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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83)화 (184/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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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화 빠르게 진행되다

누구도 용수가 궁으로 들어가 황제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몰랐다.

봉왕을 주목하는 황족의 종친들은 그가 궁에서 황제와 두 시진 가까이 밀담을 나눴다는 것만 알지, 구체적으로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전혀 알아내지 못했다.

해가 지자 봉왕과 대제사 묵백은 함께 궁 문을 나섰다.

봉왕은 9황자 헌원창을 봉왕부로 불러 서재에서 또 한 시진 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묵백과 헌원창은 봉왕부를 떠났다.

이 소식에 종친들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조 부마의 일로 그들은 위기를 느꼈다.

그들은 똘똘 뭉쳐서 젊은 봉왕이 어느 정도 양보를 할 수 있게 압박할 생각이었으나 결국 용수는 그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줬다.

다음 날 아침.

조례에서 헌원 황제가 처음 꺼낸 얘기는 퇴위에 관한 일이었다. 그 소식에 남성국 전체는 발칵 뒤집혔다.

황족 종친과 문무백관은 당황하며 다시 생각해 보라며 극구 말렸다.

그러나 황제는 예부(禮部)에 등극 대전을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대제사는 좋은 날을 골랐다고 말했다. 구 월 팔 일, 봉왕의 생일 바로 전날이었다.

대신들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려고 했다.

“짐은 나이가 많아서 요즈음 자주 머리가 어지럽고 피곤하네. 조정의 일이 정말 버겁구나.”

헌원 황제가 느긋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봉왕은 능력이 출중하여 천하를 다스릴 수 있네. 남성국의 강산과 백성들을 생각해서 일찍 물러나는 게 현명한 선택이네.”

대신들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결국 ‘현명하신 선택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등극 대전과 동시에 남성국의 새 황제와 동제 평양 공주의 혼사가 발표되었다.

두 나라의 통혼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조서를 받기도 전에 각국의 황제들은 이 소식을 듣고 수심에 잠겼다.

오랫동안 조용했던 남성국 황성에 폭풍우가 휘몰아칠 것이다.

“등극 대전은 구월 초여드레입니다. 각국에 초대장을 미리 보냈습니다. 시간상 좀 빠듯할 것이나 그들은 분명 급하게 올 것입니다. 다들 등극 대전 전에는 도착하겠지요.”

밤이 깊었지만 침전은 등불로 환했다.

밤이 되어야 침전으로 돌아온 용수는 목욕을 마치자마자 급히 애비에게 보고했다.

그는 하얀색 침의를 입고 침대에 누워 이미 한잠 자고 깬 여인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통혼의 소식을 퍼뜨리긴 했지만 이 혼사는 남성국과 동제의 일이니 애비가 엮일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 그 누구도 애비를 찾아와 귀찮게 굴지 않을 것이고요.”

야홍릉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용수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난 귀찮게 구는 게 무섭지 않다.”

그녀는 귀찮은 게 싫을 뿐이지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귀찮은 것도 여러가지가 있는 게 아닌가?

“네, 알고 있습니다.”

용수는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애비는 그저 옹졸한 인간들의 얄팍한 도발을 상대하기 귀찮을 뿐입니다. 그들을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으니까요. 또 제 입장을 생각해서 그들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니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이번에 모이는 사람들은 각국의 귀족들이니 다 저와 연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제 입장을 생각할 필요 없이 애비 마음대로 하십시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은 널 보러 오는 건데 내가 나설 필요는 없지.”

“아닙니다.”

용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들은 우리 둘 때문에 오는 것인데 애비는 왜 자꾸 이렇게 선을 긋는 것입니까?”

야홍릉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황당한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조차도 짧은 육 개월 안에 이렇게 수많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남성국에 있는 지금,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자 그녀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줄곧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일을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용수에 대한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용수는 그가 한 일 때문에 좋아해 달라는 매달리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전생의 일들은 그녀를 옥죄는 밧줄이 되었다. 그 일들은 실제로 일어난 것이었고 그녀도 자신을 대한 용수의 깊은 사랑과 강한 집념을 느꼈다.

이런 느낌은 그녀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이미 넘어선 것이었다.

그녀는 그 누구와도 뜨거운 사랑을 해볼 생각이 없었다. 또한 이렇게 강렬한 감정에 휘둘릴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전생의 일을 없었던 것처럼 넘길 수는 없었다.

용수의 감정을 모르는 척하자니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것 같았다.

묵백도 그녀가 세상 사람들을 배신하더라도 용수만은 배신하면 안 된다고 했다.

용수가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용수의 마음을 받아주려면 그와 같은 깊이의 사랑으로 갚아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상태로 사랑 때문에 다른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런 환경에 적응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직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완벽한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용수도 그녀의 속마음을 눈치챈 건지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야홍릉을 꽉 끌어안았다. 그는 야홍릉을 놔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고민하는 것도 싫었다.

* * *

그 뒤로 며칠 동안, 야홍릉은 봉왕부에서 조용히 있었다.

누구도 그녀를 찾아와 귀찮게 굴지 않았다.

한편, 용수는 매일같이 궁에 드나들었다. 제위에 오르기 직전이라 그는 아주 바빴다.

