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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85)화 (186/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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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화 헤어지다

야홍릉의 말에 용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애비는 멍청하지 않습니다.”

“멍청하지 않다면서 왜 이토록 두려워하는 것이냐?”

야홍릉은 담담하게 말했으나 그녀의 말투에는 옅은 한숨이 담겨 있었다.

“날 옥패로 만들어 허리춤에 차고 다니고 싶은 거냐?”

용수는 그녀의 농담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긴장이 좀 풀린 그는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애비는 제 마음을 모르실 것입니다.”

“그건 그래. 난 이미 누가 내 사람이고, 누가 적인지 파악했고 사람들의 속도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데 어떻게 그리 쉽게 그들의 속임수에 놀아나겠느냐?”

아무리 음모고, 권모술수라고 해도 결국은 몇 가지 수단밖에 없었다.

“난 싸움으로는 밀려본 적이 없다. 목국으로 돌아간 뒤, 영위를 시켜 몰래 따라다니게 할 것이다. 또 상대가 독을 쓴다고 해도 그 몇 가지 독밖에 없을 텐데 나도 다 생각이 있단다.”

야홍릉의 표정이 갑자기 살벌하게 변했다.

“그러나 만약 정말 죽고 죽이는 상황에 놓인다면 나한테도 십만 대군이 있으니 멍청하게 손 놓고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다시 깨어난 뒤, 그녀의 목표는 황위에 앉은 그 사람을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황제가 신하더러 죽으라고 하면 신하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일이 절대 그녀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죽이려는 사람을 그녀는 먼저 황천길에 보낼 생각이었다.

시간이 급박하여 야홍릉은 더 이상 용수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제멋대로 굴지 말고 해야 할 일을 잘하거라. 안 그러면 널 내칠 것이다.”

말을 마친 뒤,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용수는 조금 늦게 뒤떨어져 따라가며 야홍릉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널 내칠 것이다’는 말에 그는 웃음이 나왔다.

“애비가 절 내치면 어디 가서 이렇게 훌륭한 남편을 찾는다고 그러십니까?”

정려는 짐을 든 채, 둘의 뒤를 따르다 봉왕의 낯간지러운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동안 이런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웬만한 말에는 반응이 없었다.

봉왕부는 등불로 환했지만 저택을 나서자 시야가 어두워졌다. 마차가 봉왕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달빛 장포를 입은 봉서오가 말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비, 먼저 마차를 타고 성을 나가십시오. 9황숙의 기예병들이 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성을 나가면 다시 말로 바꿔 타십시오.”

용수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야홍릉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려.”

용수는 고개를 돌리고 정려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지시를 내렸다.

“내가 했던 말을 잊어버리지 말거라. 어디를 가든 공주의 안전이 첫 순위이다.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정려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 알겠습니다.”

용수는 수많은 부하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살뜰하게 당부했다.

“조심하십시오.”

그는 그녀와 정려가 마차에 오르는 모습을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봉서오를 바라보는 용수는 다시 침착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호국 공주는 남성국의 황후이다. 목국에 돌아간 뒤, 공주에게 위험이 생긴다면 목국의 황제를 압박해서라도 공주를 지키거라.”

영특한 봉서오는 그의 말뜻을 바로 눈치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인 뒤,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만지며 농을 건넸다.

“저도 못생긴 얼굴이 아닌데요. 공주 전하와 다른 점이라면 성별뿐입니다. 그런데 전하는 왜 저분께는 다정하게 대하시고 저한테는 이렇게 차갑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 말에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용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거세할 생각이 있느냐?”

봉서오는 침묵을 지키다 눈을 위로 치켜뜨며 말했다.

“제가 거세한다면 아버지가 화나서 쓰러지실 것이고 저에게 목매는 여인들도 눈물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넌 그 여인들이 다정하게 대해주는 것에 만족하거라. 만약 이번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넌 다시 그 여인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용수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봉서오는 그 말을 듣고 코를 만지며 말했다.

“전하는 참으로 매정하십니다. 저는 승상부의 적자이고 수많은 소녀의 마음을 빼앗은 미남인데 전하께서 어찌 저를 죽이시려는 것입니까? 기루의 미인들은 매일 밤 제가 가기를 얼마나 기다리는지 아십니까?”

용수는 그와 실랑이할 생각이 없었다.

“서오 공자, 전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는 게 좋을 것입니다.”

묵백이 대문으로 나오며 말했다.

하얀색 장포를 입은 그는 고결하기 그지없었다.

“대제사의 신분으로 장담하는데 그 대가는 아주 참혹할 것입니다.”

봉서오는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의 기풍이 날로 못해지는군요.”

‘아무리 충신이라도 여인의 매력보다 못하다는 건가? 옛날 사람들이 여인을 두고 화근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군.’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자 봉서오는 우아하게 예를 올리고 마차에 올라탔다.

묵백은 용수의 옆에 서서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는 용수가 겪었던 일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야홍릉이 용수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야홍릉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화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야홍릉이 무사해야 세상이 무사한 것은 사실이었다.

야홍릉에게 또다시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세상은 다시 뒤집힐 것이다.

“공주가 이제 막 떠났는데 벌써 마음이 텅 빈 것 같으냐?”

