꼈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증오는 아주 뚜렷하고 진실했다. 몇 달 동안 그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반성해 보았지만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전까지 그들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연초에 야홍릉이 전쟁터에서 돌아온 뒤에도 그를 대하는 태도가 한결같았다.
심지어 그 일이 있기 전날, 그는 공주부에서 그녀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까지 했다.
상처가 나은 뒤, 그는 형님과 부모님에게도 불어보았고 야자릉과 야경함,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아보았지만 명확한 해답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도 야홍릉이 왜 갑자기 돌변한 것인지 알지 못했고 그도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몰랐다. 그녀는 그에게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벌을 내렸다.
연인이 원수가 되기까지 비수 하나면 충분했다.
하지만 한옥금은 그들의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질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천뢰에 있을 때, 야홍릉은 이런 말을 했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야자릉이지요. 당신은 야자릉과 야소숙에게는 진심을 다했으면서 유독 저에게는 그러지 않았죠!]
한옥금은 깜짝 놀랐다.
그는 야홍릉이 무슨 근거로 이런 결론을 내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줄곧 자신이 티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뢰에서 나온 뒤, 그는 힘들게 알아보았지만 알아낸 게 없었다.
옛 친구들이 그에게 호국 공주에 관한 얘기를 물을 때에도 그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자신이 공주를 찌르지 않았다는 말을 직접 하지도 않았고 야홍릉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죄명은 이미 정해졌고 천뢰에도 다녀왔으며 곤장도 맞았다.
그런데 지금 그런 것을 해명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미 일어난 일을 바꾸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씨 가문의 현재 처지도 바꿀 수 없었다.
그는 이것이 오해라고 생각했다. 야홍릉이 다른 사람의 이간질을 듣고 그를 단단히 오해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야홍릉과의 오해를 풀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야홍릉에게 그들이 원수로 되었어도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녀에 대해 좋지 않은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알리고 싶었다.
이렇듯 한옥금은 아직도 스스로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 * *
호국 공주부에서 측부들이 무릎을 꿇었다.
한경백은 야홍릉을 따라 저택에 들어왔다. 미리 소식을 들은 측부들은 일제히 나와 야홍릉을 맞이했다. 인물이 훤한 다섯 명의 젊은 남자들이 나란히 서 있으니 신기한 풍경을 이루었다. 그들은 각자 다른 매력을 풍기는 미남들이었다.
한 명은 흰옷을 입어 깨끗한 인상을 풍기는 단백의.
한 명은 빨간색 옷을 입고 농염한 인상을 풍기는 단홍상.
한 명은 옅은 파란색 장포를 입고 고혹적인 인상을 풍기는 감진.
한 명은 검은색 장삼을 입은 조용하고 곱상한 영정.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네 명과 비교하면 아름답지는 않으나 차분한 인상을 풍기는 매현근.
거기다 온화한 인상을 풍기는 한경백까지 더하자 괜히 눈이 즐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려는 눈앞의 광경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소년의 얼굴을 본 그녀는 입가를 실룩거렸다.
‘잘생긴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기는 하나 공주 전하의 저택에 이렇게 많은 미소년이 있다니…… 봉왕 전하는 이 사실을 아시나?’
야홍릉은 그들을 스쳐본 뒤, 그들을 지나며 말했다.
“감진과 한경백은 나와 함께 홍릉각의 서각으로 가고 다른 이들은 물러가거라.”
여섯 명은 허리를 숙이고 지시를 받았다.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육 개월 만에 돌아왔지만 서각은 여전히 깨끗하고 조용했다.
책 향기와 묵 냄새가 공기 중에서 맴돌았다.
밖에 서 있던 정려는 야홍릉을 따라 서각으로 들어가는 감진을 보자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감진은 아주 아름다웠다. 옅은 파란색 장삼을 입자 마른 몸매가 더욱 부각 되었다.
여인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와 비단결 같은 흑발이 어깨 위로 드리워져 있었는데 온화한 눈매까지 더하자 고혹적인 인상을 풍겼다. 게다가 옥으로 된 부채를 들고 있는 그에게서는 말할 수 없는 풍류스러운 기운이 흘렀다.
가히 경국지색이라고 불릴 만한 얼굴이었다.
‘공주 전하와 도대체 무슨 사이이지? 정말 노리개인가? 목국에서는 여인의 지위가 이렇게 높나? 이렇게 대놓고 집에 미소년을 들일 수 있을 만큼? 아니면 공주 전하여서 가능한 건가?’
밖에서 정려가 혼자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서각 안에서 야홍릉은 책상 뒤의 의자에 기대서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봉우와 나신의 현재 상황은 어떠하냐?”
감진과 한경백 모두 말이 없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감진을 돌아보았다.
“내가 지금 물었을 텐데?”
감진은 흠칫 놀라더니 눈썹을 위로 치켜세우며 말했다.
“저는 공주부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는데 조정의 일을 측부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야홍릉이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무릎을 꿇어라.”
감진은 경악했다.
‘말 한마디 했을 뿐인데 왜 짜증이지? 왜 이렇게 화가 나 있지……?’
그는 두어 마디 비꼬려고 했으나 갑자기 뭔가 떠올라 순순히 무릎을 꿇었다.
야홍릉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영영.”
그러자 창밖에서 검은 그림자가 번쩍하더니 영영이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전하.”
