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누구의 세상인가
용수의 말에 야홍릉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서릉도 복잡하군. 그래서 서릉이 금국을 도와주려고 한 것은 누가 내린 결정이냐?”
“황제가 내린 결정일 겁니다. 황후의 친척도 지지하고요. 병권이 모두 황후의 친척이 움켜쥐고 있어서 전쟁을 치를수록 그들이 얻는 이익도 크거든요.”
용수가 말했다.
“사청의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 많느냐? 타국 황자가 직접 오동진으로 찾아올 만큼?”
야홍릉이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만약 금국이거나 서릉이 모두 전쟁용 말을 탐낸다면 사청의의 오동진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을까?’
용수는 정원의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천천히 걸으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청의가 낭주 마장을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직접 사청의를 만난 사람은 적지요. 원소가 여기까지 찾아온 건 방금 전 그 여인 때문이었습니다. 사청의는 서릉 제경의 사람입니다.”
‘서릉 제경의 사람이라고?’
야홍릉은 사청의가 풍기는 우아한 느낌과 감출 수 없는 도도함을 떠올렸다.
그가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서릉의 사람일 줄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낭주와 서릉의 변계선은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 천연적인 장벽입니다. 병사가 쳐들어오지 못하거든요. 그리고 낭주의 마장 밖도 수비가 완벽하여 마장이 습격당할 걱정은 없습니다.”
용수는 먼 곳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노을이 드리워 아주 아름다웠다.
“사청의는…… 오동진에 있는 것이 정보 수집에 유리합니다. 객잔은 작지만 고수가 많아 매일 정보가 들어오기도 하고 이곳에서 지시가 나가기도 합니다.
변방의 병사들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원소가 사람을 데리고 온다고 해도 다른 곳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오동진의 북쪽은 모두 남성국의 땅인데 다른 나라의 병사들이 손쉽게 남성국 안으로 들어올 수 없지요.”
야홍릉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성국의 서남 양쪽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낭주는 남성국과 서릉의 변계이긴 하지만 천연적인 장벽이 있기에 병사들이 직접 드나들 수 없었다.
그래서 두 나라가 싸울 가능성도 없었다. 게다가 천연적으로 훌륭한 초원이 있기에 전쟁용 말을 사육하기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오동진은 낭주와 가까웠다. 사청의는 오동진에서 할 일이 있었다.
청의루에는 고수가 많아 일반인들은 사청의에게 트집을 잡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
대규모의 병사들을 움직이지 않는 이상, 누구도 사청의와 이곳의 고수들을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서릉 병사들은 이곳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사청의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사청의의 안전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야홍릉이 물었다.
“저자와 원소는 아는 사이냐?”
“애비, 이렇게 빨리 파악하신 것입니까? 정말 눈썰미가 대단하십니다.”
용수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야홍릉은 담담하게 그를 힐끗 보았다.
‘날 바보로 보나?’
방금 전 원소와 사청의의 대화와 백상의 사청의에 대한 호칭을 듣고도 둘이 지인 사이라는 것을 모르는 게 이상했다.
“원소는 황자의 신분으로 직접 거래하러 온 것은 사청의와 아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청의의 마장이 남성국 황족 소유인 줄은 모릅니다.”
용수가 말했다.
야홍릉이 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남성국 태자의 것이겠지.”
“네, 애비 말씀이 맞습니다. 저와 사청의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는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소가 이번에 온 목적이 중요하니까요.”
원소가 전쟁용 말을 사려고 하는 원인이 병사들을 무장하기 위해서였다.
서릉이 정말 금국을 도와주려면 먼저 자신의 병사들부터 무장해야 했다.
‘지금에야 말을 산다고…….’
“사청의에게 말을 팔라고 지시를 내린 목적은 그 여인을 죽이는 것이냐?”
용수는 고개를 저었다.
“애비, 제 의도를 알아맞혀 보십시오.”
‘의도?’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사청의가 서릉과 원한이 있느냐?”
“애비, 역시 총명하십니다.”
야홍릉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서릉 황족과 귀족들에게도 복잡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평소 서릉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뭐라고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상황으로 보면 서릉이 금국을 도와주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야홍릉의 생각이 맞았다. 사청의의 과거 경력을 내버려 두고서라도 백상의 죽음은 원소를 위험한 상황으로 밀어 넣었다.
게다가 사청의가 백상에 대한 태도를 보니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는 예전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백상에게 미련이 남은 게 없는 것 같았다.
있다고 해도 그건 미움뿐이었다.
원소는 사청의의 상대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난 뒤, 사청의는 사람을 시켜 용수를 서재로 모시려고 했다.
용수는 야홍릉의 뜻을 물었다.
“애비, 함께 가실 것입니까?”
어느 나라의 국가 기밀도 용수는 그녀에게 숨긴 적 없이 다 드러냈다. 그의 것은 모두 그녀의 것이라는 말처럼 전혀 숨기는 게 없었다.
