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용수의 역린
야홍릉은 싸늘한 표정으로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다.
‘폐하가 장군들을 죽이려고 한다고? 왜?’
순간 야홍릉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휙 스쳐 지났다.
‘나심과 봉양은 야소숙을 따라 전쟁터로 가고 나신과 봉우는 제경에 남아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있어. 그런데 폐하가 갑자기 이 네 명을 죽이겠다고 한다고? 누군가 음모를 꾸민 게 분명해.’
서신에 담긴 말에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번 일은 영영이 떠난 뒤에 생긴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가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을 리 없었다.
신은전의 매는 속도가 빨랐다.
이 일은 겨우 며칠 전의 일일 것이다.
‘서신을 보낸 사람도 대교습일 거야.’
야홍릉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봉왕부의 서재로 걸어갔다.
그녀는 이튿날 아침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급박한 일이라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네 명은 목숨을 잃을 수 있었다.
그 네 명은 야홍릉이 목국에서 가장 신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아끼는 부하들의 목숨을 두고 모험할 수 없었다.
“헌원용수.”
서재의 문이 열렸다.
야홍릉은 자신에게 향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말을 준비해줘.”
“애비?”
용수는 안색이 변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야홍릉의 앞으로 다가와서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지금 바로 목국으로 돌아가야겠다.”
야홍릉은 서신을 그에게 넘겨주며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바로.”
용수는 서신을 본 뒤, 표정이 굳어졌다.
“또 누군가 나쁜 짓을 하고 있었군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수는 그 네 명의 장군이 야홍릉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도 알고 이번 일이 얼마나 긴급한지도 알기에 설득하려는 말을 모조리 삼켰다.
그는 한참 생각하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애비와 함께 떠나겠습니다.”
그 말에 서재의 사람들은 표정이 변했다.
등극 대전이 코앞인데 새 황제가 떠난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럴 필요 없다.”
야홍릉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혼자 돌아가겠다.”
용수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안 됩니다. 걱정됩…….”
“이미 결정한 일이다. 만약 네가 남성국 신임 황제의 신분으로 하는 말이라면 난 네 말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다른 신분으로 하는 말이라면 난 안된다고 명령을 내릴 것이다.”
야홍릉이 말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말을 준비하거라. 갈아입을 옷을 챙기고 바로 떠나겠다.”
용수는 쫓아가려고 했으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서재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서오.”
봉서오는 걸어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전하.”
“9황숙. 지금 바로 병사 팔천 명을 준비하여 서오와 함께 호국 공주를 목국으로 모십시오.”
봉서오와 헌원창은 모두 침묵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용수가 둘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호국 공주의 머리카락이 하나라도 다친다면 남성국의 주인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능수전의 방향으로 뛰어갔다.
헌원창은 바로 봉왕부의 군영으로 뛰어갔다.
봉서오는 고개를 돌리고 묵백을 바라본 뒤, 침묵을 지키다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대제사께서는 전하께서 이렇게 제멋대로 하시게 내버려 둘 것입니까?”
“전하가 아니라 이제는 폐하이시죠.”
묵백은 먼저 그의 호칭을 시정해 주었다.
그리고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더한 일도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얼른 준비하십시오. 그리고 목국에 가서 뭘 해야 할지 물어보십시오. 폐하께서 머릿수를 채우려고 보내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호국 공주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헌원창과 그의 병사 팔천 명이면 충분했다.
문관인 봉서오가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봉서오는 한참이나 말없이 서 있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눈빛으로 물었다.
“호국 공주가 도대체 뭐가 그렇게 좋다는 말입니까? 전하의 말씀을 들어 보니 앞으로 여인은 호국 공주 한 명뿐이라는 건데, 그 말씀은 후궁을 들이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여인 한 명을 위해 세상의 여인들을 다 마다한다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그 말이 맞습니다.”
묵백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호국 공주가 우리 폐하의 마음속에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의심할 필요 없습니다. 야홍릉에게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남성국의 주인이 바뀔 뿐만 아니라 당신과 9황자가 올해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문제입니다. 그러니 폐하의 말을 우습게 듣지 마십시오.”
봉서오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하군요.”
‘세상에 미인이 얼마나 많은데 한 사람 때문에 후궁을 포기한다는 말인가? 전하는 도대체 뭘 원하는 거지? 매일 밤 잠잘 때마다 한기를 느끼는 게 좋은 건가?’
봉서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자리를 떴다.
그는 용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지만 제왕의 지시를 어길 수 없었다.
그는 이 황제에게 아주 만족하기에 다른 주인에게 충성을 다할 생각도 없었고 지금 바로 죽고 싶지도 않았다.
서재에서 순식간에 세 명이 사라지자 묵백은 고개를 돌리고 초남사와 봉여희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먼저 저택에서 좀 쉬십시오. 오늘 밤 전하께서는 논의를 계속할 기분이 아닐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얘기하시죠.”
초남사와 봉여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봉왕부를 떠났다.
