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싸늘한 시선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리고 책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말없이 용수를 한참 바라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급하지?”
‘아까 사청의와 서재에서 무슨 얘기를 한 거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대권을 하루빨리 손에 넣어야 뭐든 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용수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야홍릉은 용수가 충분히 마음대로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이상 어떻게 더?”
용수는 말없이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남성국과 동제가 통혼한다는 소식을 퍼뜨렸습니다. 전 또 각 나라의 황족들을 초대해 황위 등극식을 하려고 합니다. 애비의 뜻은 어떻습니까?”
야홍릉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되지.”
초대장을 보내지 않더라도 황족들은 참지 못하고 축하를 빌미로 남성국에 올 것이다.
“그럼 목국 황족들 중에서 누구를 초대하는 게 좋을까요?”
‘목국?’
야홍릉은 침묵했다.
“네 말은 초대장을 바로 그 사람에게 보내자는 거냐?”
용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홍릉은 그의 의도를 짐작해 보았다가 대충 알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가 도대체 뭘 하려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가장 적합한 인물은…….’
“목국의 장자 야천란을 초대하자. 그가 폐하 대신 오게 말이야.”
“저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저와 애비는 정말 통하는 게 있나 봅니다.”
용수는 고개를 돌려 야홍릉의 얼굴에 입을 맞추었다.
야홍릉은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헌원용수, 내가…….”
“애비, 저를 계속 능묵으로 불러 주십시오. 전 주인님이 하사해 주신 이름이 좋습니다.”
용수가 불쑥 끼어들었다.
야홍릉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늘 밤에 무슨 충격이라도 받은 거냐?”
“아니요.”
용수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서재에서 사청의의 말을 듣고 뭔가 떠올랐을 뿐입니다.”
야홍릉은 뭐가 떠올랐는지 묻지 않았다.
그가 말하고 싶다면 묻지 않아도 말할 것이다. 그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야홍릉도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이 없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애비, 먼저 주무시지요.”
용수가 말했다.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수에게는 계획이 생겼다.
아니, 원래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시간을 앞당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분간 이 얘기를 야홍릉에게 해줄 생각이 없었다.
야홍릉의 기분을 잡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사청의는 용수와 야홍릉을 데리고 낭주 마장으로 갔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은 구불구불 이어진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 모양을 이루었다.
수많은 말들이 초원에서 뛰놀고 있었다.
건장한 체격의 말들은 움직일 때마다 강한 기운과 함께 먼지를 일구었다. 목장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말 사이를 누비는 사육사들이 휘파람을 불자 천군만마가 움직이는 것 같은 발걸음 소리가 땅을 진동하며 들려왔다.
사청의가 말했다.
“이 목장에서 사육하는 전쟁용 말은 기예병이 쓰기에 가장 적합합니다.”
용수와 야홍릉도 같은 생각이었다.
남성국의 병사들은 백만 명 정도였다. 가장 강한 흑의 기예병을 제외하고도 오만 명의 기예병들이 이 초원 밖의 군영에 있었다.
용수는 와서 둘러보기만 할 뿐, 오랫동안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셋은 곧 산골짜기 밖으로 갔다. 그들이 지나는 곳마다 수비가 엄격하여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없다면 용수와 야홍릉도 가까이할 수 없었다.
“오만 명의 병사들을 준비시켜라. 석 달 안에 그들을 쓸 때가 있을 거야.”
용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사청의가 대답했다.
“제가 이 군대에 이름을 ‘어풍기(禦風騎)’라고 지었습니다. 제왕의 군사들이 여섯 나라를 휩쓴다는 말이지요. 이 병사들은 하나같이 병기와 기마, 사격에 능하기에 전하를 도와 천하를 통일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절대 실패하지 않을 단단한 병사들이지요.”
‘제왕의 군사?’
용수는 실눈을 뜨고 야홍릉을 돌아보았다.
“애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야홍릉은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보더니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주 좋구나.”
그녀는 깊게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요새 용수의 표정이 좀 이상하다고 여긴 게 다였다.
그러나 방금 전, 그녀는 사청의 얼굴에 나타난 특별한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속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원소가 백상을 죽이게 할 때도 서당 스승처럼 점잖은 모습만 보여주었다.
그러나 용수의 질문에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야홍릉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대충 짐작이 되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끝없이 이어진 산맥을 바라보았다. 넓게 펼쳐진 초원 위에서 말들이 뛰놀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하늘과 초원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 같은데 노을빛이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느껴져 더욱 장엄하고 화려한 기운을 풍겼다.
이 모든 것이 용수의 것이었다.
야홍릉은 그제야 실감하게 되었다.
헌원용수가 원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도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을 것임을.
또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수천만 명의 미인들도 마음껏 골라 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그녀의 앞에서는 조심스럽고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다른 사람들은 절대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야홍릉도 가끔씩 용수가 이해되지 않았다.
전생에 그녀가 한옥금을 좋아할 때도 그저 그를 위해 전쟁터에 오르고 야소숙 대신 군공을 쌓아 주는 게 다였다.
그녀는 한옥금을 위해 허리를 숙일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좋아한다고 자신의 자부심까지 다 저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말 전혀 억울하지 않은 건가?’