야홍릉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정원을 둘러볼 테니 너 혼자 가거라.”
그녀는 사청의에 대해 잘 모르기에 이번 대화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용수도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
야홍릉은 홀로 정원 의자에 앉아 서서히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서릉, 목국, 남성국, 제국, 그리고 금국.
모든 나라가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국력이 점점 약해지는 남제를 제외하고 다른 나라들은 모두 욕심을 내고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섯 나라의 평화는 깨지게 될 것이다.
‘이 천하는 최종적으로 누구의 것이 될까?’
조용한 서재에 책장 넘기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용모가 준수한 청년이 의자에 앉아서 번뜩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점심에 여인을 ‘애비’라고 부르던 부드러운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의 몸에서는 사람을 압박하는 위엄이 흐르고 있었다.
“서릉이 금국을 돕는 조건이 무엇이냐?”
사청의가 책상 앞에 서서 말했다.
“금국의 병사들은 용맹하고 강하나 국고가 힘드니 전쟁용 말과 양식을 공급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니 서릉이 전쟁용 말고 양식을 제공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목국을 이기면 앞으로 천하를 서릉과 나누겠다고 말이죠.”
금국의 사람들은 원래 난폭하고 무자비했다.
병사들도 강했으나 경제가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서릉은 국고가 충족하나 병력이 약했다.
그러나 만약 서릉에서 정말 전쟁용 말과 양식을 금국에게 제공하여 금국과 동맹을 맺는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
단단히 무장한 금국 병사들은 크게 강해질 것이고 목국의 병사들과 승부를 가리기 어려울 것이다.
목국이 급히 장군을 바꾸어 금국에게도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못할 기회였다.
이번 기회에 서릉의 도움을 얻기까지 한다면 날개가 돋힌 것처럼 크게 강해질 것이다.
목국의 변방에는 야홍릉 대신 야소숙이 나온다고 했다. 그러나 야소숙은 금국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저 호국 공주가 남겨 놓은 위엄이 남아 있어 금국은 당분간 무모하게 움직이지 못할 뿐이었다.
‘서릉과 천하를 나눈다?’
용수는 생각에 잠겼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백 명의 고수들을 보내 서릉 조정의 동향을 파악하거라. 필요하다면 서릉 황족들 사이에 혼란은 만들어도 좋다. 그들이 금국을 도울 겨를이 없게 만들거라.”
사청의는 대답한 뒤, 잠시 뒤에 물었다.
“주인님께서는 공주를 남성국 황후로 세울 생각이십니까?”
장부를 펼치던 용수는 손을 멈추고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
사청의는 고개를 흔들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제 생각이 맞다면 공주는 야심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용수가 물었다.
“뭘 알고 있는 거냐?”
“목국에 관한 일입니다.”
사청의는 눈을 내리깔았다.
“어떤 말은 전하께 실례가 될 수 있으나 안 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용수는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성국에는 제왕이 한 명밖에 없어야 하고 천하 역시 주인이 한 명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주인은 헌원씨여야만 합니다.”
사청의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헌원용수의 포부를 알고 있었고 용수가 누구를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준비를 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런 사랑의 감정 앞에서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도 충동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용수는 장부를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앉아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장차 천하의 주인이 될 사람의 성을 네가 결정하느냐?”
“제가 어찌 감히.”
사청의는 무릎을 꿇었다.
“저는 제 신분을 알기에 절대 선을 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성국 제사전과 폐하는 절대 다른 경우를 받아들이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는 주인 대신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충성을 다해야 하는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부하로서 주인이 잊어버린 일을 일깨워 주기는 해야 했다.
남성국 황족 헌원씨.
이 사실을, 이 당위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제사전이 승인한 남성국의 제왕은 헌원씨의 혈통이어야 했다.
헌원씨가 몰락하지 않는 이상, 누구도 남성국의 종묘사직을 두고 장난을 치면 안 될 것이다.
“앞으로 천하가 누구의 세상이 될 지에 대해선 나에게 생각이 있다. 넌 그저 네가 할 일만 잘하면 된다. 이건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다. 앞으로 비슷한 말도 듣고 싶지 않구나.”
용수가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사청의는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용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어서서 서재를 나가버렸다.
목욕을 마치고 침대에 누운 용수는 침대에 기대 책을 읽는 야홍릉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야홍릉은 그의 눈빛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러냐?”
용수는 시선을 들어 그녀의 평온한 눈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야홍릉은 ‘응’이라고 대답한 뒤, 다시 책을 읽었다.
그녀는 호기심이 짙은 사람이 아니었다.
용수가 말하기 싫어하니 그녀도 굳이 억지로 물을 생각이 없었다.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지 않은가?
“애비?”
“응?”
용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월 초여드레가 제 생일입니다.”
야홍릉은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생일 선물을 원하는 것이냐?”
“아니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전 생일 전에 황위에 오르고 싶습니다.”