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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궐황도 (182)화 (18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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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화 너와 나

점심 무렵의 태양은 뜨거웠다.

용수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마른 체구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마른 체구의 여인은 여전히 도도하고 차가운 모습이었다.

용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걸어가 입을 열었다.

“애비.”

야홍릉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싸늘한 목소리에 약간의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용수, 내가 생각해 보았다.”

용수가 멈칫했다.

“진실을 알게 된 후로 난 너를 아무 감정 없이 대할 수가 없게 되었지. 좋아한다고 해도 좋고, 감동이라고 해도 좋다. 다만 내가 너와 혼인하겠다고 한 것은 잘 생각해 보고 내린 결정이니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야홍릉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너의 도움을 받는 연약한 여인으로 며칠 살아보았지. 하지만 이런 건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잘못하여…….”

용수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야홍릉은 돌아서서 평온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건 내 문제지 너와는 상관이 없다.”

용수는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애비?”

“어느 나라에서 살든, 황족과 귀족들 사이에는 이익 다툼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 이유 없는 적의도 당연한 법이지.”

야홍릉이 말했다.

“봉왕비도 그렇고 나중에 남성국 황후가 되는 것도 그렇고, 마주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다. 난 이런 끝없는 상황들이 너무 짜증 나는구나.”

종친들의 불만, 이익에 연관된 자의 트집, 조정 대신들의 압박, 그리고 그에게 충성을 다하는 부하가 한 불평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각종 이유로 그에게 불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황권 귀족 권력의 분쟁은 사람은 다를 뿐, 여러 나라들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야홍릉은 목국에 있을 때, 제멋대로 행동했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들은 감히 그녀를 건드리지 못했고,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사람들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래서 그녀는 조용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가끔씩 예상치 못한 갈등이 생기더라도 그녀는 누구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한옥금을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둔 적이 없고 또 성미가 워낙 차가운데다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욕심이 없다는 것은 약점이 없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야홍릉은 얼마든지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익 다툼은 그녀와는 거리가 먼일이었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의 권모술수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항상 작은 다툼을 무시했고 감히 그녀를 건드린 사람은 무력으로 다스렸다.

그러나 남성국은 그녀가 잘 아는 환경이 아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용수가 데려온 사람으로 여겼고, 앞으로 봉왕부의 안주인이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으로만 인식했다.

바로 그 신분 때문에 수많은 미움을 받게 된 것이다.

야홍릉은 다른 사람의 미움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툭하면 찾아와 귀찮게 하는 건 너무 싫었다. 용수가 옆에서 막아주고 있지만 짧은 한 달 안에 비슷한 일을 많이 겪자 너무 짜증이 났다.

“애비.”

용수는 앞으로 다가가 눈을 내리깐 채, 입을 열었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짜증을 읽고 불안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것은 나지. 내 문제이지,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 자책하지 말거라.”

야홍릉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히려 그는 그녀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이들과 실랑이할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또 언제 시끄러운 일에 휘말릴지 모르는 상황이 너무 싫었다.

아예 모르는 척할 수도, 예전처럼 제멋대로 움직일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전과 환경이 달라졌다.

그러니 주변의 상황을 무시할 수 없었다.

용수는 침묵을 지키다 말했다.

“애비, 저택에서 이틀 정도 쉬십시오. 제가 준비를 마친 다음 애비와 함께 떠날 것입니다.”

“그럴 것 없다.”

야홍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난 혼자 떠날 것이니 따라오지 말거라.”

그녀의 말에 용수는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준수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애비!”

“넌 남성국에 남아 해야 할 일들을 하거라.”

야홍릉이 말했다.

“나도 할 일이 있다. 그러니 우리 둘의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꾸나.”

용수는 고개를 젓고 입술이 하얘지도록 꽉 깨물었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며 말했다.

“전 주인님이 가는 곳으로 따라갈 것입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주인님, 제 신분을 잊으신 것입니까?”

용수가 당황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주인님의 어영위입니다. 어영위의 직책은 주인님을 바로 옆에서 안전하게 모시는 것이고요.”

“그런데 넌 아니잖아. 네 신분은 남성국 태자이다. 앞으로 천하를 호령할 사람이지. 어영위의 신분은 내 옆에 무사히 오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네 스스로도 단련할 수 있는 기회였지. 그러나 네 신분과 능력은 이런 단련이 필요 없었다. 신은전에 오랫동안 있었으니 거기서 익힌 능력들이 나중에 네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마. 필요한 상황에 적어도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지 않겠느냐?”

“전 어영위입니다.”

용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뒤의 말을 듣지 못한 듯했다.

“신은전의 규정에 대해 주인님도 아실 것입니다. 주인으로 인정한 날부터 생사를 막론하고 절대 주인님의 곁을 떠나면 안 됩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남성국이야말로 네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곳이다.”

“남성국은 차기 황제가 책임질 것입니다. 전 아직 황위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무슨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까?”

용수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딱딱하게 말했다.