묵백은 고개를 돌리고 용수의 싸늘한 얼굴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짧은 이별은 더욱 긴 만남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용수는 이 말에 안심할 수 없었다.

그는 말없이 마차가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우중충했다.

* * *

“공주 전하는 봉왕 전하와 어떻게 만나서 알게 되신 겁니까?”

봉서오는 마차 옆에서 말을 탄 채, 흥미진진한 얼굴로 물었다.

“봉왕은 황성에 있지 않은 몇 년 동안 공주 전하와 함께 계신 겁니까?”

야홍릉은 마차에 기댄 채, 봉서오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속으로 생각에 잠겼다.

‘몇 년이냐고? 아니.’

그녀와 용수는 알게 된 지 육 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용수는 목국의 신은전에 십 년 가까이 있었다. 그 말은 그녀가 열일곱 살로 다시 태어나기 전에 용수가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는 기억을 잃은 채로 구 년이나 기다렸다.

그들은 다시 태어난 뒤에 기억을 지닌 시점이 달랐다.

용수는 십 년 전에 다시 태어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야홍릉은 열일곱 살부터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할수록 갚아야 할 빚만 늘어나는 거니까.’

야홍릉은 마차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네 장군의 생사를 떠올리자 그녀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들 넷은 그녀가 다시 태어난 뒤에 가장 걱정했던 사람들이었다.

전생에 그들은 그녀 때문에 죽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 생에 꼭 그들을 잘 지켜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녀는 자신만 제경에 없으면 누구도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사람들의 독한 마음을 잊은 것이다.

지금이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황제가 무슨 이유로 그들을 죽이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대교습이 그녀더러 얼른 돌아오라고 재촉한 것을 보면 아직 돌이킬 여지가 남아 있다는 말이었다.

‘대교습에게 며칠간 시간을 끌 방법이 있나 보네. 이번에 돌아가면 대교습을 만나 봐야겠어.’

마차는 곧 황성을 나섰다.

헌원창과 팔천 명의 기예병과 함께 웅장한 기세로 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야홍릉은 정려와 함께 마차에서 내린 뒤, 말로 갈아탔다.

야홍릉을 비롯한 일행은 빠른 속도로 어둠 속에서 질주했다.

* * *

한편 봉왕부 안은 등불로 환했다.

용수는 바삐 보내 이별의 서운함을 달래려는 것인지, 아니면 빨리 일을 마치고 목국으로 떠나려고 하는 것인지 아직 저택을 떠나지 않은 사청의, 묵백과 함께 봉왕부 서재에서 밤새 토론했다.

다음 날 아침.

금국의 태자가 부하들과 함께 남성국 황성에 도착하여 서신을 보내. 그는 남성국의 신임 황제 등극 대전에 참가하러 온 첫 번째 손님이 되었다. 점심때, 서릉의 태자가 누이동생과 함께 도착했다. 그도 마찬가지로 서신과 선물을 보내왔다.

남성국 황궁은 순식간에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동제에서는 황제인 영린과 정왕부의 군주 영묘언이 함께 찾아왔다. 세 나라의 황제와 황자가 한자리에 모이자 겉으로는 미소가 오갔지만 실제로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동제와 남성국의 통혼은 다른 나라에게 절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금국과 서릉의 태자는 거의 말끝마다 통혼을 거들먹거리며 평양 공주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다.

영린은 겉으로는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 누님은 왜 나타나지 않는 거지? 혼사의 소식을 천하에 알렸는데 헌원용수는 이제 와서 누님을 꽁꽁 숨겨 두는 건가?’

어렵사리 기회를 찾은 영린은 묵백에게 급히 야홍릉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묵백 대제사가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참 공교롭게 되었습니다. 평양 공주는 잠시 황성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황성을 떠났다고?’

영린은 당황했다.

‘신임 황제가 등극하면서 황후 책봉도 함께 진행될 텐데 황후가 자리에 없다고? 이건 천만년 만에 처음 나타나는 일이 아니야?’

그는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고 싶었지만 용수와 묵백 모두 바쁘기에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영린은 의아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관심은 곧 다른 데로 쏠렸다.

남제의 태자 용성(容晟)이 여동생을 데리고 남성국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영린이 만난 뒤로 남성국 황궁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같은 가문 출신이긴 하나 용씨 황족이야말로 정통 황실 혈통이었다. 그 이유로 남제의 태자는 우월감을 느껴야 했으나 현재 남제의 국력이 약해지고 동제가 강해지니 아직 직접 정무를 보지 못하는 영린의 앞에서도 용성은 기를 펴지 못했다.

용성이 자신감을 잃을 만도 했다. 남성국의 신임 황제 헌원용수는 원래 남제의 황자였다. 그러나 남제에서 구 년 동안이나 냉대와 괄시를 받다가 남성국으로 간 뒤 태자가 되었다. 신분이 더없이 고귀하게 된 헌원용수가 이제는 동제와 통혼을 선택한 것이다.

양국의 통혼은 뭘 의미하는가? 그들의 통혼에 수많은 억측이 난무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남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남제의 황제는 이 소식을 듣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으며 남제 전체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남성국으로 온 용성은 영린을 만날 때나 남성국의 신임 황제 용수를 만날 때나 불안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영린이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제국이 너무 오랫동안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온전히 하나로 될 때가 된 것 같은데 태자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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