“말해.”
“봉우와 나신 장군은 지금 천뢰에 갇혀 있습니다. 아직까지 고문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봉양과 나심 장군은 돌아오는 중입니다. 이틀 후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야홍릉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제경으로 오면서 제경의 상황을 파악했다. 공주부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현 상황 대부분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황제가 신은전의 영위를 보내 변방에서 두 장군을 잡아 오라고 시킨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비밀리에 움직여야 했고 속도가 빨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교습은 이 지시를 받은 뒤, 즉시 야홍릉에게 소식을 알렸고 또 일부러 사람을 보내는 속도를 늦추었다. 야홍릉이 제경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두 장군이 제경으로 오는 날도 더 늦춰질 수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황제가 의심하지 않게 그럴듯한 핑계를 대야 했다.
야홍릉은 남성국을 떠난 뒤로 밤낮없이 일을 재촉했다.
매일 두 시진도 쉬지 않고 달리면서 겨우 목국의 제경에 도착했다. 제경에 도착하니 오히려 걱정이 덜 되었다.
“전하.”
감진이 공손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두 장군의 일을 누가 꾸몄는지 압니다.”
야홍릉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까까지는 공주부를 나간 적이 없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감진은 입가를 실룩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겉으로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저 전하께 농담을 건네 기분을 풀어드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야홍릉이 말했다.
“난 너와 농이나 할 기분이 아니다.”
“네, 죄송합니다.”
감진은 눈을 내리깔고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옆에 조용히 서 있던 한경백은 생각에 잠겼다.
‘감진 공자는 평소에 거만하더니 왜 오늘에는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야홍릉은 말없이 그를 한참 바라보더니 물었다.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느냐?”
‘아주 많이요.’
감진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중요한 것만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심, 봉양 장군이 적국과 내통한 일에 엮인 것은 장양후와 선왕이 계획한 일입니다. 전하가 제경에 없을 때, 전하의 날개를 꺾으려는 의도입니다.”
‘장양후 숭준?’
야홍릉은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그녀의 의자에 기대서 며칠 사이에 쌓인 피곤을 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얼마 전에 선왕이 정왕에게서 3황자가 동제와 내통한 비밀 서신을 얻었습니다. 신하들이 선왕을 태자로 추천한 일로 폐하의 총애를 잃었던 그는 상황을 바꾸려고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그 비밀 서신을 폐하에게 바친 것입니다.”
감진의 목소리는 고혹적이었다. 느긋하면서도 요염한 느낌을 풍기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 일을 장양후가 알게 되었지요. 폐하가 3황자에게 벌을 내리기 전까지 자신이 고발한 일이 황후와 한씨 가문에서 알게 될까 두려웠던 3황자는 어쩔 수 없이 장양후의 협박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
게다가 한씨 가문은 지금 몰락해도 부자는 망해도 삼 대는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현재 한씨 가문의 영향력도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장양후는 필체 모방을 잘합니다. 그는 선황더러 3황자의 필체를 얻어오라고 해서 3황자의 필체로 동제 황제와의 비밀 서신을 가짜로 조작한 것입니다. 그중에 나심, 봉양 장군의 이름도 들어갔지요. 그렇게 되어 나심, 봉양 장군은 3황자에게 넘어간 공모자가 되었습니다.”
“선왕이 첫 번째 서신을 바쳤을 때, 폐하는 화를 냈지만 진정한 뒤, 이 일이 미심쩍다 생각되어 신은전에게 조사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장양후의 조작 서신을 받게 되자 폐하는 크게 화를 내며 즉석에서 나신과 봉우 장군을 먼저 천뢰에 가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은전의 영위더러 변방에 있는 두 장군을 잡아 오라고 했지요.”
야홍릉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싸늘하게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폐하가 신은전의 영위를 변방에 보낸 것은 아주 은밀하게 진행되었을 텐데 넌 어떻게 알게 된 것이냐?”
감진이 장양후와 선왕의 계획을 아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감진이 원래도 이런 일을 하기도 하고 그의 휘하에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은전의 일은 좀 이상했다.
“대교습이 전해온 소식입니다.”
감진은 여유로운 얼굴로 대답하고는 야홍릉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전하, 신은전의 대교습과 제가 무슨 사이인지 물으실 것입니까?”
야홍릉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감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는 제경을 떠난 지 육 개월이 넘었다.
‘그동안 사랑을 듬뿍 받았으니 성격도 유순해져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여전히 이렇게 차가운 거지? 농 한마디를 못 하게 하네. 봉왕 전하가 아직도 공주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건가?’
“폐하께서는 신은전더러 나심과 봉양을 잡아 오라고 했으면서 왜 야소숙을 잡아 오라는 말은 하지 않은 거지?”
감진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육연지가 요즘 몸이 좋지 않고 공주 전하도 제경에 계시지 않으니 변방에 쓸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만…….”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폐하께서는 이 일로 크게 화가 나서 앓아누우셨습니다. 요 며칠 궁은 분위기가 우중충합니다. 폐하께서도 이미 이틀이나 조례에 나오지 않으셨고요.”
아마도 이런 일로 크게 걱정한 듯했다.
아들이 야심을 품고 역모를 꾀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변방에 쓸만한 장군이 없으니 황제가 화병이 나 쓰러진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