그는 등극 대전 때문에 남성국에 온 다른 나라의 사신들을 접대하고 제사전에 가서 목욕을 마친 뒤, 기도를 올리고 또 대제사와 함께 등극 전의 예식을 올려야 했다.

시간이 지나자 황성에는 낯선 얼굴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그와 동시에 용수와 대제사 묵백이 각 곳에 배치한 심복들도 황성으로 모여들었다.

사청의와 봉씨 가문의 셋째 봉여희도 그중에 있었다.

젊고 능력 있는 심복들은 용수가 각지에 분포한 세력을 대표했다.

구월 초엿새 저녁.

젊은 남자 몇 명이 봉왕부에 모여들었다. 용수는 야홍릉을 그들에게 소개해줬다.

“앞으로 너희들의 안주인이 되실 호국 공주 야홍릉이시다. 내 평생의 유일한 여인이지.”

조정의 병권을 움켜쥐고 있는 무장 헌원창, 낭주의 변방을 책임진 사청의, 용수를 도와 각종 사업을 도맡은 봉여희와 초남사(楚南辭)라고 불리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영위의 정보를 책임진 봉매등 개인 호위무사들도 있었다.

이들 말고 야홍릉은 달빛 장포를 입은 남자에게 눈길이 갔다.

그 남자는 웃을 때 휘어지는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풍류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준수한 남자였다.

야홍릉이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녀는 묵백의 소개를 잠자코 들었다.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는 봉 승상의 적자 봉서오(鳳棲梧)입니다. 그동안 몰래 젊은 세력을 키우고 있었지요. 전하의 신임을 받는 문관입니다.”

‘봉서오.’

야홍릉은 첫눈에 그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풍류스러운 것은 그저 겉모습에 불과했다. 물론, 실제로도 그가 풍류를 즐기는 자일 수도 있었다. 온몸에서 풍기는 색기를 보니면 기루 같은 곳을 좋아하는 남자가 분명했다.

사청의는 야홍릉을 보고도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그러나 야홍릉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된 봉여희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목국의 공주였다고?’

그는 야홍릉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출신이 고귀하고 전쟁터에서 마음껏 실력을 펼칠 수 있는 여인이야. 동시에 동제의 평양 공주이자 남성국의 새로운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기도 하지. 유일한 안주인이라는 것도 당연한 말이고. 전하는 이 공주와 여섯 나라의 공동 주인이 되려는 건가?’

초남사는 장사를 관리하는 사람이라 이 일에 별다른 이의가 없었다.

그는 원래도 일편단심으로 아내만 사랑하는 남자인지라 용수의 소개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봉서오는 봉여희와 같은 봉씨였으나 둘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한 명은 남성국 승상의 적자이고 다른 한 명은 동제 상인의 서자였다. 신분이 크게 차이가 나니 분위기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봉서오를 본 봉여희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러나 봉서오는 웃으며 농을 건넸다.

“우리는 조상이 같은가 보오.”

평범한 말인 듯했지만 평범하지 않은 말이었다.

승상의 적자이자 신임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는 봉서오의 신분은 고귀함을 넘어설 정도였다. 그런 그가 상인 가문의 서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전혀 거만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봉여희는 그의 말에 감동을 받았다.

봉서오가 말했다.

“괜찮다면 날 삼촌이라고 부르시게.”

‘삼촌?’

봉여희의 감동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황한 눈빛으로 봉서오를 바라보았다.

‘형님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데……. 아니, 한두 살 어려 보이는데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왜 그러는 거지?’

봉서오는 야홍릉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제 누이동생은 공주 전하를 뵙고 한눈에 반해 지금은 공주 전하를 구해내겠다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순수한 소녀를 속여도 됩니까?”

야홍릉은 그 말을 듣고 그저 그를 힐끗 보기만 했다.

그녀의 싸늘한 표정에 봉서오는 흥미가 동한 듯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싸늘한 두 분이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네요.”

그는 차갑고 냉철한 봉왕이 부드럽고 순한 여인이거나 똑똑하고 우아한 미인을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여인이야말로 천하의 황후 자리에 어울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호국 공주의 성미는 너무 차가웠다.

봉서오가 이 말을 마치자 묵백은 말없이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눈빛으로 이런 말을 했다.

‘그건 당신이 봉왕이 이 여인 앞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둘 다 싸늘하다고?’

봉왕은 다른 사람에게만 차가울 뿐, 야홍릉의 앞에서는 토끼보다 더 부드러웠다.

야홍릉에게 인사를 올린 뒤, 남자들은 서재로 들어갔다.

가장 마지막에 떠난 용수는 야홍릉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애비, 이틀만 기다리십시오.”

남성국의 상황이 정해진 다음 그는 야홍릉과 함께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변수가 계획보다 빠르다’는 말이 또 한 번 사실로 입증되었다.

같은 날 구월 초엿새 저녁.

용수가 심복들과 서재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까만색 매가 목국의 정보를 가지고 야홍릉을 찾아왔다.

야홍릉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쪽지를 펼치자 짤막하게 한 마디가 쓰여 있었다.

‘폐하께서 네 장군을 죽이려고 하니 얼른 돌아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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