“제가 해야 할 일은 제가 지키고 싶은 사람을 지키는 것밖에 없습니다. 만약 남성국의 강산이 제 감정과 충돌이라도 된다면 전 망설이지 않고 전자를 포기할 것입니다.”

야홍릉은 침묵했다.

“전 애비를 남성국 황후로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 전 애비가 후궁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애비는 궁의 규칙에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죠. 다른 여인들과 총애를 다투고 음모를 꾸미는 것도 싫어하고요. 그래서 황후의 자리에 세우려고 했던 생각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생에 전 그저 주인님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제가 할 일은 주인님의 소원을 들어드리는 것이지 제가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정도 소원도 과한 것입니까?”

야홍릉은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그의 표정을 보며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정도 소원도 과한 것입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용수가 무표정한 얼굴로 또 입을 열었다.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웬일이냐? 네가 내 앞에서 이렇게 강하게 말도 다 하고 말이다.”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용수는 입을 꼭 다문 채, 상처받고도 지지 않으려고 바락바락 악을 쓰는 늑대처럼 한참이나 서 있다가 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강하게 말을 한 게 아닙니다. 주인님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저는 당황스럽고 불안합니다. 주인님이 절 버릴까 걱정됩니다.”

“난 기분이 나쁜 게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너 때문은 아니고.”

야홍릉이 대답했다.

그러자 용수의 말투가 한결 누그러졌다.

“주인님의 기분이 나빠진 건 무조건 제 잘못입니다. 그러니 제 역성을 들지 마십시오.”

‘내가 역성을 든다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지금 얘 역성을 들고 있다고?’

“그건 아니다. 난 그저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하지 않을 뿐이다.”

야홍릉이 말했다.

“전 오히려 주인님이 제게 화풀이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가끔씩 화를 내야 적당한 핑계를 대며 달래줄 텐데 그는 오히려 그녀가 침착하고 이성적인 게 두려웠다. 그가 고개를 숙이며 사죄할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었다.

야홍릉은 그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떠나야 해.”

“알고 있습니다.”

용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도 애비를 여기에 오래도록 잡아둘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제 책임이 어떻고 이런 말은 안 하실 수 없습니까? 애비가 저도 아니고 어떻게 제가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겠습니까?”

야홍릉은 입술을 움직이며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으나 용수가 앞질러 말했다.

“날 위해서라느니 같은 말도 하지 마십시오. 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절 위한 거라면 앞으로 절 노예로 부려 주십시오. 그러면 한 마디도 거역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애비가 ‘넌 네가 할 일이 있고 난 내가 할 일이 있다’는 말만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저와 애비 사이에 너와 내가 어디 있습니까?”

‘너와 내가 없다고?’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기억을 되찾기 전에는 굳이 서로를 가를 필요가 없었다. 어영위는 그녀의 전용 소유물이기에 그녀의 지시에만 따르며 목숨 또한 그녀의 것이었다.

하지만 기억을 되찾고 진실을 알게 된 뒤로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어영위로 볼 수 없었다.

‘……아니, 왜 불가능하지?’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어영위가 되는 것은 그의 선택이었다. 기억을 되찾아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어영위로 남길 원했다. 그녀는 한 번도 강요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용수도 직접 말했었다. 주인이 직접 이 관계를 해지하거나 어영위가 죽지 않는 이상, 그는 영원히 그녀의 어영위이자 그녀의 사람이라고.

그가 아무리 남성국의 태자이고 천하의 패자라고 그녀에게는 어영위일 뿐이었다.

“남성국의 일을 다 해결하는 데 얼마나 걸리지?”

용수는 멍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인님의 뜻은…….”

“황위에 등극해도 좋고 대권을 움켜쥐어도 좋으니 내가 떠나기 전에 남성국을 완전히 네 손에 넣는 게 좋을 것이다. 난 무능력한 사람을 곁에 두지 않으니까.”

야홍릉이 말했다.

용수는 눈을 깜박이며 그녀의 말을 반복했다.

“무능력한 사람을 곁에 두지 않는다고요?”

야홍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정도가…….”

용수는 입가를 실룩거리더니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정도가 무능력한 사람이라면 세상에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겠습니다.”

야홍릉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감히 말대꾸를 하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용수는 눈을 내리깔고 공손한 자세로 돌아왔다.

“주인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전 말대꾸를 하면 안 됩니다.”

“…….”

“주인님, 먼저 쉬십시오. 제가 궁에 다녀오겠습니다.”

용수는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오늘 같은 일은 앞으로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님은 저택에서 마음 편히 푹 쉬시기만 하면 됩니다. 전 곧 남성국의 일을 전부 해결할 것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금으로 된 집을 지어 주인님을 꽁꽁 숨기고 저만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누구도 주인님을 보지 못해 주인님의 화를 돋울 일이 없지 않습니까?”

야홍릉은 말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용수는 싱긋 웃은 뒤, 정려를 불러 점심 식사를 대령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그는 궁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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