사청의는 창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한참 뒤,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 천하가 앞으로 여전히 헌원씨의 것일까요?”
묵백은 깜짝 놀랐다. 그는 사청의가 이렇게 예리한 질문을 직설적으로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성씨와 혈통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성씨와 혈통?’
사청의는 생각을 해본 뒤, 입을 열었다.
“혈통이요.”
“그럼 되었지요.”
묵백은 싱긋 웃었다.
“제사전의 대제사인 저도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없는데 당신은 더 할 필요가 없지요. 목국의 공주 야홍릉은 폐하의 역린입니다. 그 역린을 건드리면 죽음뿐이니 너무 간섭하지 않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청의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역린이라고?’
* * *
“애비.”
용수는 야홍릉을 따라 침전으로 들어가 정려더러 야홍릉의 짐을 싸라고 했다.
그리고 야홍릉을 끌고 옆방의 편전으로 갔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9황숙더러 애비를 목국까지 호송하라고 했습니다. 목국에 도착한 뒤, 어떤 일들은 제가 결정해도 되겠습니까?”
야홍릉이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일 말이냐?”
“애비가 무사하다면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애비가 곤경에 처한다면 전 제 방식대로 애비를 지킬 것입니다.”
용수가 말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내 결정을 허락한 것이냐?”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만.”
용수는 그녀의 말을 듣고 풀 죽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야홍릉의 허리를 끌어안고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전 주인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스스로 잘 지킬 것이니.”
그리고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리고 네가 옆에 없다고 다른 사람에게도 눈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용수는 이 기회에 더욱 큰 걸 요구했다.
“그럼 돌아가시고 나서 그 측부들을 다 내보내십시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려가 짐을 다 싸자 야홍릉이 말했다.
“급히 날 찾아올 필요 없다.”
용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남성국에 남아 네가 할 일을 모두 해결하거라. 황제가 되었으니 황제답게 굴어야지. 잠깐의 이별은 우리에게도 좋은 일이다. 내가 차분하게 앞으로의 길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 시간도 생기고 말이야. 우리 사이의 일도…… 너도 불안해하지 말거라. 내가 약속한 일은 절대 어기지 않으니.”
야홍릉이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나 용수는 고개를 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 애비가 후회할까 걱정되는 게 아니라 애비에게 위험이 닥칠까 두렵습니다.”
그녀가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그는 벌써부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전생과 같은 비극이 또 일어날까 봐 그는 너무나 두려웠다.
야홍릉이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나는 같은 실수를 두 번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도 걱정하지 말거라.”
용수는 반박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걱정하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전생에 갑작스럽게 전해온 그녀의 사망 소식은 그에게 뼈저린 후회와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는 이번 생에는 그녀가 충분히 경계하기에 전생에서처럼 쉽게 다른 사람의 음모에 걸려들지 않을 거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면서도 그녀를 또다시 잃을까 걱정되었다.
그는 야홍릉을 또 잃으면 절대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말을 길게 할 필요는 없었다.
정려는 봇짐을 들고서 조용히 서 있었다.
용수는 그녀를 더는 잡아두지 않고 중요한 말을 전했다.
“9황숙이 애비의 뒤를 따를 것이니 병사가 필요하다면 그에게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감진의 손에 있는 세력도 작지 않습니다. 애비가 필요하다면 그를 부리면 됩니다. 그는 반드시 애비의 말에 따를 것입니다. 감진은 늘 제멋대로 굴고 규정 같은 것을 신경 쓰지 않고 황당한 짓도 벌이지만 기루 같은 곳은 풍류를 즐기는 관리와 귀족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 아닙니까? 그러니 정보 같은 것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감진에게는 많은 관리들의 비밀이 있기에 그것 또한 애비의 비장의 수로 쓰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단백의와 단홍상 말입니다. 궁의 소식은 악사 단리를 통해 전해지므로 애비가 궁을 드나들기 불편하다면 단씨 형제더러 단리와 연락을 해보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궁에는 신은전 대교습과 단리가 있으니 작은 움직임도 모두 애비의 귀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봉매더러 애비를 따라…….”
“용수.”
야홍릉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예 황궁도 목국으로 옮기지 그러느냐?”
용수는 입을 다물었다.
과묵한 그는 어느새 수다쟁이로 변해 있었다. 그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준비해 야홍릉을 지키고 싶었다.
야홍릉에게 한 치의 오차가 생기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봉매는 네 옆에 남겨두거라. 난 필요 없으니. 내 저택에 쓸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데도 믿지 않는구나. 영영을 비롯하여 그들도 충분히 나를 지킬 수 있다.”
용수는 야홍릉과 영영의 실력을 믿고 있었지만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일어날까 두려웠다.
“그만하거라.”
야홍릉의 말투가 또 누그러졌다.
“나도 어린아이가 아니다. 권모술수를 좋아하지 않지만 할 줄 모르는 것도 아니지. 난 다른 사람의 음모에 순순히 당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한 번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여전히 그렇게 멍청하다면 내가 네 사랑을 받을 자격이 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