사청의는 낭주를 떠난 뒤, 용수와 야홍릉이 떠나는 것을 바래다준 다음 부하들을 데리고 오동진으로 돌아갔다.
팔월 이십육 일 오후.
용수와 야홍릉은 남성국의 황성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봉왕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헌원용수가 돌아온 뒤, 봉왕부의 규칙은 날이 갈수록 더 엄격해졌다. 한운은 하인들을 빈틈없이 관리하며 절대 실수가 없게 했다.
그러나 지금, 봉왕부는 시장처럼 떠들썩했다. 황족의 청왕, 단왕, 성왕(成王) 및 다른 군왕과 세자, 공자들은 모두 넓은 정원에 서 있었다.
저택으로 들어서니 웅성웅성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봉왕 전하 납시오.”
누군가가 크게 외치자 사람들의 말소리가 뚝 끊겼다.
순식간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용수는 정원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더니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것입니까? 제 저택이 절당이라도 됩니까? 여기서 제사라도 지내시려는 것입니까?”
“봉왕 전하, 돌아오셨습니까?”
청왕이 나서며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온화하게 웃었다.
“전하께서 나갔다고 한 집사가 말했는데 다들 믿지 않았습니다. 전하가 손님을 만나기 싫어서 피하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정말 나가셨던 거군요.”
용수는 차가운 얼굴로 야홍릉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봉왕 전하.”
청왕은 시선을 돌려 야홍릉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들 조 부마의 일로 찾아온 것입니다.”
황족 종친들이 적의로 가득한 시선으로 야홍릉을 바라보았지만 옆에 용수가 있어 무례한 말을 하거나 도발하는 사람이 없었다.
진녕 공주와 조 부마의 전례가 있는데 누가 또 멍청한 짓을 하겠는가?
하지만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는 것은 야홍릉에게도 썩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헌원용수.”
야홍릉은 손을 빼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 일은 알아서 잘 해결…….”
“봉왕 오라버니.”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 뒤에서 하얀색 치마를 입은 소녀가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나이가 기껏해서 열다섯 살쯤 되어 보였다.
가냘픈 어깨에 잘록한 허리, 깨끗하고 새하얀 피부를 가진 소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불안한 표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아련한 표정으로 나타나 용수와 야홍릉에게 예를 올렸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복유(曹馥柔)가 봉왕 오라버니를 뵙습니다.”
용수가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넌 누구냐?”
“이 아이는 진녕 공주의 여식 조복유입니다. 오늘 진녕 공주의 일로 사과를 하러 왔는데 그 김에 며칠 머무르려고요.”
‘며칠 머무른다고?’
용수의 목소리가 대뜸 차갑게 변했다.
“누구의 생각입니까?”
“그게…….”
청왕이 마른기침을 했다.
“조 부마는 그래도 전하의 고모부이지 않습니까? 저와 다른 어른의 체면을 봐서라도…….”
야홍릉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청왕은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진녕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전하의 고모인데 이렇게 한다면 종친들의 불만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진녕이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전하의 고모입니다.”
단왕이 불만 어린 어조로 말했다.
“태자라는 분이 너그럽지 못하게 굳이 고모부를 사지로 몰아야겠습니까?”
“방금 전의 그분이 동제의 공주입니까?”
성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나섰다.
“용모는 그럴듯하나 너무 예의가 없는 것 아닙니까? 어른이 이렇게 많은데 말도 없이 떠난 것입니까? 일부러 보라고 이러는 건가요? 정말 너무 무례하군요. 안하무인이 따로 없습니다. 봉왕 전하, 저는 이런 여인이 봉왕비가 되는 것을 절대 반대합니다.”
용수는 뒷짐을 지고 말없이 서 있었다. 그의 눈빛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조복유는 겁먹은 얼굴로 용수를 보더니 눈을 내리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봉왕 오라버니, 제가 어머니를 대신해 사죄할게요. 오라버니께서 아버지 좀 풀어주세요. 제, 제가 동제의 공주의 시녀 노릇을 할게요. 언니가 화만 푼다면…….”
“그건 안 됩니다.”
이때, 한 젊은 남자가 화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는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복유처럼 여린 아이가 어떻게 시녀의 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 그 동제의 공주는 한눈에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던데 널 일부러 괴롭히기라도 한다면 넌 사흘도 지나지 않아 죽을 것이다. 그러나 멍청한 생각은 하지 말아라.”
조복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전 정말 아버지를 구하고 싶어요. 공주 언니의 용서를 받아야만 봉왕 오라버니가…… 제 아버지를 풀어주실 거잖아요…….”
“봉왕 전하.”
그 젊은 남자는 고개를 돌려 용수를 바라보았다.
“진녕 공주는 전하의 가족이고 복유는 전하의 여동생입니다. 전하께서는 정녕 외부인 한 명 때문에 가족 불화를 야기해야겠습니까?”
‘가족 불화를 야기해?’
용수는 그들의 연극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차갑게 외쳤다.
“한운.”
“전하.”
“이들을 밖으로 모셔라.”
용수의 목소리는 서리가 낀 것처럼 차가웠다.
“내 허락 없이 외부인을 왕부로 들였으니 곤장 서른 대를 맞아라.”
한운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네.”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용수!”
“봉왕 전하!”
“봉왕 오라버니…….”
헌원용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돌아서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